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샤벨과 그의 잔당들은 몽땅 체포되었고 그 죄질이 사악하여 사형과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클로드는 메리에게 샤벨을 제대로 진압하라 이른 후 나에게 곧장 달려왔다.
‘공작님, 어디 다치신 곳은……!’
그리고는 그의 안위를 묻는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는 깜짝 놀라 숨을 헙 집어삼켰다. 클로드가 나를 쓰다듬어 주거나 뺨을 꼬집는 일은 종종 있었어도, 이렇게 끌어안아 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난 얼떨떨한 나머지 얼어붙어 그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겨 있었는데, 클로드가 낮게 속삭였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난 클로드에게 들은 그 말이 가슴에 깊게 아로새겨졌다. 클로드는 내게 쓸모를 다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칭찬받는 건 너무 기뻤다.
‘다행이에요. 다치지 않아서…….’
놀란 마음이 그제야 진정되며 조금 울음이 나왔다.
사실 클로드와 함께 귀가하려고 찾은 주택가에서 집이 폭발했단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 중심지에 클로드가 있단 걸 알았을 땐 머리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탄환의 쓰임에 대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오히려 그 탄환은 이런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 같았다.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난 멀쩡하게 살아 있는 클로드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클로드에게 들켜, 한동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후 카르시안이 나를 어서 놓으라고 난리를 쳤지만 클로드는 끝내 날 놓지 않고 직접 안고 돌아왔다.
그날 밤, 난 악몽을 꿨다.
내가 아무리 마법 탄환을 써도 폭발이 가시지 않는 끔찍한 꿈이었다.
‘아버지!’
카르시안이 클로드를 울부짖으며 불렀고, 나는 모든 마법 탄환을 썼지만 결국 클로드를 구해낼 수 없었다. 그런 끔찍한 악몽 속에서, 클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화마로 뒤덮여 하늘이 붉게 물들고 검게 그을렸던 세상이 가로로 부욱 찢어지더니, 그 너머로 아주 다정하게 웃는 클로드가 보였다.
‘라티아.’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달려가 안겼고, 클로드는 거짓말처럼 따듯한 품으로 나를 안아 줬다. 마치 친아빠처럼 말이다. 그 순간 꿈의 형태가 격변했다.
꿈속에서 나와 카르시안 그리고 클로드는 공작성의 정원에서 함께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클로드는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채 책을 읽으며 여유를 만끽했다.
카르시안은 그런 클로드를 탐탁잖게 봤지만, 내가 머리에 얹어 준 화관 덕분에 참는 듯했다. 나는 두 사람이 번갈아 주는 과일을 받아먹느라 양 볼이 빵빵해서 힘들었지만, 무척 행복한 꿈이었다. 덕분에 하마터면 클로드를 잃을 뻔했다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다음 날, 클로드가 세상의 온갖 귀한 보석과 산해진미를 가져다줘서 거부하느라 정신이 쏙 빠진 탓도 있지만 말이다.
며칠이 지났다.
유리드가 만든 총과 마법 탄환을 황제에게 진상하고 온 클로드가 나를 불렀다. 집무실에 노크를 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난 안으로 들어서며 원피스 자락을 늘려 인사했다.
“황도에는 잘 다녀오셨나요?”
“뭘 그렇게 딱딱하게 말해. 이리 와.”
소파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난 좀 덜그럭거렸다. 내가 머뭇거리자 탁탁, 클로드가 다시 제 다리를 두드렸다.
“고, 공작……님?”
“왜.”
“어, 어…….”
내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그가 얼어붙은 소동물을 본 포식자처럼 느긋하게 웃었다.
“손이 많이 가는군.”
그러며 친히 걸어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앗, 공작님!”
난 깜짝 놀라 클로드의 목을 감싸 안았다. 클로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예정대로 나를 허벅지에 앉혔다. 내가 기댈 수 있도록 팔도 내밀어 줬는데, 마치 품에서 딸을 한시도 떨어트리고 싶지 않아 하는 딸바보 아빠 같았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뻣뻣하게 굳어 있자, 그가 큰 손으로 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리드에게 들었다. 네가 폭발을 제압한 그 탄환은 아주 귀한 것이라며.”
“아…… 네.”
“듣자 하니 물이 소환되는 탄환도 있다 하던데, 왜 그걸 소모한 거지?”
황제에게 진상하기 딱 좋은 물건이었는데 아깝게 됐다며, 클로드가 넌지시 덧붙였다. 물론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겐 황제보다 클로드가 더 중요했다. 난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그걸 사용하면 화마를 잡을 수 있긴 하지만, 공작님이 다치시잖아요.”
“흐음. 날 위해서 썼다?”
“네. 왜냐면 공작님은 공작님이시고, 카르시안의 아버지고, 그리고…….”
“그럼 너에게는?”
“……네?”
클로드가 나를 받치지 않은 쪽 손을 팔걸이에 대고 턱을 괴었다. 느슨하게 늘어지는 자태는 햇살을 쬐어 나른해진 맹수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쩐지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너에게 나는 뭐지?”
난 입을 딱 다물었다. 원래도 다물려 있긴 했지만 아예 이까지 물었다. 그만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저 대사는 원작에서 클로드가 이리스에게 했던 말이니까!
원작에서 카르시안과 함께 떠난 무역에서 클로드는 이리스를 만난다. 그리고 이리스와 함께 가족처럼 지내며 그녀에게 마음을 연다.
이리스를 단순히 ‘아비를 잃은 망국의 공주’가 아니라 ‘카르시안의 예비 아내’이자 자신의 ‘또 다른 딸’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리스는 클로드의 마음을 몰라 ‘제국의 공작님’이라며 선을 긋는다. 결국 참다못한 클로드가 이리스를 따로 불러내 이야기했다.
‘너에게 나는 뭐지?’
이건 클로드식의 ‘나는 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는 물음이다.
근데 원작 여주에게 해야 할 말을 왜 나한테…….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난 내가 해야 할 대답을 알고 있다. 나는 이리스가 아니니까 그녀처럼 대답하면 안 된다. 그저 ‘제 후견인이요.’ 하고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이 술렁거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클로드는 남주인 카르시안의 아빠이고 이리스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다. 나에겐 그저 조금 특별한 인연을 맺은 ‘후견인’에 그친단 소리다. 하지만 지난 3년간의 추억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흔든다.
내가 아프다고 직접 의사를 데리러 갔던 클로드, 언제 찾아가도 귀찮아하지 않고 맞아 주던 클로드,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들어오면 항상 날 불렀던 클로드, 황도로 시찰을 다녀올 때면 꼭 선물을 사 오던 클로드, 내 능력을 인정하고 장하다며 칭찬해 주던 클로드…….
나에게 클로드는 더 이상 남주의 아버지나 후견인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미래에 목숨을 잃기 때문에 지키고 싶은 은인도 아니었다.
난 몽글몽글 차오른 눈물 너머로 가만히 내가 대답하길 기다리는 클로드를 바라봤다.
“저는…….”
목이 멨다. 생각해 보면 클로드는 몇 번이고 내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있었다.
원작에서 그가 이리스에게 했듯이.
그 순간 깨달았다. 클로드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 클로드가 위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이는 바로 나였다.
클로드에게 원작은 없는 세계인 것이다.
나에게도 마주보고 있는 지금이 현실이듯이.
나는 대비하지 못한 위기에 당황한 게 아니고, 클로드를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현실에서.
난 클로드의 옷깃을 꼭 쥐며 말했다.
“공작님이 꼭…… 아빠 같아요.”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 버렸다. 늘 올곧게 나를 바라보던 클로드의 눈동자가 잠시 동요하듯 흔들렸다. 클로드는 이내 커다랗고 따스한 손으로 내 말랑한 뺨을 감쌌다.
“3년.”
“…….”
“‘같다’는 그 한마디 듣는 데 3년 걸렸으니, 다음 아빠 소리는 6년 뒤인가. 아버님 소리 듣는 게 더 빠르겠는데.”
클로드가 엄지로 슬슬 눈물을 닦아 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조금 비집고 새어 나왔다. 눈물도 함께 말이다. 클로드는 울지 말란 말 대신 연신 내 눈물을 닦아 주기만 했다.
난 클로드의 손을 흠뻑 적신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가 울어서 열이 오른 내 등을 다독여 줬다.
“이런 식으로 계기를 찾을 생각은 없었는데, 날 살리기 위해 아주 귀한 탄환이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쓰라며 신신당부를 받은 탄환을 쓴 주제에 나더러 ‘공작님은 공작님이고, 카르시안의 아버지고’라고 하는데 더 이상 어떻게 참아.”
은근히 탓하는 목소리엔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클로드에게 답싹 기대 버렸다. 아까처럼 긴장하지도, 힘을 주고 버티지도 않고 말이다. 이게 내 대답이란 듯이. 역시 내 뜻을 알아들은 클로드가 부드러운 한숨을 뱉으며 내 등을 다독여 줬다.
클로드는 내게 기쁜 소식을 전해줬다.
“유리드가 수많은 스카웃 제의를 뒤로하고 공작령에 남겠다고 하더군.”
“정말요?”
“그래. 그래서 공작성의 전속 대장장이로 임명했다.”
덕분에 마법 탄환의 우선 판매권도 공작성 소유가 되었다.
“네 공로를 가로챈 것 같아 기분이 별로야.”
“가로채다뇨, 가족의 일인데요.”
내가 슬그머니 말하자 클로드의 입가엔 원하는 대답을 들은 듯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짐시 후, 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휴우…….”
울어서 퉁퉁 부은 뺨에 차가운 물수건을 대고 있자니 문득 클로드의 말이 떠올랐다.
‘‘같다’는 그 한마디 듣는 데 3년 걸렸으니, 다음 아빠 소리는 6년 뒤인가. 아버님 소리 듣는 게 더 빠르겠는데.’
클로드는 분명 ‘아버님’이라고 했다.
“아버님이라니? 무슨 소릴까? 아, ‘아버지’를 잘못 말한 걸까?”
아리송해졌지만 클로드도 말실수를 할 때가 다 있구나, 싶어서 그냥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