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71화 (71/186)

71화

“아아악! 아아아악!”

손가락이 비틀린 상인이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앤은 그를 봐주지 않았다.

“네 죗값을 생각하면 이 손가락을 확 잘라 버려도 부족해!”

“앤, 그만해.”

“하지만요, 아가씨!”

내가 말리자 앤이 불퉁한 표정으로 반박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상인을 놔줬다.

“허억, 허어억…….”

상인은 이미 조금씩 붓기 시작한 제 손가락을 움켜쥐고 눈물 콧물을 다 빼고 있었다. 앤은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탁탁 털며 내 곁으로 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그러니 진정 좀 하라며 앤을 말리려는 때였다.

“허, 이 아가씨 좀 봐?”

“지금 경비대 앞에서 사람을 폭행한 거야?”

유리드를 포박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경비대원들이 목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앤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너희가 경비대긴 하냐?”

“뭐?”

“아무리 증거가 있기로서니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손목을 자르려고 해? 니네가 그러고도 경비대냐? 경비대냐고!”

앤이 경비대의 어깨를 팍 밀쳤다. 경갑을 입은 남자가 뒤로 비틀거리자 다들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대들은 자신의 동료를 밀친 앤을 적으로 간주했다.

“공무 집행 방해다!”

“저 여자를 잡아!”

그러며 칼까지 빼 들었다. 난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앤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냐, 좋다. 한꺼번에 덤벼. 네놈들의 그 싹 빠진 군기. 오늘 이 몸께서 채워 주마!”

앤은 신나서 경갑으로 무장한 경비대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앤은 맨손으로 달려들어서 경비대의 칼을 빼앗고, 제게 검을 겨누는 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는 그 검을 맞대며 으르렁거렸다.

“이 검은 사람을 지키라고 하사한 거지, 다치게 하라고 하사한 게 아니란 말이야!”

어찌나 우렁찬 목소린지, 그루안 상단에 있던 메리까지 달려왔다. 문제는 경비대원들도 추가로 지원을 왔단 거다.

“아가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 이야기가 좀 길어. 일단 앤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네, 알겠어요.”

메리도 곧바로 가세했다. 열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경비대원들이 앤과 메리를 둥글게 에워쌌다.

메리가 얼른 앤과 등을 맞대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저 멍청한 것들이 우리 아가씨를 못 알아보잖아! 상인인지 상놈인지 하는 놈은 아가씨의 이마도 툭툭 때리고!”

여태 한 대도 맞지 않은 앤이 씩씩거리며 말하는 소리에 순간 어디선가 ‘뚝’ 하고 뭔가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응? 방금 무슨 소리가…….”

난 주변을 둘러봤지만 뭔가 끊어진 건 없는 듯 보였다. 환청인가 싶은 때였다.

“으, 으아! 메리! 진정해!”

철컥, 철컥, 메리가 엄청난 속도로 머스킷을 조립했다. 그리고는 다리를 넓게 벌려 자세를 잡았다. 난 내가 들었던 그 ‘뚝’ 소리가 메리의 이성이 끊기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라티아 아가씨는 내 은인의 은인. 그런데 감히 라티아 아가씨께 실례를 범해……?”

사실 메리는 다른 해적단에서 고용한 암살자로, 클로드를 죽이러 잠입했다. 하지만 클로드에게 역으로 제압당했고, 도리어 도움을 받았다. 클로드가 암살집단에서 그녀를 빼내 준 것이다. 이후 메리는 클로드를 따르겠다고 맹세했고, 내게 배정된 것이었다.

“주인에게 하극상을 벌인 그 죗값, 목숨으로 갚아라.”

평소 나긋나긋하고 사근사근하게 말하던 메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 라티아 아가씨라고 하면……!”

“공작성의 아가씨?!”

경비대원들은 이제야 내 정체를 깨달은 듯했지만, 이미 늦었다. 메리는 한 번 눈이 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수라로 변한다.

앤도 그걸 알기에 얼른 메리의 앞을 가로서며 외쳤다.

“와! 메리! 한 번만 봐주자! 어? 한 번만 봐주자!”

앤은 고요하게 분노하고 있는 메리 앞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며 쩡 얼어붙어 있는 경비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뭐 해! 살고 싶으면 빨리 도망쳐! 꺼지라고!”

“예, 예!”

“감사합니다!”

경비대원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후다닥 도망갔다. 메리의 총구가 끝까지 그들을 쫓았지만, 앤의 방해 때문에 결국 발포는 되지 않았다.

“왜 막아! 저런 놈들을 왜 살려줘!”

늘 상냥하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던 메리가 눈이 돌아버린 채 앤의 멱살을 잡아챘다. 앤은 켁켁거리며 메리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가씨, 앞……!”

아마도 내 앞에서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에 천천히 메리의 남색 눈동자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이성이 돌아온 건지, 안광이 생긴 메리가 앤의 멱살을 놓아줬다. 그리고는 콜록거리는 앤을 뒤로한 채 내게 얼른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고요?”

“응, 난 괜찮아. 그건 그렇고…….”

난 몸을 돌려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상인을 바라봤다.

“히, 히익!”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상인이 얼른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가씨!”

그는 내 앞에서 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 부모님은 글라델리스 전 후작과 후작 부인인데 두 분 다 돌아가셔서요.”

“히익…….”

“지금은 라움디셀 공작님이 절 돌봐주시고 계시는데, 제가 글라델리스 후작가에서 학대받은 건 알고 있죠?”

“예, 예에……. 아, 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이 라움디셀 공작님이란 것도 알 수 있겠네요?”

“그, 그건…….”

“저더러 도둑과 똑같다고, 부모가 교육을 어떻게 시켰으면 도둑질을 하냐고 했죠?”

“아, 아니, 저는, 저는……!”

상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내 말을 들은 메리가 다시 눈이 돌아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하고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이 메리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 말리지 않았더라면, 메리는 벌써 상인의 입에 총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난 상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예, 예?”

“반지 말이에요. 저 대장장이 아저씨의 반지.”

“아, 예! 옙! 여, 여기 있습니다!”

상인은 내게 얼른 유리드에게서 빼앗은 반지를 바쳤다. 난 그 호박 반지를 집어 들어 테두리 안을 확인했다.

“역시.”

조용히 읊조린 나는 얼어붙은 구경꾼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방금 범인으로 몰린 대장장이 아저씨는 절대 도둑이 아니에요. 왜냐면 이 반지는 진짜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이상하지 않나요? 저 남자는 대장장이 아저씨가 도둑이라며, 값비싼 보석 목걸이와 반지를 갖고 있는 게 증거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도둑맞은 상점들은 모두 노점상이에요. 대체 누가 길거리 가판대에서 진짜 보석을 사고판단 말인가요?”

“어…….”

“그, 그러게?”

“잠깐만, 그럼 애초에 유리드는 용의자의 물망에도 오르지 못하는 거 아닌가?”

“근데 왜 비젠은 유리드를 도둑이라고 생각한 거지?”

내 말에 구경꾼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인, 비젠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그, 그니까 저는! 저 진짜 보석도 훔쳤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진짜 보석을 훔치는 사람이 가판대에서 물건 하나 스리슬쩍 하는 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진짜 보석은 더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어요. 그 보석을 훔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판대에서 물건을 훔친다? 말이 안 되잖아요.”

난 비젠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를 척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은 당신이죠?”

“예, 예?”

“당신이 노점상에서 물건을 훔친 범인인 거죠?”

“무, 무, 무슨 소리십니까!”

비젠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이내 앤과 메리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납작 엎드렸다. 난 그에게 한발 다가섰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이 보석이 진짜인 걸 알고 있는지 말해 보세요.”

“예? 그게 무슨…….”

“전 귀족이에요. 진품과 가품을 비교하는 교육을 받았죠. 반지의 테두리에 있는 장인의 서명으로 이것이 진품이란 걸 알 수 있지만, 평민들이 보기엔 아리송하죠. 게다가 사실 이 반지는 너무 낡았어요.”

끊어진 진주 목걸이의 진주들은 오래되어 변색 됐고 윤기를 잃었다. 그리고 이 반지의 호박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흠집이 엄청 나서 싸구려보다 더 싸구려처럼 보였다.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자네같이 안 팔리는 대장장이의 아내가 무슨 수로 이렇게 비싼 장신구를 갖고 있어?’ 하고요.”

“그건……!”

“그렇단 소린 당신은 이 보석 목걸이와 반지가 진짜란 걸 알고 있단 뜻이 돼요.”

“웃…….”

“자, 말해 보세요. 당신은 귀족 교육도 받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알고 있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