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68화 (68/186)

68화

“하아아…….”

난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단 원작을 따라가자. 그리고 황후 폐하를 해독시키자. 공작님이 중독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잊지 말고.”

이 둘의 목숨만 구하더라도 아론의 복위는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황후가 건강해져도 결국 정치 자금은 필요할 거야. 만약 필요 없다 하더라도 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라며 공작님을 꼬시면 돼.”

생각을 정리한 나는 여태 조용히 하고 있는 삐로리를 확 돌아봤다. 생각에 한참 빠져 있을 땐 미처 몰랐는데, 뒤늦게 삐로리가 듣고 있단 걸 떠올렸다.

미래를 뻔히 아는 것 같은 말도 그렇고 ‘원작’이라 대놓고 언급한 것도 그렇고, 삐로리가 나를 어떻게 볼지 무척 걱정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삐로리는 고개까지 꾸벅거리며 자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 그래. 아침 댓바람부터 사라져서 늦은 오후에 돌아왔는데 피곤할 법도 하지.”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나름 잘 정리한 필기 밑에 [원작 여주 - 이리스 공주]라는 메모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여주인공이라…….”

남자 주인공의 짝은 오로지 여자 주인공뿐이다. 그게 소설인 이 세상의 섭리이자 법칙이고 절대 불변의 진리다. 나같이 악역 조연이었던 사람은 결코 카르시안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없다. 한참 생각하던 나는 결국 [원작 여주 - 이리스]라는 메모 밑에 한 가지 메모를 추가했다.

[원작 여주인 이리스 공주가 돌아올 때 내 나이는 20. 딱 성인.]

그리고는 그 뒤에 한참 머뭇거리다가 마저 펜을 움직였다.

[떠나자.]

원작 여주인 이리스가 돌아오면, 이제 내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때서 볼썽사납게 쫓겨날 바엔 멋있게 떠나자. 공작님과 카르시안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행복하라고, 그렇게 인사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게끔 깔끔하게.

“아, 카르시안한테 이리스랑 싸우지 않도록 몇 가지 언질해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난 종이를 훑어보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다음 날, 봄 날씨가 완연해진 탓인지 몸을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헥터의 말에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카르시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카르시안은 검술 스승인 헥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욱신거리는 손바닥을 바라보니 물집이 터져 있었다.

“덧나지 않게 치료해 둬라.”

“놔두면 낫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오래 걸릴걸.”

“연고를 구하기 힘든 바다에선 바닷물로 한 번 씻고 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르시안이 다시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헥터는 과거, 카르시안에게 으스대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던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애 앞에선 찬물도 마시지 말라 했는데.’

카르시안은 이제 겨우 13살, 한창 강한 남자에 대해 동경할 만한 나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카르시안은 이제는 기사단이 된 해적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하는 건 몽땅 따라 하고자 했다.

‘공자인 주제에 싸구려 캐러멜이나 먹고 말이야.’

저번에 라티아의 가정교사가 또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카르시안은 혀를 한 번 차더니 기사들의 당 충전을 위해 구비해 둔 캐러멜을 한 움큼 집어갔다.

‘싸구려 캐러멜을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먹다간 이 다 썩는다고 주의를 줘도 듣는 척도 안 해요, 하여튼…….’

사춘기가 온 건지 좀 퉁명스러워진 카르시안을 보던 헥터가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물론 헥터는 카르시안이 퉁명스러워지건, 날카로워지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네 손이 다친 상태면 라티아 아가씨는 네 손을 잡아 주지 않을걸.”

왜냐면 카르시안 다루기에 도가 텄기 때문이다.

물론 헥터가 발견한 방법은 아니고 그가 애를 먹자 클로드가 넌지시 알려 준 요행이었다.

“라티아가…….”

헥터의 말을 들은 카르시안이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카르시안은 어린 고양이가 자신의 발바닥을 내려다보듯 제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짐짓 심각하다.

“너도 그 아가씨 성격을 알잖아. 괜히 들켜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면 잘 치료해 둬.”

“……네. 알겠습니다.”

이것 봐라, 라티아를 들먹이자 언제 ‘해적들은 바닷물로 손 씻고 이겨 내잖아요!’ 했냐는 듯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나.

헥터는 그런 카르시안이 조카처럼 귀여워 킥킥 웃고는 땀으로 젖은 검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처음엔 라티아가 아니면 설령 상대가 클로드라 하더라도 놀라 손을 쳐 내던 놈이 이젠 가만히 손길을 받는다.

‘상처가 꽤 아문 모양이지.’

이건 아주 좋은 증조였다.

헥터가 돌아가고, 카르시안은 연무장 가장자리로 빠져 물을 마셨다. 물병이 기울어지는 각도에 따라 꿀꺽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아…….”

단숨에 물병을 반이나 비워 낸 카르시안은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가쁜 숨을 뱉었다. 그러다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연미복을 갖춰 입은 버틀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련님, 전에 말씀하신 것 방에 가져다 놨습니다.”

“아, 수고했어.”

카르시안의 대답을 들은 버틀러가 빙긋 웃고 그대로 돌아갔다. 카르시안은 목에 걸쳐 둔 수건으로 짙은 눈썹에 걸렸다가 떨어지는 땀을 마저 닦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번화가에 나간다고 그랬지…….”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았음에도 훌륭했다. 잠시 생각하던 카르시안은 수건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샤워를 하고 나온 카르시안이 곧장 집어 든 것은 아까 버틀러가 가져다 뒀다는 것이었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에는 앙증맞은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척 봐도 신경 써서 꾸민 티가 나는 포장이었지만, 카르시안은 거침없이 포장지를 뜯어 버렸다. 내용물을 확인한 카르시안의 눈이 빛났다.

“이걸 주면서 넌지시 어딜 가냐고 묻고, 그리고 나도 마침 번화가에 나갈 일이 있다고 하는 거야.”

계획을 중얼거린 카르시안의 입가에 계략적인 미소가 걸렸다. 카르시안은 상자로 턱께를 툭툭 두드리며 몇 번이고 대사 연습을 하다가 방을 빠져나갔다.

똑똑똑, 노크한 카르시안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라티아, 나야.”

하지만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번화가로 나가기 위해서 슬슬 준비를 할 시간이다.

“설마 자나……?”

그러고 보니 원래대로라면 라티아가 낮잠을 잘 시간이긴 했다. 앤과 메리는 라티아에게 너무 약해서 라티아가 낮잠을 자거나 피곤해하면 때때로 스케줄을 멋대로 취소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앤과 메리는 다음 스케줄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예상한 카르시안은 거실에 선물을 두기만 하자며 문고리를 돌렸다.

“아, 잠깐만. 그런데 이걸 주면 말을 붙일 구실이 없어지는데…….”

카르시안은 제가 챙겨 온 선물을 내려다봤다. 그건 다름 아닌 고급 캐러멜이었다. 지난번, 라티아에게 써니 상점의 싸구려 캐러멜을 준 게 마음에 걸려서 버틀러에게 따로 부탁해 둔 거였다.

“라티아를 따라가려면 이걸 주면서 넌지시 물어봐야 하는데…….”

기껏 몇 번이고 대사를 연습했건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제 욕심을 채우자고 곤히 자고 있을 라티아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기껏 주려고 왔는데 도로 가져가기도 싫고. 결국 카르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잘 보이도록 캐러멜을 놔뒀다.

‘구실은 또 만들면 되지, 뭐.’

사실 구실 같은 것 없어도 라티아는 그를 반기며 함께 가자고 할 테지만, 카르시안은 라티아에게 굳이 뭔가를 주고 싶어 했다. 캐러멜 상자를 내려 둔 카르시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음?”

그의 붉은 눈에 타다 만 종이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라티아의 방엔 난방 마도구가 완벽히 설비되어 있어 벽난로를 피우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이렇게 봄 날씨가 완연한 때에 벽난로를 피운 흔적이 있었다.

“추웠나?”

카르시안은 별생각 없이 벽난로 쪽으로 향했고, 끝자락만 거의 남은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메모지인가?”

대부분 그을리고 타서 종이에 적힌 글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몇 글자는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 ■■■ ■■■ 공주■ ■■■ 때 내 나이는 ■■. ■ 성인.]

카르시안은 메모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 때 내 나이는 성인……?”

이게 무슨 소린가 싶던 그때, 카르시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바로 라티아가 글라델리스 상단의 지분을 팔아 받은 돈으로 가장 먼저 산 책.

“상드리용.”

때는 라티아가 공작령의 번화가에 처음 나들이를 나갔을 때였다. 그때 라티아는 공작성 식구들의 선물을 사며 동화책을 하나 샀다. 그게 바로 상드리용이었다.

귀족 영애가 계모의 구박을 받다가 무도회에서 만난 왕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산다는 동화였다. 당시 라티아가 몇 번이고 같은 책을 읽는 모습을 봤을 땐 ‘저렇게 좋을까.’ 싶고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가벼이 넘길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카르시안은 온몸의 피가 몽땅 빠져나가는 착각을 느꼈다.

귀족 영애가 계모의 구박을 받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나? 그래, 라티아의 입장이다. 그리고 많은 영애들이 무도회, 특히 자신의 데뷔탕트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길 염원한다. 아무리 부모님이 정해 준 정혼자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성인이란 건 즉 결혼할 수 있는 나이…….”

라티아가 왜 그렇게 열심히 상드리용을 읽었는지 알 것 같았다. 카르시안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떨어 트려버렸다.

“라티아가…… 데뷔탕트에서 만난 왕자와 결혼해서 공주가 되고 싶어 한다…….”

공자인 카르시안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