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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64화 (64/186)

64화

라티아는 클로드가 보는 앞에서 수프 한 그릇과 빵 네 조각을 몽땅 먹었다. 다 나았다는 말이 정말인지, 라티아는 과일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클로드는 라티아에게 사과를 깎아 주며 조잘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밥을 먹는 걸 보니 걱정이 좀 덜어지네. 그럼 난 이만 가 볼 테니,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해.”

“아, 공작님. 잠시만요.”

클로드가 직접 깎아 준 사과와 먹기 좋게 잘라 준 딸기를 열심히 주워 먹던 라티아가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폴짝 일어나 화장대 쪽으로 향했다.

“이거요.”

라티아가 클로드에게 불쑥 건넨 건 초라한 보석상자였다.

“음?”

“구한 지는 좀 됐어요. 그런데 언제 드려야 되는지 몰라서……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계속 갖고 있을 순 없어서요.”

라티아가 눈치를 보듯 말했다. 클로드는 대체 뭔데 이러나 싶어서 라티아가 건넨 보석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건.”

그 안엔 클로드가 아주 잘 아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바로 세이렌의 편지를 구매하기 위해 전당포에 맡겼던 아내, 아이샤의 브로치였다.

“이걸 어떻게, 네가…….”

클로드는 아주 잘 관리된 아이샤의 브로치만을 내려보며 말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라티아가 우물쭈물 말했다.

“사실 제가 이걸 구한 건, 그러니까…… 제가 아직 후작저에 있었을 때 사비가 좀 필요해서 수잔이 전당포를 찾았을 때였어요. 저도 마침 브로치를 맡겼는데 그 주인이 아이샤 님의 브로치도 맡았다고 이야기를 하지 뭐예요.”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라티아는 원작을 읽어 카르시안의 어머니인 아이샤의 브로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잔에게 부탁해 일찌감치 구해 놨었다. 하지만 카르시안에게 대뜸 주자니 당시엔 안 친했고, 그 뒤엔 서로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우선 구입은 해 뒀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동안……. 죄송해요.”

라티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클로드는 아이샤의 브로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한 여인이 사갔다’는 말이 유일한 단서인지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런데 아이샤의 브로치를 가져간 이가 바로 라티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클로드는 피식 웃었다. 후작저에 있을 때 이걸 구했단 뜻은, 원래는 카르시안에게 주려 했다는 말이다.

‘사비가 필요해서 전당포에 갔다면서 브로치를 받아왔다, 라.’

자신보다 카르시안을 우선으로 했단 말과 같았다. 카르시안에게 듣기로, 그는 처음 라티아의 친절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 구해 놓고도 줄 타이밍을 잡지 못했던 것이겠지.’

가문의 일도 있으니 라티아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라티아가 일부러 브로치를 감춘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클로드는 아이샤의 브로치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보석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는 라티아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돌려줘서 고맙다. 이건 나에게도, 카르시안에게도 무척 소중한 물건이거든.”

다정한 목소리에 라티아는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졌다.

‘더 일찍 돌려줬어야 했는데…….’

내 코가 석 자라느니, 저 살기 바빴다느니 같은 변명조차 초라해졌다. 결국엔 카르시안을 덜 신경 썼다는 말이 사실이니까. 그런데도 클로드는 라티아를 거둔 데다가 직접 의사도 데려오고, 오늘은 식사를 잘 마치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그리고는 ‘왜 이제서 주느냐’고 화내긴커녕 고맙다며 따스하게 칭찬해 줬다. 고맙고 또 미안했다.

“이제야 드려서 죄송해요…….”

라티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에 클로드는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라티아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으무……?”

볼을 꼬집힌 라티아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클로드가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대체 몇 번이나 사과하는 거냐. 괜찮다.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그간 이 브로치가 네게 있어서 우리와 함께했다고 여기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다행, 이라고요……?”

“그래. 전당포에 쓸쓸히 있던 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팔려간 게 아니니까. 덕분에 좀 더 일찍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클로드가 아이샤의 브로치가 담긴 보석 상자를 매만졌다.

“사과하지 마. 카르시안에게도, 내게도. 이 브로치 일은 내가 카르시안에게 잘 말하마.”

“아, 감…… 감사합니다. 저, 제가 이번엔 이렇게 실수했지만 원래는 안 이래요. 저, 분명 공작님께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라티아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라티아는 제가 이대로 클로드에게 ‘별 도움 안 되는 아이’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다급하게 말했건만, 클로드의 반응은 애매했다.

“왜?”

마치 라티아가 왜 제게 꼭 도움이 되어야만 하냐는 표정이었다. 라티아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내게 도움이 될 순 있겠지. 하지만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아…….”

“넌 어리고, 난 다 큰 어른이야. 도움을 주는 주체가 어느 쪽이 되어야 할 것 같나?”

클로드의 물음에 라티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 클로드가 “주체라는 말을 모르나.”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라티아는 얼른 대답했다.

“공작님이요. 어른이 아이에게 도움을 주니까요.”

“음, 그래. 잘 알고 있는데도 내게 그런 말을 했구나. 아니면 내가 너의 그 작은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어수룩해 보였나?”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절대로요!”

라티아가 주먹을 쥐다 못해 고개까지 붕붕 젓자, 클로드가 비스듬히 웃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줬다.

“그래. 그러니 넌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기만 하면 된다. 아이답게.”

“아이답게…….”

“공부도 잘하면 좋긴 하겠지. 내가 아니고 네 미래에.”

라티아에게 투자를 할 생각이었기에, 은근슬쩍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도움이 되려고는 억지로 하지는 말아라. 네가 도울 사람은 내가 아니고도 많을 테니까.”

“제가 도울 사람이요?”

“그래. 예를 들면…….”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퇴창 밖을 턱짓했다. 라티아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카르시안이 있었다. 그는 안뜰을 사이에 두고 궁금한 눈치로 라티아의 방을 살피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퇴창에 앉아 책을 읽는 척했는데, 그가 쥔 책은 뒤집어져 있었다.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책이 뒤집어진 줄도 모를 만큼 어수룩한 사람이라든가.”

그 말에는 라티아도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푸스스 웃음을 터트린 라티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네. 제가 매번 책을 바로 세워 줄게요.”

“그것참 든든하군.”

말을 마친 클로드는 회중시계를 한 번 확인 했다. 벌써 오전 10시가 다 되어 갔다.

“그럼 이제 난 가 보마.”

“네. 감사합니다, 공작님.”

“사과와 감사 인사를 제외하고 대화하는 법을 배워 두면 내게 도움이 되겠군.”

“꼭 배울게요.”

라티아가 꺄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클로드는 라티아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집무실로 돌아갔다.

클로드는 자리에 앉자마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알버스에게 약점이 잡혔다 암암리 알려졌던 자작가가 몰살당했단 것이다. 요리사가 음식에 독을 풀었다고 한다. 버틀러에게 이 소식을 들은 클로드는 깃펜을 들며 피식 웃었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복어 독이 얼마나 무서운데.”

순간 버틀러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아직 요리사가 사용한 독이 복어 독이란 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공작님께선 어떻게 아시는 거지?’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후작가와 엮여 죽도록 놔두지 않은 라티아 아가씨만 괜찮으면 된다.’

버틀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클로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라티아는 조금 전, 클로드가 나간 후 하녀들과 나와 정원을 산책 중이었다.

“나무에 다람쥐가 있어!”

라티아는 반가워서 아는 척을 했지만 놀란 다람쥐는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삐로리가 눈을 부라리자, 도망갔던 다람쥐는 얼른 개암 열매를 물고 달려왔다.

“찌, 찌!”

그리고는 라티아의 앞에 개암 열매 하나를 톡 내려 두고 삐로리의 눈치를 살폈다. 라티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람쥐가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고, 앤이 안주로 먹으려고 숨겨 뒀던 땅콩을 꺼내 라티아에게 건넸다.

“자. 개암 열매를 준 보답이야.”

땅콩을 본 다람쥐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고 이내 라티아의 어깨 위로 올라와 갖은 애교를 부려 댔다.

버틀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흰 장갑을 목장갑으로 바꿔 꼈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는 길버트에게로 향했다. 버틀러는 해적들과 함께 삽을 들고 있는 길버트를 보며 말했다.

“그럼 처리하도록 하지.”

“예!”

해적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루 속엔 어제 라티아를 습격했던 암살자가 들어 있었다. 그들이 가는 길마다 붉은 물길이 이어졌다.

* * *

3년 후.

“아가씨께 교육을 했던 지난 두 달은 제 교사 인생에 있어 가장 빛났던 시간입니다.”

난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가정교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가씨와 함께했던 시간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오늘 내게 사표를 냈다. 사유는 간단했다.

‘아가씨는 저를 뛰어넘으셨습니다.’

내가 너무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선생님. 저도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어서 기뻤어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가정교사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빙긋 웃어 줬다. 메리가 그녀를 배웅 나갔고, 수잔이 내게로 왔다.

“이번엔 2개월…… 점점 짧아지네요.”

“그러게 말이야.”

내가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앤이 깍지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채 말했다.

“우리 아가씨가 겁나 똑똑한 덕이지, 뭐. 무슨 학문을 가르쳐도 빠르면 3개월, 늦으면 반년 안에 학자 수준이 되어 버리니, 원. 천재의 숙명이라고 생각하세요.”

앤이 익살맞게 말하며 내 기분을 풀어 줬다. 이렇게 난 지난 3년간 총 8명의 선생님을 능가해 버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난 아직 부족하기만 한데…….

내가 한숨을 폭 내쉴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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