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똑똑똑, 작지만 다부진 손이 클로드의 집무실 문을 직접 두드렸다. 안에서 들라는 기별이 오자, 손의 주인은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아, 그래.”
그는 바로 카르시안으로, 조금 전 라티아를 돌려보낸 클로드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 참이었다. 클로드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날이 더워 검은 셔츠의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앉아라.”
그는 서류를 읽느라 바빠, 카르시안을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사실 클로드는 매사에 이렇게 무심했다. 딱히 냉기가 도는 게 아니고 일을 우선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가 문을 보며 반겨 주는 이는 오로지 라티아뿐이었지만, 정작 라티아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해서, 클로드의 이런 냉대 아닌 냉대가 익숙한 터라 카르시안은 별다른 말 없이 클로드의 옆에 앉았다.
‘……음?’
그러며 클로드가 읽고 있는 문서 쪽으로 시선을 보냈는데, 문득 클로드의 어깨에 묻어 있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잘못 보려야 잘못 볼 수 없는 밀빛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공작성에서 이렇게 은은하게 베이지 빛깔이 감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한 명뿐이었다.
“라티아가…… 다녀갔습니까?”
“아, 그래.”
클로드가 별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다 이내 카르시안을 쳐다봤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말이다. 카르시안이 멋쩍은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어깨에 머리카락이 묻어 있습니다.”
클로드는 곧장 제 어깨를 내려다봤다. 라티아의 머리카락 한 올이 묻어 있었다. 여러 가닥도 아니고 고작 한 올 말이다. 물론 흔한 색도 아니고 공작성에 이런 밀빛 머리칼을 가진 이는 라티아뿐이라지만.
‘어떻게 머리카락 한 올 가지고 알아본 거지?’
클로드는 제 아들이지만 카르시안이 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아들.”
“예, 아버지.”
“라티아 앞에선 아는 척하지 말아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머리카락 한 올 가지고 그 아이가 어디에 다녀갔고, 누구랑 있었고 따위를 알아낸다는 사실 말이다.”
“안 합니다, 그런 거!”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이 새빨개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클로드가 라티아의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말했다.
“안 하긴. 너도 모르게 말이 툭 나올 수도 있지 않으냐, 지금처럼.”
“그건…….”
“흠, 아까 라티아가 내게 안겨 있었는데 그때 묻었던 것 같군.”
“안겨, 있어요……?”
카르시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목소리마저 조금 떨렸는데, 그에 클로드의 입가에 문득 짓궂은 미소가 깃들었다. 클로드는 조금 전까지 라티아를 안고 있던 것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그래. 내 무릎에 앉혀 안고서 대화를 나눴지.”
“……아버지가 억지로 해서 라티아가 곤란했겠습니다.”
클로드가 지은 미소의 뜻을 알아차린 카르시안이 불퉁하게 말했다. 라티아가 누군가에게, 특히 클로드에게 답싹 안겨 조잘조잘 떠들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도발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마치 카르시안이 그렇게 말할 거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억지로 아닌데.”
“…….”
“라티아가 내게 직접 안긴 건데.”
물론 허벅지에 앉힌 건 클로드의 뜻이라지만 나중에선 내려가지도 않고 대답하기 부끄럽다며 답싹 안기기도 했다.?
‘그러니 라티아가 직접 안긴 거긴 맞지.’
클로드는 교묘히 말을 조작했다. 그 말에 카르시안이 충격에 빠진 건 당연했다.
‘나는…… 한 번도 안아 준 적 없으면서……!’
클로드에겐 직접 안겼다니, 그를 안아 줬다니!
라티아를 향한 배신감과 서운함이 파도치듯 밀려와 온몸을 장악했다. 가장 큰 감정은 역시 질투였다.
‘머리카락이 묻을 정도면 잠깐 안은 건 아닌 모양인데…….’
꽤 오랫동안 라티아를 안고 대화를 나눴을 클로드가 미친 듯이 부러웠다. 카르시안은 제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허벅지에 올려 둔 손을 주먹 쥐었다. 하지만 클로드의 예리한 눈빛을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질투가 나나 본데.’
클로드는 즐거운 마음으로 혼자 씩씩거리는 아들을 감상했다. 서럽고 서운함이 역력한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클로드는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느긋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턱을 괴는 척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한동안 혼자 씩씩거렸다가 풀이 죽길 반복하던 카르시안이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티아가 나보다 아버지를 더 가깝게 여길 수도 있지. 라티아는 가족에 목말라 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화가 났다.
‘근데 나도 가족이잖아. 아버지보다 날 먼저 만났고, 나랑 같이 더 오래 지냈고, 비록 한 칸 차이지만 방도 나랑 더 가까운데……!’
다시 불같이 치솟는 서운함에, 카르시안은 결국 울컥해서 말했다.
“라티아가 정말로 아버지께 먼저, 스스로, 자의로 안긴 게 맞습니까?”
“그게 뭐 그리 중요하나. 딸이 아빠한테 안길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딸……!”
카르시안은 클로드에게 따질 기세로 덤벼들었지만 본전도 찾지 못했다.
‘딸이라니, 딸이라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왜냐면 라티아가 클로드의 딸이 되면 자신과는 남매가 되니까! 아까까지 열렬히 타오르던 카르시안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무 큰 충격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르시안은 클로드와 계속 이야기를 나눠 봤자 그에게 휘말리기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카르시안이 언제 동요했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라티아가 내 딸이 되어도 괜찮으냐?”
하지만 클로드는 이대로 카르시안을 편안하게 해 줄 생각이 없는지 또 살살 긁어 댔다. 그러나 카르시안은 그사이에 한층 성장했다.
카르시안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 라티아의 후견인입니다. 딸로 입양하려면 이 후견 제도를 파해야 하는데, 제국법상 후견인이 피후견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피후견자에게 있는 재산을 노리는 걸 수도 있으니까요.”
“흠…….”
카르시안의 차분한 말에 클로드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하여간, 누굴 닮아서 저렇게 구렁이 같은지.’
귀여운 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클로드가 더 놀리지 않겠단 뜻으로 카르시안에게 제가 읽던 서류를 건넸다. 카르시안은 별말 없이 문서를 넘겨받았고, 곧장 읽어 내려갔다.?
붉은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다 끝에 다다랐을 때, 카르시안이 말했다.
“이게 절 부른 이유입니까?”
“그래. 드디어 승인이 났더군.”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은 문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제 다리 위에 올려 뒀다. 카르시안의 표정은 아까 라티아가 클로드에게 안겨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그에 클로드가 넌지시 물었다.
“기뻐 보이지 않는구나.”
“아…….”
“고대했던 아카데미 입학 허가서서인데도 말이야.”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은 입을 딱 다물었다. 붉은 눈동자가 문서 최상단의 ‘하이페디움 국립 아카데미 입학 허가서’라는 문장을 다시금 담았다.
카르시안은 이 허가서가 도착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보통 아카데미에는 10살쯤 들어가는데, 카르시안은 벌써 13살이다. 또래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사실 입학 시험은 일찌감치 합격했다. 다만 한 번 순번이 밀리자 기약이 없어져 여태 기다리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허가서를 읽고 무척 기뻐해야 했는데.
‘아카데미에 가면 라티아와 떨어지게 돼.’
그게 마음에 걸려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허가서가 라티아와 제 사이를 갈라놓는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카르시안이 우물쭈물하자 클로드가 말했다.
“라티아에겐 내가 말하마.”
“……!”
“지금 네 모습을 보니 백 년이 흘러도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보이니 말이다.”
“아, 아버지…….”
“아니면 네가 말하겠느냐? 아카데미에 들어갈 거라고.”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었고, 그러려면 어차피 말해야 하는 내용이야.’
머리로는 아는데 선뜻 제가 말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르시안은 잠시 망설였다. 정말 클로드 말대로 100년이 지나도 라티아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카르시안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내가 말해야 해. 내 일이니까, 내가 라티아에게 직접.’
라티아도 그편을 덜 서운해할 것이다. 그간 아카데미 입학 시험을 치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카르시안이 다짐하듯 말했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오늘 중으로요.”
클로드는 재차 묻지 않고 그러라며 카르시안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카르시안은 클로드에게 꾸벅 인사하고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라티아의 방으로 가고 있는데, 안뜰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라티아와 앤, 메리가 둘러앉아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꺄르르, 연신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이다.
라티아는 손재주도 좋아서 금방 여러 개의 화관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앤과 메리에게 화관을 씌워 줬다. 두 사람이 감동하자, 라티아가 수줍은 듯 웃었다. 뺨을 붉히며 쭈뼛거리는 모양새가 칭찬받은 병아리처럼 사랑스러웠다.?
카르시안은 창문을 짚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선 채, 따듯한 초여름 햇살을 맞으며 밝게 웃는 라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라티아를 영영 보지 못할 사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