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호오…….”
클로드가 흥미롭다는 듯 붉은 눈을 빛냈다.
“수호천사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얼마나 특별한지 궁금해지는데.”
[흠, 쉽게 말하면…… 아, 그래. 네가 앞으로 100년을 더 살아도 볼 수 없을 만큼.]
포도를 웬만큼 쪼아먹은 삐로리가 다른 과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탁, 탁, 삐로리가 발로 사과를 두드리며 말했다.
[보통 아이들은 구체적인 재능을 대표적으로 하나 타고 나지. 그게 훗날 천사의 이름이 돼. 난 그렇게 세 개의 재능을 이름으로 엮었지.]
“본명은 뭐지?”
[삐로리. 지금은 라티아가 내게 지어 준 이름이 내 본명이야. 라티아가 내게 재능을 넘겨주면 바뀌겠지만.]
“삐로리.”
클로드가 낮은 목소리로 피식 웃었다.
“그래서. 서론이 너무 긴 거 아닌가?”
[아, 거참. 성질 한번 급하네. 지금 말할 거야. 라티아의 능력은…….]
삐로리는 클로드를 빤히 보며 말했다.
[상업 전체야.]
“……뭐?”
[그게 라티아의 능력이야. 라티아는 상업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타고났어.]
“흠…….”
[상업에 필요한 기술이라면 라티아는 이미 다 갖고 있어. 그게 설령 사람의 표정이나 마음을 읽는 편법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표정을…… 읽는다고?”
[인간들은 독심술이라고 한다지? 뛰어난 상인들은 눈빛만으로도 고객이 원하는 걸 안다, 뭐 그런 말이 있잖아. 그런 거지.]
“꽤 재밌는데. 그래서? 이게 뭐 얼마나 대단하기에 내가 100년을 더 살아도 이보다 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아이를 볼 수 없다는 거지?”
[그건 간단해. 하지만 이건 내가 말할 수 없어. 금기거든.]
삐로리의 말에 클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그러니 넌 그냥 라티아를 보조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라티아는 알아서 잘 크고, 대성할 테니까.]
“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악용을 좀 해야겠군.”
클로드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뭐라고?]
삐로리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확 돌아봤지만,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띤 클로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미래의 대상단주께 지금부터 줄을 대 놔야 하지 않겠어? 절대 실패하지 않는 투자처가 있는데, 멍청하게 놓칠 순 없지.”
큭큭, 클로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에 삐로리는 날개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휴, 난 또 뭐라고…….]
“덕분에 즐거운 이야기를 들었군. 그렇지 않아도 싹도 보이고, 카르시안도 극찬을 해서 한번 가르쳐 볼 생각이었어. 앞으로 재밌어지겠는데.”
[즐거웠으면 이것 좀 싸 주라.]
삐로리가 발로 반질반질한 포도를 문질렀다.
“달라고 하면 새로 줄 텐데. 가져가.”
[응, 그리고 아까 말한 내용은 다 비밀이다. 라티아 귀에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들어가면 안 돼. 알았어?]
“그래. 약조하지.”
클로드가 적당히 당부하라며 손을 내저었고, 삐로리는 클로드가 부른 버틀러의 어깨에 타서 라티아에게로 돌아갔다.
삐로리는 탐스러운 포도알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라티아는 특별해.’
라티아가 갖고 있는 사업가로서의 재능은 결코 ‘이 세계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어찌 된 일인지 내 첫 번째 아이가 꿈을 통해서 본 이세계. 그 이세계의 지식이 라티아의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어.’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기에 삐로리는 꼭 라티아의 능력을 갖고자 했다.
‘저 능력. 이세계를 기억하는 영혼의 능력이 있으면 부당하게 죽은 내 첫 번째 아이의 한을 풀어줄 수 있어.’
그렇기에 삐로리는 라티아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도 어렴풋이, 간신히 아는 것이고, 라티아 본인은 모를 수도 있는 이야기지.’
아무리 클로드가 라티아의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어른이라지만 밝힐 건 아닐 듯싶었다. 해서, 삐로리는 클로드에게 진실을 숨겼지만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저녁, 라티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목말라…….’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낯선 천장도, 캐노피도 아닌 익숙한 카르시안의 얼굴이었다. 잠든 얼굴이라는 게 좀 낯설다면 낯설까.
‘얘,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심지어 카르시안은 라티아와 나란히 누워서 서로 손을 꼭 잡고 자고 있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자느라 조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도, 꼭 감긴 눈꺼풀 밑에 늘어진 속눈썹도, 조금씩 숨을 뱉는 붉은 입술도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게 없었다.
‘역시 남주네, 자는 모습도 진짜 잘생겼잖아.’
라티아는 혹여나 제가 움직이면 카르시안이 깰까 봐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그가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런 라티아의 마음과 달리, 애석하게도 카르시안은 금방 눈을 뜨고 말았다.
“……라티아?”
긴 속눈썹이 나붓거리며 천천히 눈꺼풀이 들리더니, 달빛을 받아 살짝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붉은 눈동자가 라티아를 담았다. 라티아는 카르시안이 눈을 뜨자마자 담은 것이 저라는 것에, 그의 눈동자에 제가 담기는 광경에 숨이 멎는 착각을 느꼈다.
“……몸은. 좀 어때?”
카르시안이 맞잡은 손의 반대 손으로 라티아의 머리칼을 슬쩍 넘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붙여, 이마를 맞대었다. 단순히 열을 재는 행위인데도, 라티아는 놀라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라티아가 꽁 얼어붙자, 카르시안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은 이제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아파?”
“아, ……아니. 이젠, 괜, 괜찮아.”
라티아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펄펄 끓는 열에 들떴다는 걸 대변하기라도 하듯, 라티아의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카르시안은 그게 안쓰러워서 물을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티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에 기대어 앉았다.
“자.”
카르시안이 물을 건넸고, 라티아는 적당히 미지근해서 먹기 편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휴, 살 것 같다.”
라티아의 말에 카르시안이 나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카르시안이 물컵을 들고 있는 라티아를 보며 말했다.
“몸이…… 안 좋으면 어제 말하지 그랬어.”
“어?”
“난……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카르시안은 미처 말을 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티아는 가만히 카르시안을 기다려 줬다.
“죽는 줄 알았어…….”
“……응?”
“전에 네가 그랬잖아. 죽을, ……죽을 때가 됐다고.”
카르시안은 어느새 울먹거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라티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카, 카르시안. 너, 너 울……!”
“이씨, 보지 마.”
카르시안이 황급히 몸을 절반 정도 돌렸다. 하지만 잠깐 보인 눈가는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라티아는 당황스러웠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카르시안에게 죽을 때가 되어서 바뀐 거라고 했었지. 참!’
그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카르시안은 여전히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내 밥을 그렇게 챙겨 줬던 건가……?’
이제야 매번 밥 타령 하던 게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해야 할 것도.
‘하, 근데 이걸 어떻게 말하지?’
전에야 제 코가 석 자이기에 일단 동정심부터 얻고 보자고 생각했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 너무 미안했다.
‘그동안 날 엄청 신경 써 줬는데…….’
하지만 언제까지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라티아는 도망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자고 다짐했다.
“열이 내려서 다행이야. 이제 내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네 병을 고쳐 줄게. 우선 무서운 얼굴을 불쑥불쑥 들이미는 헥터부터 주의를 줘야겠어. 놀라서 더 심장에 무리가 가는 걸 수도 있으니까.”
카르시안이 다짐하듯 말했다. 그 내용을 듣고 있자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라티아는 곧장 카르시안을 부르고 말했다.
“미안해.”
“응? 뭐가?”
“그러니까, 있잖아. 나 사실…….”
사실을 말하려니 자꾸 도망가고 싶고 그냥 이대로 좀 더 거짓말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티아는 주먹을 꽉 쥐고 외치듯 말했다.
“나, 나 안 아파! 죽을 때 됐다는 거, 그거…… 그거 거짓말이었어!”
* * *
방으로 돌아온 카르시안은 침실의 소파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 라티아의 말이 메아리쳤다.
‘나, 나 안 아파! 죽을 때 됐다는 거, 그거…… 그거 거짓말이었어!’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땐 라티아가 저를 안심시키려고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장 라티아의 하녀인 메리와 앤을 불러 확인해 보니, 오늘 그가 자는 사이 검진한 라티아는 정말 멀쩡했다고 한다.
심지어 성수로 확인도 해서, 클로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듣는 동안 라티아는 내내 카르시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프지 않다 고백한 건 사실이었다.
메리와 앤이 물러간 후, 라티아가 말했다.
‘미안해. 난…… 그렇게 해서라도 네가 날 불쌍하게 여기길 바랐어. 왜냐면 난 네 아버지가 정말 돌아올 걸 알고 있었거든.’
‘어떻게?’
‘……가, 감으로?’
‘그래, 감.’
‘으, 응. 그래서 공작님이 돌아왔을 때, 난…… 살고 싶어서 그래서 너한테 죽을 때가 되어서 변한 거라고 거짓말을 한 거야. 그럼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너에게 진심으로 반성한 것도 사실이야!’
라티아가 다급히 덧붙였다. 물론 그거라면 카르시안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여태 숨기고 있었단 건 좀 충격적이었다. 그 이유가 자신이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 살려 주길 바라서 그런 거였다니.
‘그건 마치 그간 내가 라티아를 죽, 죽…… 이는 입장이었단 거잖아.’
라티아가 그간 절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게 무척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