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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69화 (69/186)

69화

같은 시각, 카르시안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 라티아는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휴,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야.”

“원래의 시간대로 출발해도 늦지 않았을걸요?”

그런 라티아를 따라 내린 앤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앙증맞은 보닛을 쓴 라티아는 그런 앤을 돌아보며 쯧쯧쯧 혀를 찼다. 손가락까지 까딱까딱하며 ‘뭘 모르시네.’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래 시장의 물건은 선착순이야. 가장 좋은 물건이 제일 먼저 팔리는 법이라고.”

“그건 저도 알지만…… 설마 아가씨, 시장통에서 살 물건이 있어서 이렇게 일찍 온 거였어요?”

“앤, 넌 그것도 모르고 아가씨의 치장을 도운 거니?”

마차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메리가 앤을 타박했다. 앤은 정말 몰랐던 건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메리는 그런 앤을 한심하게 보다가 라티아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는 마차를 타고 움직이느라 주름진 치맛자락을 꼼꼼히 펴 주며 말했다.

“어디부터 살펴보시겠어요?”

라티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중독되었을 황후 폐하의 해독을 돕고, 혹여나 공작님이 중독될 경우를 대비해서 해독 약초를 마련해 둬야겠지?’

원작에서 말하길 그 해독 약초를 판매하는 곳은 오로지 한 곳뿐이었다.

“음…… 그루안 상단이 있는 곳부터!”

“네, 알겠습니다.”

라티아와 메리는 앤을 아주 익숙하게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 어? 아가씨! 같이 가요!”

그런 두 사람 뒤에서 앤이 허겁지겁 뒤따랐다. 라티아는 앤의 억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아, 날씨 좋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봄답게 파랗고 아주 예뻤다. 상업지구의 시끌벅적하게 활기찬 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나저나, 아까 상드리용을 읽고 있던데 몇 번이고 읽은 책 아니에요?”

어느새 바짝 따라붙은 앤이 아는 척을 했다. 라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난 상드리용을 좋아하거든.”

“왜요? 아가씨도 뭐, 신분 상승. 그런 걸 노려요?”

“앤, 제발 말 좀 가려서 해.”

메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만류했지만, 앤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단 눈치였다. 메리가 한숨을 내쉬었고, 라티아는 익숙하게 웃으며 답했다.

“들어 봐. 상드리용 말이야. 정말 강하지 않아? 기도 엄청 세.”

“상드리용이요?”

“응. 다른 사람들은 다 왕자님하고 결혼하고 싶어서 유혹하러 무도회에 가는 건데, 상드리용은 아니잖아. ‘무도회에 가서 춤을 추고 싶어’서 무도회에 가는 거잖아? 실제로 춤추고 미련 없이 시간 됐다며 돌아 나가고. 상드리용은 정말 아름다운 춤 한 번이 추고 싶었던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요? 워낙 아름답기도 하고 운이 좋아 왕자와 춤을 췄을 뿐, 상드리용은 ‘나도 무도회에 가서 왕자와 춤을 추고 그의 마음에 들어서 청혼받고 싶어!’ 하진 않았네요?”

“그 점이 좋아. 또 제아무리 왕자가 가지 말라 매달린다 하더라도 요정과의 약속을 우선시했다는 것도 좋아. 나도 상드리용처럼 내 목적과 선약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설령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권력자라 하더라도 말이야.”

“오…… 그건 아주 배울 만한 부분이네요.”

라티아의 설득에 넘어간 앤이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약초상점이 즐비한 거리로 향했다. 번화가와 가까울수록 유명한 가게였는데, 역시 가장 앞에 있는 가게는 그루안 상단이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라티아를 알아본 상단 직원이 한달음에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라티아는 이런 환대가 기쁘면서도 어색해서 얼떨떨하게 웃었다.

“잠깐 들렀어요. 별일은 없죠? 저번에 준 연고는 잘 썼어요. 카르시안 무릎이 좀 까졌었는데, 잘 듣더라고요. 카르시안도 무척 고마워했고요.”

라티아가 빙긋 웃었다. 앤과 메리는 ‘연고 때문이 아닐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단 직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루안 상단이야 늘 괜찮습니다. 예리엘 만물 상단과 이 영지의 주인인 라움디셀 공작가가 뒤에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누가 해코지를 하겠습니까?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직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티아는 그런 그를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라티아의 차명계좌인 티아나 아메시스트는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글라델리스 후작가가 멸문하여 계약 내용이 조금 수정되었다. 라티아 선에서 라움디셀 공작가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공작가에서 사용하는 모든 약초를 저희 그루안 상단에서 구매해 주시는 덕분에 입지가 아주 견고합니다.”

라티아는 클로드를 찾아가 그루안 상단의 물건이 얼마나 안전하고 믿을만한지 설명했다. 그리고 클로드와 담판을 지어 시판가에서 10% 할인된 금액으로 전속 납품 계약을 맺었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그루안 상단의 물건은 확실하고 배후엔 예리엘 만물 상단이 있으니 앞으로 승승장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더 연을 이어 놓는 게 나중을 위해서 나을 것 같아서다. 더불어 라티아는 그루안 상단을 통해 상업지구의 이야기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노점상인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노점상인들이요?”

“예. 요즘 도둑이 기승을 부리고 있거든요. 아닌 척하면서 다가와서 물건을 하나둘씩 훔친다네요.”

“도둑……?”

라티아가 아리송한 목소리를 냈다. 순간 라티아의 머릿속에 환생 전에 읽었던 원작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공작님이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어. 막 무역에서 돌아와 영지를 하사받았을 때, 자신의 눈에 상처를 냈던 대도둑이 숨어들어 곤혹을 치렀다고.’

원작 여주인 이리스가 클로드의 눈에 난 상처를 보며 어쩌다 다쳤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그때 클로드는 아들인 카르시안도 궁금해하지 않는 걸 며느리가 궁금해한다며 능청을 떨었다.

‘설마 그 도둑인가?’

그러나 라티아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어. 왜냐면 그 대도둑은 카르시안이 성인이 된 후에나 숨어드니까.’

지금 카르시안은 고작 13살이다. 아직 시기적으로 무척 일렀다.

라티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직원이 푸념하듯 말했다.

“경비대들도 꼼짝을 못 해요.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아직도 놈의 인상착의도 모른다더군요.”

“본 사람도 아무도 없고요?”

“네. 정신 차리고 보면 도둑맞아서 뒤늦게 신고하는 게 고작이라더군요. 게다가 소문에는 도둑이 한 명이 아닐 거라더군요.”

“한 명이 아니라니, 패거리라도 있단 말인가요?”

“그도 그럴 게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훔치거든요. 혼자면 어렵지 않을까요?”

직원의 말에 라티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직원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만 원작 속의 ‘대도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대도둑은 한 명이 아니었어. 여러 명이었지. 왜냐면 해적단이니까.’

해적단의 이름이 바로 ‘대도둑’이었다. 물론 클로드가 말한 ‘대도둑’은 그들의 대장, 해적단의 선장을 일컬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꾸준히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면 공작성에도 알려져야 할 텐데, 왜 난 이걸 지금 안 거지?’

라티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걸 전 모르죠? 아니, 저뿐만 아니라 공작님도 모르고 계실 것 같은데…….”

“아아, 아마 보고를 안 했을 겁니다.”

직원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에 라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벌써 몇 번이나 도난 사건이 생긴 건데, 보고를 안 했다고요?”

“네. 왜냐면 피해 금액이 엄청 작거든요. 노점상에서 한두 개 도둑맞아 봤자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물론 노점상인들에겐 큰일이겠죠. 하지만 공작님께 쪼르르 가서 일러바칠 만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경비대도 저들 선에서 알아서 해결하려 하는 것 같더군요.”

직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라티아는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느닷없이 등장한 도둑의 행보가 원작 속의 ‘대도둑’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공작님께 말씀을 드려 보는 게 좋겠어.’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고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었다.

라티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 역시 오늘 나와 보길 잘했네요. 더 자주 들르도록 할게요.”

“오실 때마다 허탕을 치게 해야 하는데, 매번 고민거리를 드려서 죄송하네요.”

직원이 송구하단 듯 고개를 숙였다. 라티아는 괜찮다며 손을 열심히 내저었다.

“저야말로 성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 줘서 고마운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아휴, 그럼요. 상단주님께서도 아가씨께 보탬이 되라며 잘 때도 귀를 열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하셨는걸요.”

“아, 참. 그리고 따로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바람개비 꽃 뿌리’ 좀 구해다 주세요.”

“바람개비 꽃의 뿌리요? 보통 바람개비 꽃만 쓰는데…… 아, 정원에 심으시려고요? 그럼 씨앗을 드릴까요?”

“아뇨. 저는 뿌리까지 있는 모종이 필요해서요.”

“아, 알겠습니다. 실한 놈들로 구해서 공작성으로 보내 놓겠습니다.”

직원이 싹싹하게 웃은 때였다.

“아가씨! 잠깐 밖으로 나와 보세요!”

라티아가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근처를 구경하고 오겠다며 나갔던 앤이 뛰쳐 들어왔다. 라티아의 뒤에서 함께 있던 메리가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무슨 일 수준이 아니야! 아가씨, 얼른요!”

열린 문틈 사이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라티아는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단 생각에 얼른 앤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벼룩시장같이 노점상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마주한 건.

“너지? 요 며칠 사이 물건을 훔쳐 간 도둑 말이야!”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이 도둑놈!”

“아, 글쎄 난 아니라니까!”

조금 전까지 라티아를 생각에 잠기게 했던 대도둑의 체포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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