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카르시안은 저도 모르게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유리드의 이야기는 정말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그만큼 말도 안 되면서 획기적이란 뜻이다.
내 머리는 더욱 비상하게 돌아갔다. 유리드는 이 연구를 성공해 낼 것이다. 지금 그는 날붙이 무기를 만들지 않고 총에만 매달려 있어 가난하지만, 후장식 총을 발명한 이후 떼부자가 된다. 왜냐하면.
“전 마법 탄환도 연구 중입니다.”
“마법…… 탄환?”
“예. 지금 머스킷에서 사용하는 탄환은 화학 탄환입니다. 무기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갖고 있지만 화학 탄환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마법사들에겐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는 후창식 총기가 연속 발포할 무기까지 함께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 탄환은 제아무리 크고 강력하다 하더라도 목표물을 맞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마법사들은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배리어를 만들어 이 탄환을 막을 수 있다.
“하이페디움 제국은 무척 부국강병한 나라이긴 하나, 주변 타국에 비해서는 마법사의 수가 현저히 적습니다. 소위 ‘전쟁의 승리는 마법사의 수로 결정된다’고들 하지요. 그런 면에서 하이페디움 제국은 조금 불리한 상황입니다.”
“네, 저도 역사를 배워서 알아요. 하이페디움은 마도공학을 발달시켜 마법사들을 대체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내 말에 유리드가 ‘정말 영특하시군!’ 하는 표정으로 감탄했다.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전 최근에야 공부했는데, 역시 공작성의 아가씨께선 다르십니다.”
유리드가 순수히 감탄하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이렇게까지 칭찬받을 일은 아닌데…….”
난 머쓱해서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어깨를 움츠렸다. 유리드를 따라 카르시안과 앤, 메리도 짝짝 박수를 쳐서 더욱 부끄러워졌다.
큼큼, 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이페디움 제국이 마도공학이 발전하면서 마법사의 양성에 손을 놓았죠.”
“네. 맞습니다. 만에 하나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마법사들의 전쟁이 될 텐데, 제아무리 마도공학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결국엔 기술의 한계를 맞닥뜨릴 겁니다.”
“그래서 유리드 아저씨는 마법사의 마법을 꿰뚫을 마법 탄환을 연구한 거군요.”
“예, 맞습니다. 이 탄환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유리드가 진지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전쟁의 판도가 바뀔 겁니다.”
무거운 이야기에 나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힐끔 바라본 카르시안의 표정도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물론 아직은 개발 초기 단계라 성공할지 안 할지도 잘 몰라서 투자도 안 받지만요.”
멋있게 말을 했던 유리드가 바보처럼 순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사람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잠시 긴장감이 흘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난 그를 따라 아하하,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렇지, 원작에서 유리드가 후장식 총포와 마법 탄환 개발에 성공한 건 약 10년 후야. 지금 시점에선 막 작업에 착수한 수준이겠지.
내심 지금 어느 정도 진행이 됐는지 기대하고 있던 터라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난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요, 유리드 아저씨. 저, 좀 다른 이야기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예, 아가씨. 하문하십시오.”
“아까 대장간 안내를 받으면서 듣기로는 지금 의뢰는 일절 받지 않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예, 그렇죠. 총포 연구에만 몰두해도 시간이 모자란 상황이어서요.”
“그럼…… 혹시 연구 자금 같은 건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조금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난 이게 무척 궁금했다.
아까 유리드도 ‘투자도 안 받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지금 대체 무슨 돈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실례인 건 알지만 너무 궁금해서 못 참고 물어본다는 양 말하자, 유리드가 조금 난처한 기색을 비쳤다.
그러면서 카르시안을 힐끔거렸는데, 그의 녹색 눈빛에서 ‘공자님 도와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운이 읽혔다. 그러나 이 부분은 카르시안도 궁금했던 건지 아니면 탐탁찮은 유리드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지, 카르시안은 그의 애절한 도움 요청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결국 커다란 곰 아저씨처럼 혼자 낑낑거리기던 유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금씩 살림을 팔고 있습니다.”
“살림을요?”
“네. 어제 아가씨께서 절 구해 주셨을 때, 제가 아내의 장신구를 들고 있지 않았습니까?”
상인과 실랑이를 하다 기어이 끊어져 버린 그 진주목걸이 말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수치스럽다는 듯 몸을 옹송그리며 대답했다. 다급히 한 마디 더 붙이기도 했다.
“물론 저도 시간제로 남의 가게에서 일도 합니다. 하지만 쇠를 두드리는 손인데다가 덩치가 이렇게 커서 하루 만에 짤리고 말지요.”
그래서 연구가 더더욱 더뎌지고 있다며, 유리드가 쓰게 웃었다. 난 유리드의 말에 잠시 눈을 내리떴다. 미래에 전설의 대장장이가 되는 유리드가 하필이면 돈이 없다고 한다.
어떡하지?
유리드에겐 미안하지만 난 너무 기뻐서 표정이 잘 지어지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최대한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사실 아까부터 어떻게 하면 유리드에게 연을 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장래에 엄청난 거물이 된다는 미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지금 그에게 연을 대어두면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도움이 되리라.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에 쌓이는 돈과 유리드의 총기 개발 투자 지분을 더하면 이리스가 돌아와 떠날 때 내 지갑이 좀 더 든든해지겠지?
그런데 문제는 무슨 수로 그에게 ‘짐’을 짊어지워 놓느냐, 였다.
어제 손목이 잘릴 위기에서 구해 준 일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유리드가 나에게 ‘아가씨 덕분에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소리를 하는 거니까. 대체 어떤 수를 써야 할까 고민을 하던 때에, 유리드가 알아서 해답을 말해 줬다.
난 잠시 생각하듯 시간을 끌다가 말했다.
“유리드 아저씨, 어……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이 조금 불쾌할 수도 있는데요.”
“아닙니다, 제 은인의 말씀인데 제가 어떻게 불쾌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리드가 설령 제게 이루지 못할 허황된 꿈을 꾸는 허풍쟁이라 한다 하더라도 불쾌하지 않을 거라며 학을 뗐다. 이렇게나 구체적인 욕이라니, 저 말을 이미 한번 들어 본 모양이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내가 할 말을 기다리고 있는 유리드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도움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금전적인 쪽으로요.”
“……예?”
“라티아?”
내 말에 놀란 유리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잠자코 있던 카르시안도 나를 불렀다. 난 카르시안과 유리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제게 사유 재산이 좀 있어요. 글라델리스 상단 지분의 일부를 팔아 마련한 돈인데, 이 금액이 적지 않아요.”
“그, 그, 아…….”
유리드는 입만 벙긋거렸다. 내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었으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자신을 돕는지도.
난 그런 유리드에게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연구 성과로 덕을 보고 싶은 나의 시커먼 속이 들키지 않게끔 말이다. 정말 선의에서 말한다는 듯이 조금 뜸을 들여가며 말했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기쁠 것 같은데. 유리드 아저씨 생각은 어때요?”
“투자요…….”
“네. 아저씨가 하고 있는 연구는 정말 대단해요. 만약 아저씨의 말대로 후장식 총포와 마법 탄환이 개발된다면 하이페디움 제국은 더욱 막강해질 거예요. 황제 폐하께서 치하해 주실지도 몰라요.”
“그, 음…….”
유리드도 그걸 기대하고 있기는 한 건지,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난 조금 더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런 엄청난 연구를 하고 있는 아저씨가, 자금이 부족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니 너무 슬퍼요. 하이페디움 제국민으로서, 그리고 공작님의 피후견인으로서요.”
난 슬쩍 유리드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이 라움디셀 제국령이란 걸 언급했다. 연구에 성공하면 냅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술을 팔지 말고 라움디셀 공작가를 한 번 더 생각하라고. 기왕이면 돈을 대준 나를 최우선 협상자로 두면 더 좋고. 그러나 유리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아가씨의 투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연구의 성공 여부가 무척이나 불확실합니다. 이대로 아가씨의 재산을 축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투자처를 구하지 않고 홀로 연구를 하고 있던 거라고, 유리드가 조심히 말했다. 난 유리드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나야 원작을 읽었으니 미래의 그가 대성공을 거둔다는 걸 알지만, 지금 유리드는 가난한 일개 대장장이에 불과하다. 스스로에게 자신감도, 자존감도 낮을 터.
이런 상황에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여 봤자 의심만 살 테지.
난 방법을 바꾸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의 연구 결과에 기대를 하고 있다 응원했으니, 반대로 투자하고 싶은 이유를 대기로 한 것이다.
“저는 사실 제가 갖고 있는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어요. 올바르게 쓰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하지만…… 지금 그 올바른 사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난 유리드가 거절할 생각조차 못 하도록 양손을 깍지 껴 가슴 앞으로 모으고 진한 눈빛을 보냈다. ‘아저씨의 대단한 연구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니, 라티아는 너무 슬퍼요!’ 하듯이. 나의 이 눈빛 공격은 자기 전 쿠키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던 수잔마저 이긴 필살기였다. 하물며 원래도 날 귀여워 하고 있던 유리드는 어떻겠는가.
“……알겠습니다. 투자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속절없이 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