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젠장맞을 놈.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그때만 생각하면 울컥하고 분노가 차오른다. 의자에 몸을 기대 뒤로 젖혔던 샤벨은 튕겨지듯 일어나 테이블을 몽땅 쓸어 버렸다.?
와장창, 챙그랑! 시끄럽고 날카로운 소리가 샤벨 뿐인 주점을 한동안 울렸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 샤벨은 테이블을 걷어 찼다.
“한쪽 눈이 아니라 양쪽 눈을 찔렀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부상을 입은 샤벨은 제대로 싸울 수 없었고, 클로드의 왼쪽 눈꺼풀에 상처를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클로드를 더욱 매력적이고 두렵게 보이게 하는 왼눈의 상처는 바로 샤벨이 낸 것이었다.
샤벨은 씩씩거리며 저절로 떠오르는 당시의 일을 상기했다.
‘네 이놈, 클로드으!’
팔이 잘린 샤벨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클로드는 가난한 백작답지 않은 몸놀림으로 가뿐히 샤벨의 검을 피했다. 하지만 샤벨의 검자루에 숨겨진 작은 단검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샤벨은 검자루에 비겁하게 숨겨 둔 작은 단검으로 클로드의 얼굴을 그어 버렸다.?
‘클로드!’
갑판에서 싸우던 헥터가 놀라서 달려왔지만 정작 상처를 입은 클로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보다 더 붉은 피가 흐르는 눈가를 감싸 쥐지도 않은 채, 두 눈을 형형히 뜨고 샤벨에게 말했다.
‘무능력한 네가 선장인 것을 감사히 여겨라.’
샤벨은 대도둑 해적단의 선장이었고, 하이페디움 제국법상 선장이 있어야 해적단을 재판대로 세울 수 있었다. 클로드의 말대로 샤벨이 선장이 아니었다면 그날, 샤벨은 클로드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이후 샤벨은 제국으로 호송되어 재판에 섰고 많은 부하들을 잃었다. 간신히 탈옥하긴 했으나 더 이상 과거의 위용 넘치던 대도둑 해적단은 아니었다.
샤벨은 그날 이후로 클로드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1년 전, 탈옥에 성공한 샤벨은 라움디셀 공작령에 숨어드는 것도 성공했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그러게, 귀족질이나 마저 하지 왜 바다에 나와서 헛물이 들고 그래. 그러니까 도둑질당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실실거리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와, 샤벨은 주정뱅이처럼 킬킬 웃어댔다.?
사실 노점상에서 물건이 도난당하는 사건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샤벨은 노점상에서 물건을 훔쳐 작은 소란이 일어난 틈을 타, 구경꾼들의 지갑을 싹 다 털어 버렸다. 아무리 치안이 좋다 하더라도 소매치기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지에서 소매치기 사건은 도난과는 또 다른 범죄로 분류된다.
‘내 부하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 기특해, 아주.’
그리고 샤벨은 도난 사건을 정리하여 보고하는 관리를 돈으로 매수했다. 덕분에 노점상 일만 좀 시끄럽고, 소매치기 건은 아주 잠잠했다.
소매치기는 아주 쏠쏠했다. 번화가에 있는 이들은 모두 현금이나 현물을 들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건수가 얼마 되지 않아도 돈이 쑥쑥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돈만 있으면…….’
다시 과거의 대도둑 해적단을 만들 수 있다. 아직도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부하들을 보석방시킬 수 있다.
‘그럼 그때야말로 네 두 눈을 몽땅 파내 주마, 클로드.’
그 생각만 하면 즐거워서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술이 물처럼 들어갔다.?
“아, 목말라.”
샤벨은 술을 찾았지만 아까 몽땅 쓸어 버린 탓에 멀쩡한 병이 없었다.
“쯧. 왜 이렇게 안 와?”
아까 점원이 술을 가지러 간 걸 떠올린 샤벨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고 의자에 몸을 던졌다.
“아주 그냥 온실 속의 화초라니까.”
해적들은 배신과 매수가 판을 치기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모든 일을 직접 검수하고, 항상 모두를 의심한다.?
“역시 귀족 나부랭이야. 제 부하가 매수된 줄도 모르잖아.”
하지만 클로드는 달랐다. 한 번 관리직을 임명한 이를 끝까지 믿고 있으니 이 사달이 난 거다. 샤벨은 그렇지 않아도 완벽한 제 계획이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클로드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눌러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멍청이, 멍청이!”
나뒹굴어 다니는 술병을 발로 툭툭 차며 샤벨은 클로드를 한껏 비웃어 줬다. 오늘따라 술맛이 좋아, 클로드를 안주 삼으면 바다만큼이나 많은 양의 술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점원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분 좋게 취해 있는데 취기가 천천히 가시자 짜증이 확 났다.
“에이 씨…….”
결국 참다못한 샤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술을 마시느라 총과 칼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풀어놨기에 빈 몸으로 비틀거리며 점원이 사라졌던 창고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잡아!”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며 경비대원들이 들이닥쳤다.
“뭐, 뭐야!”
샤벨은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졌는데, 경비대원들은 마치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샤벨을 체포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심지어 그들 앞엔 조금 전, 샤벨이 매수했다고 자랑하듯 늘어놓았던 부하가 서 있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클로드의 경비대와 자신의 부하가 한패가 되어 들이닥치자, 샤벨은 술취한 머리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렸다. 샤벨은 다급히 점원이 사라진 창고로 도망치려 했다.
‘저기에 있는 개구멍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샤벨은 이 주점을 자신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당연히 만일을 대비해 도주로도 만들어 뒀다. 하지만 샤벨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흠. 술배가 그렇게 나와서야 개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나 있나 모르겠군.”
창고에서 나타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샤벨은 너무 놀라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크, 클로드……!”
창고에서 등장한 이는 바로 클로드였다. 공작다운 위용이 엿보이는 망토까지 걸쳐 완벽한 정복으로 차려입은 클로드는 샤벨을 보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날 ‘귀족 나부랭이’라고 말할 것 같아서 차려 입고 왔지. 어때, 볼 만한가?”
클로드는 완전히 샤벨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다.?
“너 이 자식!”
격분한 샤벨이 술 때문에 탁해진 갈색 눈을 부라리며 덤벼들었으나 경비대원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거 놔, 놓으라고! 놔!”
샤벨은 계속해서 클로드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여럿이서 달라붙어 포박하는 경비대원을 떨쳐 내긴 역부족이었다. 결국 샤벨은 경비대원에 의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샤벨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치욕스러움으로 더욱 달아올랐다.
“네놈이 어떻게, 여길……!”
“공작님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메리가 뒤로 꺾은 샤벨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윽박질렀다. 그런 메리에게 클로드가 장갑을 벗은 손을 내저었다.
“아, 됐어. 구면이니까.”
클로드는 마치 보란 듯이 샤벨의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건 마치 클로드에 의해 샤벨의 팔이 잘렸던 걸 놀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나, 내게 팔이 잘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한 대도둑 해적단 선장?”
“이익……!”
클로드가 비웃자 샤벨은 이를 악 물었다. 한 경비대원이 의자를 가져왔고, 클로드는 망토를 뒤로 펼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공무원 매수, 공문서 위조, 소매치기, 탈옥, 노점상 절도, 절도범 날조, 영업점 불법 점령, 직원 협박 및 폭행, 주택 불법 개조…….”
샤벨의 죄명을 읊은 클로드가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이거 원, 한 손가락으로는 다 꼽을 수도 없군.”
나긋나긋하게 웃는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헥터같이 클로드와 함께 바다에 있었던 이들은 알고 있다. 클로드가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웃어 줄 땐 오로지 ‘가는 길 배웅해 줄 때 뿐’이란 걸. 그리고 샤벨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클로드가 금화를 꺼내 샤벨의 입에 물려 줬기 때문이다.
“노잣돈.”
“으으읍!”
샤벨이 눈을 부릅뜨고 몸부림쳤다. 완벽하다 생각했던 자신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게 미치도록 치욕스러웠다. 그리고 클로드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내가, 내가 이대로 나 혼자 갈 줄 알고……!’
손이 뒤로 묶여 결박 당한 샤벨이 제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옷의 모든 주머니에 넣어 두고 다니길 잘했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샤벨이 입에 들어온 금화를 까드득 물며 사납게 웃었다.
“내가 외로움이 좀 많아서 말이야.”
오로지 클로드만 노려보는 샤벨의 흰자위에 핏발이 가득 섰다. 클로드가 뭐라 말하려던 때였다.
달칵, 하고 스위치 같은 것이 눌리는 소리가 나더니.?
……후우우웅, 퍼어엉!
클로드를 비롯하여 메리, 많은 경비대원들이 들이닥쳤던 술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화력을 자랑하는 폭발이 말이다.
“세상에!”
“소방대! 소방대를 불러와!”
“불이야!”
“폭발이 났다!”
한적하기만 했던 주택가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외쳤다.
“어떡해! 저 안으로 공작님이 들어가셨는데!”
“뭐라고?!”
사람들은 더욱 경악했다. 클로드가 저 안에 있다니! 동시에 절망했다. 이정도 규모의 폭발에 휘말렸다면 생존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불길이 잡히지 않아 주택가가 몽땅 타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화산이 분출하듯 치솟던 불기둥이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했던 화마는 눈 깜빡할 새에 정리되어, 사람들은 주변의 그을음만으로 불이 났었단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다들 괜찮아요?!”
저 멀리서 여자 아이가 외쳤다. 깨끗한 밀빛 머리칼과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소녀는 다급히 사건 현장으로 달려왔다.
“다친 곳은요?!”
손에 자그마한 총을 하나 들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