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난 아니야! 아니라니까?!”
난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럼 이건 다 뭐야! 네 주머니에서 나온 이 목걸이랑 반지는 뭐냐고!”
몸부림치는 남자를 억지로 꿇어 앉히며 윽박지른 상인이 그의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듯 보이는 장신구를 들먹이며 소리쳤다. 그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내 아내 거다! 왜!”
“하, 아내? 아내 거라고? 아내의 장신구를 왜 들고 다녀?”
“왜 들고 다니긴, 팔려고 들고 나왔지! 이거 안 놔?”
무릎을 꿇은 남자가 몸을 비틀어 제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는 상인을 뿌리쳤다.
이제 보니 남자의 체격은 무척이나 좋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잿빛 머리칼과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은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의 튼튼한 근육과 함께 남성성을 돋보이게 했다. 불에 그을린 듯한 구릿빛 피부와 달리 녹색 눈동자는 무척 선명했다.
남자에 의해 뿌리쳐졌던 상인이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아채며 말했다.
“거짓말도 유분수가 있지, 자네 같이 안 팔리는 대장장이의 아내가 무슨 수로 이렇게 비싼 장신구를 갖고 있어? 흥, 이렇게 물건이나 훔치는 자식이니까 아내가 도망가지!”
난 상인의 말에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지금 저 발언은 선을 좀 넘은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가세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 팔이 뒤로 묶이고 있는 남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뭐라고? 네 놈……!”
격분한 남자는 제게 매달린 장정 세 명을 떨쳐 버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키도 엄청 커서 말 그대로 ‘거구’였다. 게다가 엄청나게 튼튼해 보이는 근육들은 잔뜩 화가 나 우락부락했다. 남자가 상인의 멱살을 낚아 채고 눈을 부라렸다.
“다시 말해 봐.”
“끄윽…… 이거 놔……!”
상인은 숨이 막히는지 남자의 팔뚝을 탁탁 때렸지만 남자의 힘은 풀리지 않을 듯 보였다.
그건 그렇고 난 상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어떠한 인물이 맹렬히 떠올렸다. 그는 바로 원작 속, ‘전설의 대장장이 유리드’였다.
유리드는 드워프의 혼혈로 헤파이토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원작에서 대도둑으로 몰려 손목이 잘릴 뻔한다. 하지만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이리스가 발견하고 그를 도와준다.
“와…….”
난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원작으로 따지면 한참 뒤에나 벌어져야 할 일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격분한 대장장이는 저 상인을 때려눕힐 거야.”
“네?”
곁에 있던 앤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 대답한 때였다.
퍽!
“으윽!”
유리드가 주먹을 휘둘렀다. 평범한 체구의 성인 남자가 종잇장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대장장이는 상인을 때린 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다가 ‘내 아내는 도망간 게 아니야!’ 하고 외칠 거야.”
유리드가 외쳤다.
“내 아내는 도망간 게 아니야!”
난 그 소리를 듣고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대장장이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왜냐면 주변에서 봤을 땐 야반도주를 한 게 맞으니까.”
“그치만 자네의 아내는…….”
“그, 그래. 그 케이크 집에서 일하던 남자와 함께 새벽에 성문을 빠져나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했어.”
역시나 사람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대장장이는 진실을 말할 거야.”
내 말마따나 유리드는 결국 참다못해 주먹을 움켜쥐고 쑥덕거리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그렇지만 내 아내는 도망간 게 아니야, 병에 걸려…… 죽었어!”
“헉…….”
“그런…….”
난 얼어붙은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대장장이는 나자빠진 상인에게 다가가 움켜쥐고 있는 아내의 장신구를 빼앗을 거야. 하지만 상인은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테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리드는 상인에게 다가가 그가 쥐고 있는 목걸이를 잡아챘다.
“이거 놔, 안 놔?”
“못 줘! 네가 훔쳐 간 우리 물건이나 내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아내의 유품이던 목걸이는 끊길 거고.”
마치 내 말이 행동지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황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허억!”
“아, 안 돼!”
챠르르륵, 진주 목걸이가 끊어지며 오래되어 윤기가 사라진 진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 돼, 안 돼!”
유리드는 미친 사람처럼 울며 얼른 진주를 주워 담았다.
내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앤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혹시…… 예언도 하시나요?”
난 실없는 소리를 하는 앤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줬다. 앤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 손길을 받았다.
하지만 사건은 지금부터가 진짜다.
삐이이익―!
“경비대다!”
“여기요! 여기 도둑이 있어요!”
“유리드가 그랬어요!”
유리드와 상인을 에워싼 사람들이 얼른 경비대에게 길을 터 줬다. 사람들의 증언을 들은 경비대는 곧장 유리드를 체포했다.
“이거 놔, 난 아니라고!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
경비대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드를 결박했고, 그 과정에서 간신히 모은 진주가 다시금 흩어졌다.
“안 돼, 진주가……!”
“어허! 가만히 있어! 어차피 저 진주 목걸이도 훔친 것일 거 아냐!”
경비대원들이 다시 유리드를 무릎 꿇렸다. 유리드는 진주를 챙기려고 했지만 손에 수갑이 채워져 진주를 주울 수 없었다.
“도둑은 손목을 잘라야지!”
“그래, 어서 법대로 손목을 잘라!”
그간 도둑에게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얼른 유리드를 처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에 경비대원들이 진정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래도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야기를 듣긴, 무슨 이야기!”
“유리드가 훔쳤다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 가난한 대장장이가 무슨 수로 보석 진주 목걸이와 반지를 갖고 있겠어!”
하지만 상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어서 빨리 손목을 자르라고 성화였다. 그에 유리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유리드는 대장장이다. 손이 잘린다는 건 목숨을 잃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간 피해를 입었던 상인들은 경비대원이 빠져나가지도 못하기 진을 치고 외쳤다.
“어서 손목을 자르라니까?”
“다른 사람들에겐 몇 푼 안 되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큰일이었다고!”
“빨리 잘라!”
결국 경비대원들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 자리에서 곧장 유리드의 손목을 자르기로 했다.
“저들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다 증거가 있기 때문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전에 배가 고프다며 빵을 하나 훔친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뭐 전과범이었네.”
“상부에 보고하지 말고, 그냥 우리 선에서 처리하자고.”
경비대원 중 한 명이 검을 빼 들었다. 난 고개를 숙여 내 발치까지 굴러 들어온 진주를 집어 들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아…….”
“저도요, 아가씨. 아가씨에게 예언 능력이 있었다니…….”
내가 중얼거린 말에 앤이 냉큼 대답했다. 난 앤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진주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내 앞에서 원작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것도 약 10년을 앞당겨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지만,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겠지.
“어, 어? 아가씨!”
“여기에 있어.”
난 앤에게 명령하고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손목이 잘릴 위기에 처한 유리드의 앞에서 말했다.
“저 아저씨는 도둑이 아니에요.”
내 낭랑한 목소리에 경비대원들과 그들을 도와 유리드를 붙들고 있던 상인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난 오늘 평범한 아이처럼 입었고 보석 하나 달지 않았다. 이게 번화가에서 더 안전하고 움직이기 쉬울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 탓이 날 그냥 마을에 사는 아이로 안 걸까?
경비대원이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꼬마야, 이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래. 좋은 꼴은 못 볼 테니까 얼른 부모님께 가거라.”
어서 가 보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완전히 파리 쫓는 모습이었다.
“그치만 정말 아닌걸요. 저 아저씨는 도둑이 아니에요.”
“떽! 어른들 하는 일에 멋대로 끼어들면 못 써!”
“부모님이 대체 누구냐,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시디?”
결국 경비대원들이 짜증을 냈다. 부모님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날 정말 평범하게 보는 듯했다.
아무리 공작성에 주둔하는 이들이 아니라지만 모시는 아가씨의 얼굴도 모르다니, 군기가 다 빠졌네.
난 그들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네.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아저씨의 상관은 누구예요?”
“뭐?”
“뭐, 아니에요. 제가 따로 알아내서 이야기할게요. ‘당신의 부하가 아무리 정황상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진위 여부도 하지 않고 애먼 사람의 손목을 자르려 하더라’, 하고요.”
“허…….”
내 말에 경비대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그의 눈가가 짜증으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난 그런 그를 놀리듯 샐쭉 웃고는 아까 유리드가 쥐어 팼던 상인에게 다가갔다.
“주세요.”
“뭐, 뭐? 뭐를?”
“대장장이 아저씨 아내분의 반지요.”
“그건 왜?”
“왜긴요. 그게 저 대장장이 아저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기 때문이죠.”
“뭐어?”
상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제 주머니에 반지를 쑤셔 넣었다. 난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왜요? 일을 이렇게 키워 놨는데 대장장이 아저씨가 범인이 아니면 창피해지니까요?”
난 다 알고 있다. 상인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내 말에 정곡이 제대로 찔린 상인이 펄쩍 뛰며 외쳤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제게 반지를 주지 않는 거죠?”
“네깟 게 반지를 본다고 유리드 놈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
버럭버럭 화내던 상인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자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하, 알겠다. 짰지? 너랑 유리드가 짰지? 어? 만에 하나 범행이 들켰을 때 나타나서 이렇게 물을 흐리라고 서로 짠 거지?”
상인은 두툼한 손가락으로 내 어깨까지 툭툭 치며 말했다.
“너도 저 도둑과 똑같아. 부모가 자식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켰으면 새파랗게 어린 게 벌써부터 도둑질은……!”
툭, 툭, 상인은 내 어깨에 이어 이마까지 찔렀다. 내가 조금 뒤로 휘청거린 때였다.
“이 새끼가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으아아악!”
내 명령 탓에 잠자코 있던 앤이 상인의 손가락을 비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