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우리는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카르시안은 여기저기 들르거나 구경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가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않자, 그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오셨습니까!”
대장간 앞에서 유리드가 왔다 갔다 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했다.?
난 카르시안의 손을 놓고 그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유리드 아저씨!”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 유리드는 지저분한 차림새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잿빛 머리카락은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고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도 잘 다듬었다. 무엇보다 진흙과 먼지가 묻은 옷이 아니라 단정한 차림이라 그런지 척 보기에 대장장이라기보다는 공예사나 세공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팔 토시를 고친 유리드가 내 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저 뒤에 계신 분은…….”
“아. 인사하세요. 라움디셀 공자님이세요.”
난 밝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카르시안의 얼굴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아까까지 나와 잡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일까?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이 읽히지 않으니 조금 답답했다.
“아, 아! 공자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대장장이, 유리드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리드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바라보던 손을 움켜쥔 카르시안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제 라티아가 도와줬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 계시는 라티아 아가씨께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 대장간의 견학을 돕게 되었습니다.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죠.”
유리드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난 그런 유리드에게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카르시안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아냐, 라티아. 대단한 일 맞아.”
“응?”
“대장장이에게 손은 생명줄이나 다름 없지. 그걸 지켜 줬으니 넌 유리드에게 생명의 은인이야.”
“예, 맞습니다.”
카르시안은 유리드를 똑바로 보며 말했고, 유리드는 그에 또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무척 고마운 광경이긴 한데, 난 어쩐지 위화감을 느껴졌다. 유리드를 대하는 카르시안의 말투가 딱딱한 탓일까? 왜인지 모르게 카르시안이 유리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시안이 내 손을 잡으며 유리드에게 말했다.
“그러니 라티아에게 은혜를 입어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고 살도록 해.”
“예.”
“평생.”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는 단단했다. 난 좀 당황스러워 카르시안을 올려다봤다.
“아니, 뭐 평생까지야…….”
물론 유리드는 훗날 전설의 대장장이가 될 예정이니 그와 깊은 인연을 맺어 두면 나야 좋지. 그런데 이건 너무 강압적으로 말하는 거 아닌가?
당혹스러울 지경이라 눈만 깜빡이자, 카르시안은 언제 유리드를 보며 냉랭히 말했냐는 듯 날 돌아보며 다정히 웃었다. 그가 맞잡은 손을 다독거리며 내게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라움디셀 공작성의 아가씨인 라티아, 네가 친히 구해 준 거잖아. 생명이나 다름없는 손을.”
아, 난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카르시안은 유리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요컨대 카르시안이 유리드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게 사실이란 말이었다. 조금 의아해졌다.
왜 달가워하지 않는 거지?
묻고 싶었지만 당사자인 유리드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의문을 삼켰다.
카르시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 유리드가 몸을 비켜서며 말했다.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카르시안에게 손이 잡힌 채 유리드를 따라 대장간 안으로 향했다.
조금 후.
“휴우…….”
견학을 마친 우리는 유리드가 마련한 간이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급하게 만든 티가 나는 테이블에선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유리드가 애쓴 기운이 느껴졌다. 이렇게 신경 쓸 줄 모르고 오늘 온다고 했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넉넉히 시간을 줄 걸 그랬다.
그러고 보니 유리드 입장에선 내가 상사 같은 느낌이겠구나.
난 공작성의 아가씨이니 말이다. 유리드 입장에선 ‘하루 만에 상사를 모실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엄청난 미션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조금 미안해진 때, 카르시안이 말했다.
“견학은 어땠어?”
“정말 재밌었어!”
나는 앞에 긴장한 채 앉아 있는 유리드를 의식하며 최대한 밝게 말했다.
“난 대장간을 구경하는 게 처음이거든. 정말 신기했어. 특히 쇠가 녹는 모습이 말이야! 꼭 용암을 보는 것 같았어!”
엄청나게 신난 아이처럼 나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포근하게 풀렸다. 나와 나란히 앉은 카르시안은 잠시 차를 마시느라 내 손을 놓고 있었는데, 대신 아예 내 쪽으로 틀어 앉았다. 때문에 유리드에겐 카르시안의 옆통수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유리드는 카르시안의 이런 행동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정말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린 듯 보였다. 난 그에게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옆에 바짝 붙은 카르시안의 눈가가 조금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유리드의 대장간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상당히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마도학 연구실도 있었는데, 이건 자신의 대장간에만 있는 거라며 유리드가 으스댔다.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그의 대장간을 방문한 이유였다.
난 적당히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그런데 가장 신기했던 건 마도학 연구실이었어요. 마도학이란 건…… 쉽게 말하면 마법학 같은 건가요?”
“음,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다릅니다. 마도학은 마도구를 다루는 학문이거든요.”
마도구는 마법의 힘을 가진 도구를 말한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대장간 일도 좋아했지만 연금술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금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마도학에 흥미가 생기더군요.”
“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마도구를 만들려면 연금술을 알아야 한다고요!”
“맞습니다. 마법만으로는 마도구를 만들 수 없습니다. 마법은 결국 자연의 힘이기 때문에 ‘도구’라는 인위적인 물건에 깃들기가 어렵…… 아, 이것 참. 죄송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신나서 떠드는 경향이 있어서…….”
유리드가 녹색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다가 황급히 말을 정리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좋아하는 일에 대해선 막 신나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걸요.”
환생 전, 원작을 읽던 독자들이 단 덧글에서 유리드를 ‘마도학 오타쿠’라고 불렀다. 오타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에 대해서 묻지도 않은 걸 마구 이야기하는 걸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난 지금 유리드의 오타쿠 같은 모습이 필요했다. 왜냐면 그에게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스가 위기에 빠진 순간 짜잔 하고 등장했던 ‘그것’ 말이다.
내가 유리드를 두둔해 주자 그의 얼굴에 기쁜 감동이 들어찼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며 카르시안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사실 지금 세상에 보급된 화승총 말입니다.”
“화승총…… 아, 머스킷이요?”
“네, 바로 그거요.”
메리가 쓰는 총이다. 난 본 적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제 전장식 구성을 가지고 있어 전장총포라고도 부르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면 탄알과 추진제를 총포구를 통해, 그러니까 화기의 앞쪽을 통해 넣는 방식이란 말이거든요.”
옛날에 쓰던 대포를 생각하면 쉽다. 대포를 쏠 때 총포구에 대포알을 넣고 불을 붙인 다음에 쏘지 않나. 그게 바로 전장식이다.
“그런데 아가씨도 본 적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장전하기가 상당히 불편합니다. 일대일 전투에서는 실용성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전 후장식 구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후장식이요?”
“네. 총포구를 통해 앞으로 장전되는 게 아니고, 반대로 뒤쪽을 통해 장전되는 방식이죠.”
유리드의 말을 들으며 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삼켰다. 유리드가 내 뜻대로 술술 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유리드가 ‘전설의 대장장이’ 또는 ‘헤파이토스’라 불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헤파이토스는 대장장이의 신으로, 다른 신이나 영웅들의 특별한 무기를 만들어 줬다. 유리드가 그랬다. 전장식 총포만 있는 세계에서 홀로 후장식 총포를 발명해 낸 것이다. 게다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 여기까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제 목적은 ‘여분의 탄환을 보관할 수 있는 총’입니다.”
“여분의 탄환을 보관할 수 있는 총이라고요?”
“예. 전 최소 3개 이상의 탄환을 총포신에 삽입하여 ‘연속 발포’를 할 수 있는 총을 만들 겁니다.”
유리드가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연속, 발포라고……?”
여태 심드렁하게 있던 카르시안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총기로 연속 발포를 한다니, 이건 이 세계에선 아직 꿈도 못 꾸는 이야기였다. 머스킷을 사용하는 메리도 급할 땐 여러개의 머스킷을 조립하여 돌려 쓰고 있다. 총포부대가 왜 여러 부대로 순서에 맞춰 발포를 하겠나? 하지만 연속 발포가 가능해진다면 이제 탄환만 여러개 구비해 두면 된다.?
“지금 한 말이 실현된다면 전투의 판도가 바뀔 거야.”
“네. 전 그 판도를 바꾸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개 장전이 되어도 하나만 발포되는 총과 함께 장착할 탄환을 연구하고 있죠. 아가씨께서 궁금해하신 저, 마도학연구실에서 말입니다.”
유리드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