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60화 (60/186)

60화

“혼자 있어서 화가 났나 봐요.”

“응, 그런 것 같아. 그러게, 나랑 있지 그랬어.”

수잔의 말에 난 장난스럽게 웃으며 삐로리의 이마를 긁어 줬다. 삐로리의 새장은 내 침실에 있다고 했다.

난 삐로리를 어깨에 얹고 방을 둘러봤다. 내 방은 정말 엄청나게 넓었다. 응접실 겸 공부방인 거실은 수잔이 뛰어도 10초는 족히 걸릴 것처럼 보였다.

한쪽 벽면엔 책장이 천장까지 맞닿아 있었고, 책상은 성인이 써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폭신했고, 거실의 중앙에 있는 소파는 은은한 연둣빛이 도는 흰색으로 사랑스러웠다. 테라스에는 테이블도 있어 휴식을 즐기기 아주 좋아 보였다.

“침실은 저쪽, 드레스룸은 침실에 있고, 이쪽은 욕실이에요.”

난 내 방을 탐방하는 기분으로 수잔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방보다 넓어 보여…….”

난 몸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훨씬 넓을 거예요. 저택과 성은 규모 자체가 다르니까요.”

수잔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침대에 설치된 캐노피 뒤로 신을 둘러싼 천사들이 노니는 천장화가 보였다.

와, 세계유산이라고 해도 되겠다.

난 멍하니 그걸 올려다보다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여기가 내 방이구나…….”

앞으로 난 여기서 생활을 할 것이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내가 여기의 주인인 것이다. 그게 믿기지 않아 나는 발까지 동동거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너무 좋아!”

난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굴렀고, 수잔은 그런 날 보며 후후 웃었다.

“퇴창도 있어요.”

“정말?”

후작저의 내 방엔 없던 거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퇴창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성의 안뜰이 내려다보였다. 새하얗고 동그란 대리석 분수대에 새들이 모여 지저귀고 있었다.

“아, 평화롭다…….”

“정말 아름다운 성이죠?”

“응, 너무 좋아.”

난 한참이나 내 방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나를 맡을 수족 하녀를 소개받았다. 총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메이드 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전 메리 리드라고 해요.”

메이드 복을 입은 메리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잡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녀는 짙은 남색 머리칼을 아주 단정하게 묶어 보기가 좋았다.

이번엔 바지를 입은 쪽이 내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뵈어요, 아가씨. 전 앤 이보니예요.”

자신을 앤이라 소개한 이는 내게 허리만 꾸벅 숙여 보였다. 주황빛이 도는 붉은 머리칼이 무척 화려했다.

“아, 응. 반가워. 라티아야. 앞으로 잘 부탁해.”

난 퇴창에서 일어나 메리와 앤에게 방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 앤은 바지를 입고 있는 걸까?

또 메리는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데에 비해, 앤은 짧은 머리였다. 키도 커서 아주 예쁘장한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앤은 일반 하녀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미지다.

내가 궁금증을 품을 때쯤, 앤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전 아가씨의 호위도 맡고 있어요.”

“호위?”

“네.”

앤이 슬쩍 몸을 돌려, 허리춤에 찬 커틀러스 소드를 보여 줬다. 커틀러스 소드는 기사가 아닌 해적들이 자주 쓰는 검의 종류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말했다.

“전 트라이던트 해적 단원이거든요.”

“와아……!”

난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드 님, 아니. 공작님이 저를 아가씨의 호위 겸 하녀로 보내셨어요. 이래 보여도 전 선장님한테도 인정받은 실력자거든요.”

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빈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사실은 여기에 있는 메리도 해적이에요.”

앤이 메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메리가 날 보며 빙긋 웃었다.

“해적이었다고 해서 너무 겁먹지는 마요. 이제는 아니니까요.”

“부족한 게 많겠지만 빠르게 공부하고 정진하여, 열심히 모실게요.”

앤은 좀 쾌활하고 밝은 성격인데, 메리는 참 얌전하고 차분했다. 난 메리와 앤을 번갈아 보다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이 해적인 것, 어느 정도 무력을 갖췄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클로드가 붙인 이들이니 실력이 확실할 거고, 수잔이 지난 2주간 겪어 봤을 테니 안전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호위 기사가 붙으면 불편할 것 같았는데 잘됐네.”

“그렇죠? 같은 여자가 더 편하겠죠? 어린데 뭘 좀 아시네.”

“앤, 아가씨께 무슨 말버릇이야? 옷도 안 갈아입고.”

내 말에 앤이 히죽거리며 대답했고, 메리가 그녀를 타박했다.

“내가 뭘. 그리고 공작님이 바지 입어도 된댔거든.”

“앞으로 우리가 모실 분이셔.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인데 예의를 갖춰.”

메리가 눈을 흘기자, 앤이 입술을 비죽이다 내게 슬쩍 사과했다. 난 두 사람이 더욱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자, 그럼 바로 아가씨의 목욕 시중을 돕도록 해라.”

수잔은 거리낌 없이 두 사람을 부렸다. 난 수잔의 감독하에 두 사람에게 목욕 시중을 받으며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아, 좋다…….”

처음 써보는 거품 입욕제에서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났다. 메리와 앤은 수잔에게 제대로 배웠는지, 꼭 수잔이 씻겨 주는 것 같아 무척 편안했다. 사생아가 아니고 정말로 아가씨가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난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수잔이 틀어 둔 음악을 감상했다. 공작성에서의 생활이 더욱 기대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난 열병이 났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난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말을 하며 눈을 흐리게 떴다. 하지만 열이 펄펄 끓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눈을 감자 수잔이 메리와 앤에게 어서 물수건을 가져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의사는 아직이라니?”

“방금 공작님께서 직접 말을 몰고 성을 나가셨다고 합니다!”

앤이 물이 든 대야를 들고 오는지 찰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잔이 얼른 내 이마의 물수건을 갈며 말했다.

“길버트는? 수의사니까 무슨 약이라도 있지 않을까?”

“어제 저희 해적 단원들하고 술 마시느라 짐을 이제 풀고 있대요.”

메리가 송구하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키득 웃었다.

길버트는 후작저에서나 여기에서나 한결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열이 펄펄 나서 바짝 마른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물을 좀 드릴까요?”

“응…….”

수잔이 얼른 젖은 천으로 내 입술을 닦아 줬다. 난 입술을 적시는 물을 핥으며 다시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누군가가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열 때문에 청력도 약해진 건지, 소리들이 뭉뚱그려 들렸다.

“공자님!”

“공자님!”

메리와 앤과 누굴 부른 것 같긴 한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다.

아, 클로드인가? 클로드가 벌써 돌아온 걸까? 그런데 카르시안은? 카르시안은 내가 안 궁금한가?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바로 귀족 수업을 받는다고 했지. 공부 때문에 바빠서 못 오는 걸까?

마음으로 이해하면서도 내심 서운했다.

그래도 나 아픈데.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꽉 움켜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보다 아주 조금 큰 손. 살짝 투박한 굳은살이 박인 아이의 손.

“헤…….”

난 그 손을 꼭 마주 잡고 손의 주인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다.

* * *

“애는 좀 어때.”

“아직 눈을 뜨지 못하십니다. 열은 계속 오르고요.”

“길버튼지 뭔지 하는 건.”

“하필이면 해열에 효과가 좋은 약초가 없어서 조금 전에 글라델리스 후작저로 향했습니다.”

돌아온 클로드가 성급하게 걸으며 버틀러에게 상황을 들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칼이 엉망이었지만, 그마저도 야성적이었다.

버틀러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의 곁을 따라 걸었다. 그러며 클로드가 거의 납치하듯 데려온 의사들을 힐끔거렸다. 공작령은 물론이고 주변 영지의 의사들을 싹 다 데리고 온 건지, 열댓 명이 넘어 보였다. 그 중엔 실내복 차림의 의사도 있었다. 야간 당직을 서고 막 잠이 든 참에 끌려온 모양이었다.

클로드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라티아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클로드는 의사들을 일렬로 세우고 말했다.

“지금부터 한 놈씩 안으로 들어간다.”

클로드가 팔짱을 끼고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의사들이 바짝 긴장하여 제각기 대답했다. 클로드가 방문을 턱짓했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의사가 문을 열었다.

이때였다.

탁.

“……?”

의사가 문을 열기 무섭게 다시 닫힌 문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변명할 생각이었지만, 클로드의 분위기가 너무도 냉랭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사가 다시 힘주어 문을 열었지만.

탁.

이번에도 다시 닫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자 클로드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닫힌 문을 쳐다봤다.

“나와 봐.”

클로드가 손짓하자 의사가 얼른 뒤로 물러났고, 클로드가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이 역시나 바로 닫히고, 그 뒤로는 누가 막고 있는 듯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하.”

순간 클로드의 얼굴에 차분한 노기가 어렸다. 라티아의 열이 펄펄 끓어 한시가 급한 때에, 대체 누가 이딴 장난을 친단 말인가?

“재밌네.”

읊조린 클로드는 곧장 문을 발로 뻥 차 버렸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꿈쩍 않던 문의 경첩이 아주 박살이 났다. 그리고 안에서는 삐륵! 하고 새 소리가 났다.

‘……새?’

클로드는 부서진 문을 잘근잘근 밟으며 넘어갔고, 이 소란에 침실에 있던 메리가 거실로 나왔다.

“환자가 있는데 대체 이 무슨 소란…….”

메리는 문을 부순 클로드와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의사의 무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클로드의 주변을 바쁘게 날아다니며 씩씩거리는 삐로리를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이 새가 문을 막은 것 같은데…….’

클로드가 날쌔게 날아다니는 삐로리를 한 손으로 콱 움켜잡으며 말했다.

“주인이 아픈데 문을 막은 염치 없는 새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깃털을 죄다 뽑고 통으로 구울까, 목을 잘라 튀길까, 그도 아니면 그냥 갈아서 새고기 죽을 만들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