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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63화 (63/186)

63화

‘아닌데, 전혀 아닌데.’

제가 어떻게 라티아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라티아의 행동이 납득이 갔다. 라티아가 만약 변하지 않았더라면, 제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더라면.

‘그 재판엔 라티아도 죄인으로 서 있었겠지.’

그녀를 고발한 건 다름 아닌 카르시안이었을 것이다. 라티아의 두려움은 정당했고 또 아름다웠다.

‘그만큼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했다는 거니까.’

그리고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제게 사실을 밝혀 준 것도 너무 고마웠다.

‘어려웠을 텐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걸 이겨 내는 용기는 아주 대단했다. 그래서 카르시안이 라티아에게 배신감을 느끼거나 서운한 시간은 짧았다. 오히려 새삼 라티아를 동경하게 됐다.

“역시 라티아는 대단하구나…….”

자신이었다면 상황이 최악이 치달은 후에나 이야기했을 것이다.

카르시안은 팔을 이마에 올리며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괘씸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라티아가 더 멋있게 느껴졌다. 콩닥, 콩닥, 카르시안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라티아의 곁에서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계속.

* * *

그날, 늦은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각이기에 공작성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순찰을 도는 하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공작성 위로, 샤샤샥. 누군가의 그림자가 발소리를 죽인 채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밤손님은 이렇게 어둠을 틈타 초대받지 못한 방문을 하는 게 무척 익숙한 듯 보였다.

“하암…….”

순찰을 도는 하인이 모퉁이를 지나자, 그는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창문으로 복도의 동태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마법을 이용해서 창문의 걸쇠를 열었고, 아주 은밀히 침입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오늘 열병을 앓았다는 공작성의 아가씨, 라티아의 방이었다. 거실도 아니고 곧장 침실로 침입했기에, 남자의 눈에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라티아가 바로 보였다. 아이들은 자는 모습이 가장 귀엽다지만, 라티아는 정말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는 복면을 고쳐 쓰며 자신을 고용한 의뢰주의 말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장부를 찾기 위해 서재에 들어갔다고 했어. 치부책을 봤을 수도 있어. 그러면 내가 무척 곤란하거든.’

그는 알버스에게 약점이 잡힌 귀족 중 한 명이었다. 혹여나 자신의 약점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라티아를 공격하려고 했다.

‘수도에 있을 땐 워낙 번화가에 자리를 잡았고, 주변에 해적들이 포진해 있어서 어려웠지만 공작성은 한동안 방치되었던 영지에 있어서 주변이 휑해. 게다가 호위를 대신했던 해적들의 절반이 해군에 입대했으니 허점이 있을 거다.’

게다가 목표물인 라티아는 클로드나 카르시안과 방이 붙어 있지도 않아서, 처리하기 쉬울 거라고 했다.

암살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라티아에게 다가갔다. 스릉…….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자 서늘한 소리가 났다.

“으음.”

소음 방지 마법이 걸린 캐노피 안에서 라티아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그에겐 이게 일이다. 암살자가 검을 높게 치켜든 때였다.

“쉿, 움직이지 마.”

“……!”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그의 뒤에 어떤 여인이 암살자의 등에 커틀러스 소드를 대고 있었다.

“누구냐.”

라티아가 깰 것을 염려하는지 낮게 깔린 목소리엔 살기가 가득했다. 암살자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에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엄청난 실력자가 분명하다.’

여인은 검을 다루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작은 소리 하나 없이 칼날 끝으로만 암살자의 등을 천천히 저밀 수 없다.

암살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 하더라도 결국엔 여인 한 명.’

승산은 충분할 듯싶었다. 결심을 내린 암살자는 곧장 팔뚝에 찬 각반에 숨겨 둔 검을 휘둘렀다.

“큿!”

여인은 재빨리 검을 피했지만, 그 바람에 암살자를 놓치고 말았다. 암살자는 달빛 때문에 추적당하기 쉬운 밖이 아닌 어두컴컴한 공작성의 복도를 도주로로 선택했다.

“메리!”

커틀러스 소드를 쥐고 있던 여인 또한 암살자를 따라 복도에 나와 외쳤다. 암살자는 어둠에 숨어 복도를 살폈다. 공작성을 빠져나가는 길목 쪽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 아주 얌전하게 서 있었다.

‘저 메이드가 메리인가 본데.’

아무래도 암살자가 있으니 몸을 숨기란 뜻으로 그녀를 불렀던 모양이다.

‘인질로 삼아 탈출하면 되겠어.’

생각을 마친 암살자는 곧장 메리라 불린 여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머.”

메리는 그를 보고 감탄사를 뱉었지만, 표정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메리는 제게로 달려드는 암살자를 똑똑히 보며 한쪽 다리를 앞으로 뻗고 치마를 확 걷었다.

“……!”

메리의 긴 치마 속에는 조립식 머스킷이 분해된 채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메리가 그 머스킷을 조립하는 건 정말 눈 깜빡할 새였다.

“손님이 오셨군요.”

메리는 곧장 자세를 잡고 암살자에게 머스킷을 겨누었다. 암살자는 당황했지만 이내 지그재그로 달리며 메리를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메리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탕!?

총알이 발사되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암살자의 어깨에 정확히 명중했다. 메리가 암살자가 뛸 방향까지 계산해서 방아쇠를 당긴 탓이었다.

“컥!”

암살자는 어깨가 박살 난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황급히 환부를 움켜쥐었다.

“잘했어, 메리!”

재빨리 달려온 앤은 그런 암살자에게 달려가 그의 멀쩡한 팔까지 우뚝 꺾어 결박했다.

“앤, 손님을 놓치면 어떡하니.”

“아하하, 미안.”

앤이 암살자의 위로 올라타 체중으로 압박하고 있을 무렵, 메리는 반대쪽 다리에서 권총을 꺼내 손가락에서 빙글 돌리고 앤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책임지고 모시도록 해. 난 아가씨를 보러 갈 테니.”

“응, 알았어.”

앤이 권총을 받아들며 씩 웃었고, 메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조신한 모습으로 라티아의 방으로 향했다.

메리가 라티아의 침실 문을 열쯤, 탕. 암살자의 머리가 날아가는 소리가 적막한 공작성을 울렸다. 메리는 소음 방지 마법이 걸린 캐노피 안으로 들어와, 라티아의 허리까지 내려간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줬다. 라티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메리는 그런 라티아가 사랑스러워 빙긋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꿈만 꾸시길.”

라티아는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영영 모를 것이다.

* * *

다음 날, 클로드가 아침 일찍 라티아의 방을 찾았다.

클로드의 손엔 갓 만들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수프가 들려 있었다. 아주 폭신해 보이는 빵과 함께 말이다.

똑똑, 클로드가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드를 맞이한 앤이 문을 열어 줬다.

“어서 오세요, 공작님.”

자리에서 일어난 라티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를 본 클로드의 눈썹 사이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클로드가 눈짓하자 메리가 다시 라티아를 데리고 침대에 앉도록 유도했다.

“다 나아서 괜찮은걸요…….”

라티아는 저를 극진히 모시는 메리의 손길과 중환자 대우를 하는 클로드의 행동에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 속이 간질간질한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라티아가 침대에 앉자, 클로드가 베드 테이블 위에 수프를 올렸다.

“몸은 좀 어때.”

“정말 괜찮아요. 아침이 되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다 나은 모양이에요.”

혹여나 클로드가 걱정할세라, 라티아는 얼른 손을 가로저었다. 그러며 주먹까지 꼭 쥐고 건강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손이 주먹을 쥐자 콩알처럼 작아졌다. 그게 귀여워서, 클로드는 매끄럽게 웃으며 라티아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괜찮다니 다행이군.”

클로드에 의해 볼이 짜부러진 적이 있기에, 그의 손이 얼마나 커다란지 알고 있었지만 머리를 쓰다듬으니 새삼 그 크기가 실감 났다. 그리고 얼마나 따스했는지도.

“헤헤…….”

라티아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어른의 큰 손이 좋아서 눈까지 가느다랗게 뜨며 헤실헤실 웃었다. 후작저를 나와 부쩍 잘 먹은 덕에 더 오동통해진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래도 집에 오자마자 아픈 걸 보니, 정말 이곳을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한편으론 다행이야.”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선 아프지 않았다. 그랬던 라티아가 공작령의 성으로 오자마자 앓아눕다니, 달리 말하면 라티아가 정말로 마음을 놓았단 소리였다.

라티아가 멋쩍은 듯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방이 너무 좋아서…… 아, 성도 너무 아름답고요. 어른이 될 때까지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다니, 너무 기뻤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마음을 확 놓아 버렸나 봐요. 죄송해요.”

“왜 사과를 해.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인데. 앞으로 계속 여기서 살 텐데 마음을 놓는 건 당연한 거지.”

클로드가 자상하게 말했다. 라티아는 그런 클로드가 고마워서 연신 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었다. 라티아는 ‘어른이 될 때까지’라고 말했지만 클로드는 ‘계속’이라고 말했단 것이다. 평소의 라티아였다면 이러한 부분을 곧바로 알아차렸을 테지만, 어제 아프고 오늘 찾아온 클로드의 친절에 말랑말랑해져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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