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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72화 (72/186)

72화

잠시 후, 수갑에서 풀려난 유리드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유리드는 무죄를 인정받았다. 왜냐면 그를 도둑으로 몰았던 상인, 비젠이 진짜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비젠은 ‘대도둑 해적단’의 끄나풀로, 노점상에서 소소하게 도둑질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던 중 소문이 퍼져 꼬리가 잡힐 듯 싶자, 슬슬 가짜 범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유리드가 진짜 보석을 가지고 그의 앞을 가로질러 갔다. 비젠은 해적들이 그렇듯 숱하게 많은 보석을 접해, 그것이 낡았지만 진품이란 걸 알아차렸다고 한다.

“정말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리드는 내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난 그런 유리드에게 최대한 무해한 표정으로 웃어 줬다.

“괜찮아요. 공작성의 아가씨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하지만 유리드는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마음이 무척이나 여리고 또 착한 남자다. 그는 내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 인사했다. 난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며 잠시 타이밍을 살폈다. 그리고는 유리드가 의심하지 못하도록 한참을 머뭇거리다 운을 뗐다.

“저어…… 제가 아저씨께 도움이 됐다면……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도움 그 이상입니다. 은혜입니다, 은혜. 부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발요.”

유리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난 미끼를 콱 물어 버린 유리드를 보며 속으로 킬킬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유리드를 살려야 하니까 나선 건 맞지만 난 원작을 알고 있다. 유리드가 드워프와의 혼혈이고 또 그가 훗날 ‘전설의 대장장이’ 또는 ‘헤파이토스의 현신’이라 불린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그 정보를 이용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난 유리드에게 아주 순진하고 무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러면 아저씨 대장간에 견학 가고 싶어요!”

“제…… 대장간이요?”

“네! 듣자 하니 아저씨는 대장장이라면서요! 저 대장장이 처음 보거든요. 그래서 꼭 견학 가고 싶은데…… 혹시 안 될까요?”

난 혹여나 유리드가 안 된다고 할까 봐 손까지 앞으로 모아 깍지를 끼고 불쌍한 척하며 올려다봤다. 눈썹을 늘어뜨리고 “제발요…….” 하고 말끝을 늘이자, 그는 무척 귀여운 동물을 본 사람처럼 “허엉…….”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그가 큰 결심을 하듯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제 목숨도 살려 주셨는데, 어려울 것 없죠! 하지만 대장간에는 위험한 게 아주 많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가서 좀 정리를 할 테니, 오늘 말고 아가씨께서 편하실 때 들러 주세요.”

“와아, 그게 정말이에요? 신난다!”

난 두 팔도 높게 번쩍 들고 방방 뛰었다. 그 모습에 유리드가 저도 모르게 “귀여워…….” 하고 중얼거렸다가 제 뺨을 찰싹 때렸다.

“생명의 은인께 이 무슨…….”

유리드는 정신 차리자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난 유리드에게 내일 방문하겠다고 말하고 앤, 메리와 함께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곧장 클로드를 찾았는데, 그 사이 앤이 쪼르르 몽땅 일러바치고 있었다.

“하,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제가 손을 보긴 했지만 메리가 눈이 돌아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교육시켜 주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클로드는 그런 앤을 보다가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말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정말로요. 앤이 바로 응징해줬고 또 메리가 아까 옷을 갈아입으며 꼼꼼히 살펴봐 줬어요.”

“그나마 다행이군.”

클로드가 한시름 던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내 분노로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멍청한 놈들. 제가 모시는 주인도 못 알아보다니. 군기가 빠졌군. 헥터를…… 아니, 경비대원들을 모두 집합시켜. 내가 직접 친히 군기를 불어넣어 주도록 하지.”

클로드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나?”

“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버틀러. 난방 좀 돌려. 애가 추워하잖아.”

“아, 아니 저기…….”

난 추워서 몸을 떤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클로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난 이 따사로운 봄날에 푹푹 찌는 여름을 미리 체험해야 했다.

잠시 후, 클로드에게 ‘대도둑 해적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난 메리가 가져다준 시원한 딸기 에이드를 마셨다.

“하아…….”

차가운 게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다. 클로드도 더워서 자켓을 벗고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으면서, 좀처럼 난방 마도구를 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난 대도둑 해적단에 관한 걸 말하며 이제 덥다고 수차례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밖에서 험한 일을 당해서 오한이 드는 모양이지. 자칫하다간 몸살이 나니 좀 더 따듯하게 있어야 해.’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 쪄 죽겠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난 결국 더위를 참아내며 얼음이 든 에이드 잔만 움켜쥐었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클로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대도둑 해적단이라…….”

“오늘 제가 잡아 넘긴 상인도 대도둑 해적단이었어요. 벌써부터 자리 잡아 행동으로 옮겼다니, 어쩌면 다른 쪽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수도 있어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이 영지가 내 것이란 걸 모르는 이들은 없을 텐데. 특히 해적들 중에서는.”

악명 높은 트라이던트 해적을 교화하여 귀화시킨 클로드의 명성은 여러모로 높았다. 난 원작을 읽어 대도둑 해적단이 왜 라움디셀 공작령에 숨어들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알려 주지?

지금 난 클로드에 대해 직접 들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대뜸 ‘이러이러해서 침입한 게 아닐까요?’ 하기엔 너무 의심스럽단 거다.

결국 난 원작에서 이리스가 건넸던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요, 공작님.”

“음?”

“저…… 다른 이야기지만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어요.”

“뭐지?”

“공작님의 왼쪽 눈에 난 상처요. 그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묻자 잠시 놀라 나를 바라보던 클로드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는 무척 즐거운 듯 눈까지 감으며 웃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기만 했다. 웃음을 멈춘 클로드가 매끄러운 미소가 걸린 입매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것 참, 의외군. 아들인 카르시안도 궁금해하지 않는 걸 네가 궁금해하다니.”

능청을 떠는 모습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리스에게 열심히 사과했다.

으으, 이리스 미안해. 네 대사를 뺏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이해해 주길 바라. 여긴 나중에 네가 살 곳이 되니까!

내가 자신에 대해 궁금해한 게 무척이나 기쁜지, 클로드는 연신 웃음만 흘리다가 말했다.

“내 눈에 난 상처는 해적 선장인 샤벨이 낸 거다.”

“해적 선장이요?”

“그래, 그는 대도둑 해적단의…….”

클로드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랬군.”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대도둑 해적단이 왜 공작령에 숨어들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클로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클로드가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내일 오늘 네가 구한 대장장이의 대장간에 견학을 간다고?”

“네! 저 대장간은 한 번도 안 가봐서 궁금했거든요.”

난 굳이 캐묻지 않았다. 클로드가 원작처럼 알아서 ‘다’ 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일도 있고 해적단들이 돌아다닌다 하니 혼자서는 위험해.”

“네?”

되물었지만 클로드는 내게 대답해 주는 대신 시계를 한 번 보고 버틀러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채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가지 않아 카르시안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막 씻은 건지 카르시안의 머리칼 끝이 살짝 젖어 있었다. 카르시안은 클로드의 집무실에 있는 날 보고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클로드가 말했다.

“내일 라티아가 대장간에 간다던데 네가 함께 가도록 해라. 너도 슬슬 실전 경험이 필요할 때니까.”

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앗, 전 괜찮아요! 오늘처럼 앤하고 메리랑 함께 하면 되고 또 카르시안도 공부 예정이…….”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 배려가 무색하게, 카르시안은 마치 기다렸단 듯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제가 꼭.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혹여나 클로드가 말을 물리기라도 할까 봐 쐐기까지 박았다. 고개를 든 카르시안은 뭔가 깜빡한 사람처럼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는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내가 앉아 있던 접객 테이블 위에 화병이 하나 있었는데, 카르시안은 그 화병에서 꽃을 불쑥 뽑아 내게 척 내밀었다.

“으, 응?”

“저와 함께 외출, 해, 주시겠습니까?”

카르시안이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 모습을 본 클로드가 “허.” 하고 짧게 감탄했다. 난 좀 당황스러웠지만 우선은 카르시안이 건넨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네, 네…… 물론이죠.”

일단은 대답하긴 했는데, 하고 보니 뭔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 것 같은 입장이 됐다.

대장간에 견학 가는 것뿐인데…….

하지만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카르시안의 얼굴이 너무 해사해서 별말은 하지 못했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된 거지, 뭐.

난 카르시안이 건넨 꽃다발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꽃내음을 맡았다.

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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