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난 카르시안이 빼 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는 넌 준비 다 했어?”
“무슨 준비?”
메리가 재빨리 다과상을 차려 줬고, 카르시안은 메리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되물었다.
“나보다 네가 더 바쁘잖아.”
카르시안은 한때 후작 영식이었던 길버트에게 귀족 예법을, 헥터와 앤에게 검술과 창술을 배우고 있다. 그 외에 메리에게 사격, 시엘에게 경제학을 배우는 둥 다른 과목에도 성실했다. 얼마 전부터는 클로드와 셀트론을 따라 때때로 수도의 상업지구로 시찰도 나간다고 했다.
“시찰은 나도 아직 못 가 봤는데.”
“넌 아직 어리잖아.”
“나 이제 열 살인데.”
카르시안이 후작저에 왔을 때의 나이라고 덧붙이며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으깬 달걀과 마요네즈, 햄이 섞인 간단한 간식이었다. 한 입 베어 무는 사이, 카르시안이 으스대듯 말했다.
“3년은 상당히 큰 차이거든.”
성인이 된 후라면 모를까, 이 나잇대엔 카르시안의 말대로 3년은 꽤 큰 차이여서 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삐졌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버지나 선생님들은 나보다 네가 더 똑똑하다고 하더라.”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말하는 걸 보니, 달래는 말이 분명했다.
헥터가 말하길, 카르시안은 자존심이 무척 세다고 했다. 사춘기도 와서 좀 더 툴툴거리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가만 보면 내 앞에선 조금도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마 넌 1년만 지나도 시찰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봐라. 자신은 3년이나 걸린 걸, 나는 1년밖에 걸리지 않을 거라며 위로하지 않나. 이러니 내가 어떻게 카르시안을 함부로 질투할 수 있을까.
난 푸스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당장 나가고 싶은 것도 아닌걸.”
안절부절못하던 카르시안이 한시름 던 얼굴로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길버트에게 제대로 배우고 클로드에게 검사를 받아서 그런지, 평소엔 굉장히 예의가 바른데 유독 내 앞에선 좀 흐트러지는 것 같다. 카르시안은 내가 샌드위치를 하나 다 먹을 때까지 턱을 괸 채 차만 마셨다.
흐드러지다 못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아름다웠다. 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한 줌을 잡아 귀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예쁘다…….”
“너도…….”
“응? 뭐라고?”
카르시안이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나를 멍하니 보던 카르시안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까지 새빨개진 게 열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흠, 우리 남주. 조만간 몸보신이라도 좀 시켜 줘야겠다.
카르시안은 내가 샌드위치를 마음껏 먹을 때까지 손도 대지 않다가, 내가 배부르다고 하자 그제야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맛있네.”
카르시안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치? 다른 것도 맛있더라.”
난 그의 쪽으로 샌드위치 접시를 밀어 줬다. 몸을 움직이다 와서 출출했을 텐데 이제야 먹는 게 좀 미련해 보였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게 카르시안 식의 배려니까.
그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걸 먼저, 양껏 먹게 해 준 후 남은 걸 먹었다. 공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궁상맞은 배려였다. 이제 우리는 공작성에서 살고 있고 지난 3년간 아주 부유하게 지냈다.
더 이상 음식을 나눠 먹지 않아도 되고, 누구 한 명이 먹고 남겨 두지 않아도 되는데 카르시안은 좀처럼 이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클로드에게 말해도 “놔둬. 제가 그렇게 하고 싶나 보지.” 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난 후작저에서 내가 아버지에게 받아 온 음식을 먹고 남겨 뒀던 게 생각나서 달갑지 않은데도 말이다.
물론 카르시안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 카르시안은 조금 서운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게 너한텐 창피한 기억이야? 잊고 싶고……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야?’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여기서 더 뭐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아무래도 카르시안에게는 나와 함께 식사를 나눠 먹던 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난 카르시안이랑 같이 오순도순 먹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과 먹을 때처럼…….
난 아까 카르시안이 그랬듯이 차만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 * *
다음 날, 난 아침부터 공작성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삐로리가 사라졌다.
“찾았어?”
“아뇨, 아직이요. 새를 부르는 피리도 소용이 없네요.”
“대체 어디까지 날아간 거람!”
내 말에 메리와 앤이 대답했다.
“아가씨! 혹시 삐로리가 돌아왔나요?”
“일단 정원하고 후원엔 없는 것 같습니다!”
“안뜰에도 없습니다, 아가씨.”
수잔과 길버트, 버틀러도 달려오며 말했다.
대체 삐로리는 어딜 간 걸까?
불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내가 카르시안과 클로드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내 능력이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해서 떠난 걸까? 나 아직 다른 사람들 마음은 읽는데…….
조금 울적해져 고개를 숙였는데, 내가 우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꼭 찾을 거예요! 그 새가 아가씨를 떠나서 어디서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살겠어요? 그리워서라도 돌아올걸요?”
“네, 그럼요. 앤의 말대로 분명 삐로리는 돌아올 거예요.”
“혹시 후작저에 있는 건 아닐까요? 때때로 거기에 다녀오곤 했잖아요.”
“제가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그럼 전 다시 정원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앤과 메리, 수잔과 버틀러에 이어 길버트까지 날 위로하려고 한마디씩 했다. 난 그들의 따듯한 마음에 감동하여 미소를 지어 주며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좀처럼 웃어지지 않았다. 결국 난 일그러진 울상을 모두에게 내보이고 말았다. 날 걱정하던 이들이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같은 시각, 헥터에게 삐로리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클로드가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삐로리가 없어졌다고?”
“어. 그래서 아주 난리가 났더라고.”
헥터가 남 일처럼 이야기하자, 클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공작성엔 없다고?”
“길버트 말로는 그렇다던데. 메리가 새를 부르는 피리를 불어도 안 온대.”
“그 새는 그런 거로 안 와. 오히려 불쾌해하기나 하지.”
삐로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클로드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라티아의 수호천사이니 돌아오기는 하겠지만…….’
동물어 번역기 펜던트가 있는 삐로리가 라티아에게 행방을 알리지 않고 떠났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개인적인…… 그러니까 라티아에겐 말할 수 없는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하더라도, 나한텐 항상 말했는데.’
클로드는 공작성에서 삐로리가 수호천사라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어른이다.
사실 수잔도 알고 있지만, 클로드는 수잔과 라티아가 삐로리의 정체를 모른다고 알고 있었다.
‘이상하군.’
클로드가 다음 서류로 손을 옮기려던 때였다.
“그런데 라티아가 울었다더라. 그 꼬맹이, 내 얼굴을 보고도 안 울었는데.”
헥터의 얼굴은 무척 험상궂고 야성적으로 생겼다. 누군가의 눈엔 그 불량스러움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아이의 눈에는 공포스럽게 보일 게 뻔했다. 헥터도 이를 알고 있어 라티아가 저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라티아는 순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오히려 나를 본 라티아가 경기라도 할까 봐, 카르시안이 좀 겁을 먹었지.’
헥터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라티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를 드러내던 카르시안을 떠올렸다.
“아직도 생각날 정도로 귀여웠다니까. 날 가로막은 카르시안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우와, 진짜 그 헥터예요?’ 하고 무서워하긴커녕 신기해했잖아.”
라티아와의 첫 만남을 상기한 헥터가 클클 웃었다. 그런데 별안간 클로드가 자켓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헥터가 한쪽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어디 가?”
“새 찾으러.”
“뭐? 네가 직접?”
“무슨 문제 있나?”
“문젠 없지만……. 아니다. 문제 있지. 너 곧 제수씨 묘 이장하러 가야 하잖아!”
헥터의 말에 자켓을 챙겨 입던 클로드가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저 팔을 꿰어 넣으며 말했다.
“애가 울었다잖아. 아이샤는 이해해 줄 거야.”
헥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너도 동참해라.”
“뭐?”
“새 찾으라고. 한 명이라도 늘어야 빨리 찾고, 묘 이장에도 늦지 않겠지.”
클로드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헥터를 집무실에 두고 나갔다. 헥터는 감히 대해적이자 공자의 전속 무술 선생인 제게 새를 찾으라 말하는 클로드가 어이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영웅이자 공작인 클로드도 움직이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고 반박하겠나.
“저놈 진짜 어이없네.”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따라가야지.
“야, 같이 가!”
헥터는 일찌감치 1층으로 내려간 클로드를 따라 황급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한편, 공작성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인, 삐로리는 라움디셀 백작 영지에 있었다. 그것도 클로드와 카르시안이 살았던 라움디셀 백작저에 말이다.
‘흠…….’
삐로리는 지붕 끝에 앉아 최소 인원으로 관리되고 있는 저택을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