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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73화 (73/186)

73화

다음 날, 난 카르시안과 대문에서 만났다.

늘 편안하게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냈다. 카르시안은 클로드를 닮아 이목구비가 무척 뚜렷하기에 이렇게 이마를 드러내는 머리 모양도 무척 잘 어울렸다.

봄과 잘 어울리는 백색 정장에는 금색 예식 견장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만 걸친 돌먼은 붉은색이었는데, 그게 또 카르시안의 눈과 닮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난 멍하니 장갑을 고쳐 끼고 있는 카르시안을 바라봤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따라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카르시안은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저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와…….”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조그맣게 벌리며 감탄했다.

카르시안…… 진짜 잘생겼다…….

난 좀 더 그의 미모를 감상하고 싶었는데, 무심코 뱉은 감탄사 때문에 주위를 끌고 말았다. 카르시안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날 확인한 카르시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순간 뒤에서 바람이 화악 불어왔고, 그 탓에 메리가 곱게 빗어 준 머리카락이 앞으로 넘어왔다.

“앗…….”

난 발목까지 오는 분홍색 치마 속에 들어간 바람을 빼며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 한 줌을 잡아 귀 뒤로 넘겼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눈을 감았다 떴는데, 카르시안은 여전히 멍하니 굳은 채 나만 보고 있었다. 난 어쩐지 조금 멋쩍어져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오래 기다렸어?”

“아……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고개를 몇 번 저어 정신을 차린 카르시안이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평소처럼 바짝 다가오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렸지만, 결국 들리는 말은 없었다.

“그럼 가 볼까?”

카르시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손을 맞잡고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정문을 향해 걸었다. 일부러 마차를 조금 떨어진 곳에 댔다. 카르시안과 함께 정원을 좀 걷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대문에 바짝 대라고 할 걸 그랬다.

“음…….”

“큼…….”

이상하게도 서로 맞잡은 손이 자꾸만 의식되어 같은 쪽 손과 발이 나가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카르시안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마치 병정 인형처럼 옆구리에 팔을 딱 붙인 채 다리만 걷고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풋…….”

끼긱끼긱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고개를 돌린 카르시안이 물었다.

“왜 웃어?”

“아니, 그렇잖아. 우리 지금 걷는 모습 말이야. 엄청 웃긴 거 알아?”

내가 흘러넘치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카르시안은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잠시 멈춰 섰다.

“난 같은 쪽 손과 발이 나가고, 넌 다리만 움직여. 멀리서 보면 우리 진짜 웃길 거야.”

난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삐걱삐걱 움직이는 인형을 따라 했다. 그 모습에 카르시안의 굳어 있던 입매도 살풋 풀렸다.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우리 뭐 하나 싶겠다.”

“놀림당해도 할 말 없을 것 같아.”

“그러게.”

“난 이렇게 걷고, 넌 이렇게 걷고…….”

내가 다시 한번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 하자, 카르시안이 “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즐겁게 웃자 나도 그를 따라 마음이 들떠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카르시안은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 한복판에 마주 보고 서서 한참이나 웃은 후에야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번엔 아주 자연스러운 걸음이었고 말이다.

* * *

마차를 타고 가며 난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카르시안이 불편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서 아침부터 아버지가…….”

“응? 아침부터?”

“아, 어제 새벽에 잠깐 깼는데 아버지가 연무장에서 방음 마법까지 걸고 경비대원들을 훈련시키기에 무슨 일인가 했거든.”

내게 대답해 준 카르시안은 몇 번이고 “그랬군, 그랬단 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어쩐지 카르시안의 표정에서 잔뜩 싸늘해진 클로드가 엿보였다.

“그래서? 넌 정말 다친 곳은 없고?”

“응. 앤과 메리가 다 해결해 줬어. 그래서 난 멀쩡해. 아, 물론 앤하고 메리도 멀쩡하고.”

“다행이네. 하지만 정말 어제의 일로 앙심을 품은 해적단들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 오늘은 조심하는 것도 좋겠어.”

카르시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문득 그가 허리춤에 찬 검과 총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넌 검술과 사격술 다 배우고 있지?”

“응. 창술도 배워. 검과는 또 다른 방식이거든. 아버지가 무슨 무기든 다루는 방법을 알아 두는 게 좋다고 하기도 했고, 나도 같은 생각이라서. 내년부터는 마법도 배울 거야.”

“우와…….”

난 순수하게 감탄했다. 왜냐면 난 아무것도 못 하기 때문이다. 딱히 배울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럴 틈도 없었다.

“나도 하나쯤 배울까 봐.”

“너? 왜?”

“어제 같은 일도 있고, 또…… 유사시를 대비해서?”

“음…….”

내 말에 카르시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직접 무기를 들 일은 얼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그리고 곧 난…….”

카르시안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조그맣게 들렸다.

“응? 잘 안 들렸어.”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카르시안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말 아니었어. 하나쯤은 배워 두는 것도 좋겠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아버지께 말해 봐. 반대하진 않으실 테니까.”

“응, 알았어.”

내가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카르시안이 반대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가가 또다시 붉어졌다.

카르시안이 하얀 장갑을 낀 손등으로 입가를 누르며 말했다.

“뭐, 나…… 나도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있으니까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고. 따, 딱히 네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 오해는 하지 말고.”

카르시안이 더듬더듬 말하는 소리에 난 화들짝 놀라 얼른 손사래를 쳤다.

“응?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어, 어?”

“혼자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렇지 않아도 카르시안은 이것저것 배우느라 무척 바쁜데, 나까지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지!

“아, 아니. 저기…….”

“으응, 아니야. 나 혼자도 잘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카르시안은 착하게도 몇 번 더 말했지만, 난 그때마다 정말 괜찮다며 계속해서 손사래를 쳤다. 결국 카르시안은 알겠다며 물러났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착잡해 보였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이를 덮는 걸로 보아 착각은 아닌 모양이다.

근데 왜 갑자기 피로해 하는 거지?

난 카르시안이 급격히 지친 이유를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카르시안이 먼저 내리고 내게 손을 내밀어 줬다. 난 카르시안의 손을 잡고 마차의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앤과 메리는 우리의 뒤에서 따라오기로 했다. 카르시안의 ‘실전 경험’을 위해서인데, 카르시안은 이번에 나를 경호,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장간은 이쪽 거리에 있어. 아마 유리드의 대장간도 이쪽에 있을 거야.”

난 올해에 들어서야 번화가에 나오는 걸 허락받았지만, 카르시안은 3년 전부터 번화가를 드나들었다. 그러니 나보다 그가 길을 더 잘 알고 있다. 난 신나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가게 손잡아.”

“응?”

“여기서 놓치면 미아가 돼.”

앤과 메리가 뒤에서 따라오긴 할 테지만 애초에 안 떨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내 말에 카르시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다, 이내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누굴 놓친다고.”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바뀌었다는 듯이 말하는 내용에 난 괜히 오기가 들었다. 난 카르시안을 불퉁하게 올려다보다 다리를 잽싸게 놀려 그를 앞질렀다. 졸지에 나를 따라오는 꼴이 된 카르시안이 “어쭈.” 하고 헛웃음을 치다가 긴 다리로 날 성큼 지나쳤다.

“익…….”

내가 또래에 작은 편인 것도 맞고, 카르시안이 또래에 비해 큰 편인 것도 맞다. 이 본질적인 다리 길이 차이는 내가 아무리 발발거려도 이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기도 싫어서, 난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바쁘게 발을 놀렸다. 뒤에서 앤과 메리가 넘어진다고, 다친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은 척 만 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좀 천천히 가는 게 좋겠어.”

나보다 조금 앞서 걷던 카르시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손을 잡은 채로 넘어지면 더 위험하다고 하잖아.”

“아, 맞아.”

누가 잡아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팔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예전부터 수잔에게 누누이 들은 이야긴데, 순간적으로 까먹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가자. 나란히 말이야.”

카르시안이 골이 난 나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어른스러운 말투에 난 얼굴에 불이 붙고 말았다.

아, 이상해. 난 분명 혼자 있으면 어른스럽단 이야기를 듣는데 왜 카르시안하고만 있으면 어린애처럼 굴게 될까? 정말 10살짜리가 되는 것만 같아.

카르시안은 날 자꾸만 유치하게 만든다. 정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들어, 자꾸만 그에게 기대게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정신을 차리자고 나 스스로를 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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