81화
여름이 부쩍부쩍 가까워지고 있단 소리는 봄꽃이 지고 있단 소리와 같다.
난 그게 아쉬워서 앤, 메리와 함께 안뜰로 나왔다. 정원은 무척 화려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건물 사이에 있는 안뜰은 보다 자유로웠다. 그래서 난 안뜰이 더 좋았다. 여긴 토끼풀 같은 들풀도 눈치 보지 않고 자라니까.
“와, 너무 예쁜 화관이에요.”
“우리 아가씨 능력 좋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내가 토끼풀로 화관을 하나 만들자, 메리와 앤이 칭찬해 줬다. 고작 화관 하나 가지고 웬 난리인가 싶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게 권력의 맛이라면 정말 달달하긴 하다.
난 얼른 다른 화관도 만들어서 앤과 메리에게 씌워 줬다.
“어머나…….”
“주는 거예요?”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내가 수줍게 고개만 끄덕이자, 두 사람은 감동받아 눈썹을 늘어뜨리며 입을 가렸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이야, 이거 가보로 모셔야겠는데요?”
부끄럽고 또 기뻐서 몸만 배배 꼴 때였다.
“여기에 있었구나.”
카르시안이 걸어왔다. 그는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빛을 등지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라티아,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
“응? 응, 알았어.”
카르시안의 말에 앤과 메리가 눈치껏 물러났다. 나와 카르시안은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읽어 봐.”
거두절미하고 꺼내는 말에, 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다. 대답 대신 서류 봉투를 받아들자, 카르시안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쩐지 조금 긴장이 되어 손끝이 약간 떨렸다. 난 카르시안이 건넨 서류 봉투에서 문서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상단에 있는 문장을 읽자마자 얼어붙었다.
“……아카데미 입학 허가서?”
카르시안이 내게 건넨 건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허가서였다. 난 서류를 더 읽어 내려갈 생각도 못 하고 곧장 카르시안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나를 보고 있던 카르시안이 안뜰 너머의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깎아지른 설산 같은 콧대와 그 밑에 굳게 다물린 입술이 어딘가 초연해 보였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난 카르시안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을뿐더러, 여태 그런 낌새를 보이지도 않았다.
카르시안도, 클로드도!
“최근에 준비해서 중도 입학을 하는 거야?”
“중도 입학 아니야. 공작령에 오자마자 시험을 치렀어.”
카르시안이 그간 날 속이지 않았다는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물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냉철하게도 내 기대를 끊어 냈다.
“……아, 그랬구나.”
난 할 말을 잃었다. 그럼 3년 동안 카르시안은 일부러 내게 자신이 아카데미 입학 시험을 치렀다는 걸 비밀로 했단 소리다. 배신감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감정이 끓는 물처럼 서서히 달궈졌다. 왜 여태 나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려던 순간 나도 모르게 덜그럭거렸다.
근데 난, 이 사실이 왜 이렇게 슬픈 거지?
카르시안은 공자다. 원작엔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건 카르시안의 일이다. 굳이 그가 내게 미주알고주알 떠들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선택하는 것뿐이니까.
그런데 이걸 인정하자, 가슴이 저미듯 아파 왔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심장 부근이 찌르르 하고 아파 왔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카르시안이 입을 열었다.
“너 때문이야.”
“……뭐?”
“아카데미 입학 시험을 치른 거 말이야.”
조금 전까지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카르시안이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너를 질투했어.”
“질, 투……?”
“그래. 후작저를 무너뜨린 증거는 네가 다 모은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재판장에서 똑똑하게 증언하고 결국 우리의 복수를 해낸 네게 말이야.”
가당치도 않지만, 하고 카르시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어.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난 널 동경했거든.”
난 충격으로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남주인 카르시안이 나 같은 악역 조연을 동경하다니?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더 많이 배우면 너와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뒤에선 네가 넘어져도 잡아 주지 못할 테니까. 난 지금 네 옆에 있는 게 고작이니까.”
“……?”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어. 옆에 있으면 잡아 주거나, 함께 다치거나 둘 중 하나지만 앞에 있으면 받아 줄 수도 있다는걸.”
날 바라보던 카르시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간 카르시안이 내 손을 부득불 잡으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니까 난 아카데미에 갈 거야, 라티아.”
조용한 목소리였다. 솨아아,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는 이제 막 생동하기 시작하는 여름 풀들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잠시 후,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아카데미에 간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나는…… 너와 조금 다른 생각이야.”
카르시안의 어깨가 움찔 굳는 게 보였다. 나도 카르시안에게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건물을 양옆에 끼고 보는 정원은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진 액자를 보는 것 같았다.
“옆에 있으면 잡아 주거나, 함께 다치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랬지. 그래서 앞으로 가고 싶다고. 그런데 카르시안, 앞으로 가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
“맞잡은 손을 흔들며 걸을 수도 없고, 우리가 지금 정원을 보는 것처럼 같은 곳을 바라볼 수도 없어. 뒤에 있는 사람은 꽃밭을 보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숲을 보게 될지도 몰라.”
카르시안이 입을 달싹거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같이 다치는 게 뭐 어때서. 혼자 넘어지면 창피하지만 같이 넘어지면 웃어넘길 수 있어. 혼자 걸으면 추운 설원도 함께 걸으면 아름다운 광경으로 변하는 법이잖아. 내 목도리가 흐트러지면 네가 고쳐 주면 되고, 네 장갑이 벗겨지면 손을 잡으면 돼.”
난 분수대를 짚고 있는 카르시안의 손등을 덮듯이 잡았다. 흠칫 놀란 카르시안이 맞닿은 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주 더운 사막을 걷더라도, 낭떠러지에 떨어지더라도 혼자보단 둘이 낫다고 생각해.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니까.”
“서로에게, 기대어…….”
가만히 내 손바닥 밑에 잡혀 있던 카르시안이 손을 뒤집어 깍지를 꼈다. 손가락 틈 사이로 파고드는 건조하고 미지근한 온도를 느끼며 나는 카르시안을 올려다봤다.
카르시안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이 읽히지 않아 답답했다.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카르시안이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마에 꽁 하고 박치기를 했다.
그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못 당하겠다, 라티아.”
“으, 응?”
“벅차.”
“……응?”
“널 따라가는 거.”
눈까지 감은 카르시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널 따라가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앞지를 수가 있겠어. 나란히 걷는 게 고작이겠지. 하지만 그거면 돼.”
“…….”
“그래, 그거면 돼.”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속이 다 후련하다는 듯 느껴졌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카르시안이 말했다.
“아카데미에 갈게.”
“응.”
“널 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나란히 걷기 위해서.”
“응.”
난 이마를 맞댄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아카데미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건 서운하지만,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카르시안에겐 미안하지만 서운함이 사르르 풀려 버렸다. 그래서 난 기쁘게 그를 아카데미로 보낼 수 있었다.
잠시 입술만 달싹거리던 카르시안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와 ……같이. 늘 나란히 걷고 싶어.”
카르시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하지만 귓가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새빨개 보였다. 숨도 조금 가팔라졌고 질끈 감은 눈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맞닿은 이마가 조금 뜨거워졌다. 둥, 둥, 둥, 하고 맥동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 건 아닐 듯싶었다.
난 그런 카르시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
“함께 걷자.”
“……정말?”
“응.”
난 맞댄 이마를 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시안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조금 수줍은 기색도 엿보이는 게 무척 사랑스러웠다.
난 그런 카르시안을 보며 부드럽게 웃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근데 아카데미에 들어간 너와 진도가 맞으려면 일정을 좀 조정해야겠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 ……뭐?”
그런데 내 말에 뭐라고 중얼거리던 카르시안이 우뚝 굳었다. 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응? 혼자 아카데미에선 공부하기 외로우니까 같은 과목을 공부하잔 소리 아니야?”
내 말을 들은 카르시안의 얼굴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조금 전까지 수줍은 기운이 감돌던 얼굴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응? 왜 그러지? 이 소리가 아닌가?
“카르시안?”
난 완전히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카르시안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얼어붙은 듯 나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