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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65화 (65/186)

65화

챕터 2. 그러나 시작이 어찌 되었든 인생은 나의 것이다.

“들어오세요.”

내 말에 노크를 한 사람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 무슨 일이야?”

그곳엔 카르시안이 서 있었다.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올 수 있어?”

“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얼굴 보니까 좋아서 그렇지. 요즘 헥터랑 훈련하느라 바쁘잖아. 전엔 바쁘다고 나랑 눈사람도 안 만들어 줬으면서.”

“그건…… 난 이제 그럴 나이가 지났으니까.”

내 말에 삐딱한 표정을 짓던 카르시안이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클로드와 꼭 닮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난 3년간, 카르시안은 말 그대로 폭풍 성장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작가에서 못 먹어서 못 자란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그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또래보다 키가 월등히 컸고, 서서히 젖살이 빠지면서 얼굴에 선이 잡혀 가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13살이건만, 벌써부터 ‘예쁘다’는 말보단 ‘잘생겼다’라는 말이 어울린단 뜻이다.

아니다, 미소년은 미소년이니까 아직은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나?

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후작저에 있을 때에 비해에 부쩍 자란 카르시안을 새삼스레 찬찬히 바라봤다.

적당한 곱슬기가 섞인 검은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려 놓은 듯하면서도 정리되어 있어 항상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피부는 여전히 건강하게 흰빛을 띠어 대리석처럼 단단한 느낌을 줬고, 헥터와 훈련하는 동안 잘 제련된 검처럼 든든한 기운도 띠게 됐다.

꾸준한 운동으로 인한 곧은 자세 덕분에 위풍당당한 느낌이 나서, 후작저에서 천대받아 날 선 아기 고양이 같던 모습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굳이 동물에 비유하자면 성장기 때의 고양잇과 맹수랄까?

카르시안에게서 어린 포식자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주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단 뜻이었다.

“라티아?”

내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카르시안이 내 눈앞에 큰 손을 살살 흔들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가 놓아 줬다.

“무슨 생각해?”

“아, 응. 아무것도 아니야.”

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사실 난 아직도 카르시안을 끝내 마구간 일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카르시안은 훌쩍 커진 손으로 나를 서툴게 위로해 줬다. 그때 갈퀴를 잡느라 생긴 굳은살 덕분에 검을 더 오래 잡을 수 있어, 훈련하기 좋다면서.

난 말을 돌렸다.

“근데 정말 아무 일도 없이 온 거야?”

“뭐…… 굳이 용건을 대자면…….”

큼지막한 손으로 제 뒷목을 연신 주무르던 카르시안이 내게 척척 걸어와 책상 위로 뭔가를 떨어뜨렸다. 딸그락하고 떨어진 건 캐러멜이었다. 난 카르시안이 떨어트린 캐러멜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건…….

“써니 상점 거네?”

“……아.”

카르시안이 문득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써니 상점은 결코 고급품을 취급하는 가게는 아니었다. 카르시안이 가지고 온 이 캐러멜도 서민 아이들이 즐겨 먹는 거다. 그런 캐러멜이 왜 공작성에 있냐면 싼값에 대량으로 판매하기에 해적들이 즐겨 먹기 때문이다. 이제는 공작성의 기사가 되어 봉급도 더 많이 받지만, 그들은 항해 시절 먹었던 써니 상점의 싸구려 캐러멜을 좋아했다.

“이, 이리 줘! 내가 다른 걸로 다시 가져다줄게.”

카르시안이 새빨간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카르시안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혀를 빼꼼 내밀었다.

“싫은데?”

그리고는 캐러멜 포장지를 벗겨 입에 쏙 넣었다. 카르시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캐러멜을 보고 카르시안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난 그에게 후후 웃으며 말했다.

“급하게 온 거지?”

지금 카르시안은 연무복을 입고 있었다. 연무를 하던 중 나의 가정교사가 그만뒀다는 소식을 접한 모양이었다.

1년 전쯤, 난 카르시안에게 지나가는 말로 선생님이 그만둘 때마다 ‘내가 너무 아는 척해서, 기분 나빠서 그만두는 건 아닐까?’ 하고 울적한 기분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카르시안은 그럴 리 없다고 딱 잡아떼며 날 위로해 줬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선생님이 그만둘 때마다 찾아와서 과자나 사탕을 줬었지.

이번에 그만둔 선생님은 내가 카르시안에게도 몇 번이나 너무 좋다고 이야기했던 분이다. 그런 선생님이 그만둔 만큼, 내가 상심이 클 거라고 생각해서 다급히 달려와 준 모양이다.

난 카르시안의 마음 씀씀이가 기뻐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신경 쓰여서 와 준 거야?”

“뭐어…….”

카르시안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어지럽게 흔들렸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따,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정말?”

“그냥, 뭐, 지나가다가 갑자기, 뭐…… 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냥.”

“캐러멜은?”

“내, 내가 먹으려고…….”

“정말?”

“…….”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돌리고 있는 카르시안의 귓가가 좀 붉었다.

요즘 카르시안은 사춘기라도 온 건지, 예전과 달리 좀 툴툴거린다. 뭐, 내가 막 회귀했을 때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서 아직은 귀여운 수준이지만 말이다.

난 카르시안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는데, 그가 고개를 돌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난 지난 3년간 카르시안의 마음을 간파한 적이 손에 꼽았다.

카르시안뿐만 아니라 클로드나 수잔, 앤과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앤과 마리는 한참 친해질 무렵부터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하나둘씩 표정을 읽지 못하게 되어 무척 불안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엘이나 셀트론의 표정은 잘만 읽혔다.

대체 차이가 뭘까? 삐로리가 아직 내 곁에 있는 걸 보면, 이 능력이 회수할 가치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니, 카르시안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내일 시간 낼 수 있어?”

“내일? 아, 응! 당연하지!”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일은 카르시안의 어머니, 아이샤의 묘를 이장하는 날이다. 아이샤는 아직도 라움디셀 백작가 영지에 묻혀 있는데, 드디어 내일 공작성 뒤의 묘지로 이장된다.

사실 더 일찍 해야 했는데, 귀족의 묘는 아무리 남편의 뜻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옮길 수 없다. 해서, 클로드는 3년 전부터 아이샤의 가문과 조율을 해 왔다. 그런데 아이샤의 가문은 이장을 허가한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을 요구했다. 무려 공작성을 5년이나 운영할 만큼 큰돈이었다.

결국 클로드는 아이샤의 관을 옮겨 오기 위해 소송까지 했고, 최근에서야 겨우 승소했다.

카르시안이 넌지시 말했다.

“아버지가 무리하지는 말래. 너 공부하느라 바쁘잖아.”

“무리 아니야. 한 달 전부터 미리 일정을 조정해 왔으니까.”

내 말에 카르시안이 묘하게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럼 나 간다.”

“응? 벌써 가? 바빠? 연무장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나랑 차 마시는 건 어때? 오랜만이잖아. 샌드위치 먹는 것도 좋은데. 밖에 날씨도 엄청 좋더라. 그렇지 않아도 산책 나가려던 참이었어.”

난 신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 카르시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마치 내가 자기를 한 번 붙잡아 주길 바랐다는 것처럼 말이다. 카르시안의 마음을 읽지 못하게 된 지는 한참 됐지만, 어려움은 없었다.

사춘기가 왔어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이렇게 표정에 다 드러나니까.

“뭐…… 잠깐 정도라면.”

카르시안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약속을 무르기라도 할까 봐 얼른 손을 내밀었다. 난 속으로 히히 웃으며 카르시안의 커다란 손을 꼭 잡았다. 내 손은 아직도 또래 10살보다 작아, 카르시안의 세 손가락만 간신히 잡는다. 그걸 내려다본 카르시안이 피식 웃으면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내 손은 언제 다 잡아 줄래?”

이건 카르시안 식의 ‘언제 다 클래?’다. 지도 꼬맹이면서 웃기지도 않다.

“곧 다 잡을 거다, 뭐.”

다른 말을 할 때는 부끄러워서 귀 끝도 붉히면서, 이런 말은 오히려 잘해서 이럴 땐 괜히 내가 투덜거리게 된다.

우린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엊그제 벚꽃이 폈다더니, 정말 봄 날씨가 완연했다. 카르시안은 정원에 마련된 야외 티테이블로 나를 이끌었다. 근처에 분수도 있지만, 카르시안은 그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분수 소리가 시끄럽다나 뭐라나.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도 아니라서, 클로드는 종종 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는데도 말이다.

한 번은 카르시안이 이 자리를 싫어한다고 말했더니, 클로드가 짓궂은 삼촌처럼 웃으며 말했다.

‘어린 게 수작질은.’

비록 클로드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환생 전엔 이십 대 초반의 성인이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단 뜻인데, 클로드가 한 말은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수잔에게 슬쩍 물었더니, 수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카르시안 도련님이 귀가 약하신가 보다, 하고 모른 척해 주세요.’

더더욱 뜻 모를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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