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물론 빈손으로 돌려보내 준 건 아니었다.
‘글라델리스 상단 운영을 무척 잘 도왔다 하더군. 현재는 라움디셀 공작이 후견인이 되어 줬다고 들었다. 하지만 네 수중에 돈 한 푼 없으면 불안하겠지.’
내가 선황후의 약점을 모르는 게 무척 기분 좋은지, 글라델리스 상단의 30% 지분까지 돌려주며 말이다. 글라델리스 상단은 꽤 규모가 있기에 이 30% 지분만 하더라도 적지 않았다.
난 감사하다며 배꼽 인사를 하고 딸랑딸랑 다시 카르시안의 곁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카르시안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클로드는 아니었나 보다. 카르시안이 내게 자리를 비웠었냐는 시선을 보냈고, 나는 어색하게 아하하 웃었다.
클로드가 시선으로 내게 종용했고, 난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내 이야기를 들은 클로드와 카르시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안전하다 판단이 되어도 어른들에겐 알리고 갔어야지.”
클로드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고.
“혼자 갔다니, 너무 무모해. 사칭범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카르시안이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지금 나를 데리고 갔던 그 남자가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데.
“말 없이 움직여서 죄송해요.”
난 클로드와 카르시안에게 사과했고, 두 사람은 내게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단 약속을 단단히 받아냈다.
“치부책은…… 흠, 그러게. 읽어 두게 할 걸 그랬군.”
“아버지!”
클로드가 장난스럽게 한 말에 카르시안이 놀랐다.
“그거 위험한 거잖아요. 그럼 라티아도 위험에 빠진다고요.”
“어차피 내가 있는데.”
카르시안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하자, 클로드가 짓궂게 웃었다. 자상이 난 눈가를 찡그리며 웃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카르시안, 정보는 돈이 되고 때로는 무기가 된다.”
“…….”
“라티아는 아직 너무 어려. 너처럼 검술의 기초를 배우지도 못했고, 마법사가 될 만한 재목인지 아닌지도 모르지. 그저 평범한 아이란 거야.”
물론 난 평범하지 않았지만, 날 평범한 아이로 대해 주는 말이 좋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런 라티아에게도 제 한 몸 지킬 무기는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건 양날의 검이에요. 남도 해치지만 그것 때문에 라티아도 다칠 수 있다고요.”
“원래 모든 무기는 쌍방에게 위험한 법이지.”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난 솔직히 속으로 좀 놀랐다. 클로드가 생각하는 방식과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비슷했다.
흠……. 나중에 클로드에게만 가서 몰래 속닥속닥 알려 줄까? 사실은 약점을 읽었노라고?
그래도 별로 혼날 것 같지가 않다. 난 나중에 기회를 한번 노려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며 한 마디도 져 주지 않는 클로드를 노려보는 카르시안과 아들을 여유롭게 놀리는 클로드를 번갈아 봤다.
“아, 참.”
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마저 이야기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제가 가진 글라델리스 상단의 지분은 어떻게 할까요?”
내 보호자는 클로드다. 그러니 내가 가진 재산의 소유권은 클로드에게도 있었다. 난 그런 이유에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클로드의 표정은 다시 미묘해졌다. 여전히 생각은 안 읽힌다.
그가 말했다.
“나한테 묻는 거냐?”
“……네?”
“네 돈을 어떻게 할 거냐고?”
“네?”
“조언을 구하는 거라면 도와주겠다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네?”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아니, 난 당연히 클로드가 내가 가진 글라델리스 상단 지분에 간섭을 할 줄 알았다. 왜냐면 이건 적은 돈이 아니니까. 물론 클로드가 제국의 영웅이고, 공작이고, 이제 더 이상 가난하지 않지만 이 30%라는 지분은 고작 7살인 내가 갖기엔 너무 무거운 돈이었다.
하다못해 저금이라도 들어 주겠다, 뭐 이런 반응을 할 줄 알았는데…….
“네가 알아서 하거라.”
“아…….”
“네가 싸워서 쟁취한 재산이지 않으냐. 그러니 네가 그 돈으로 드레스를 사든, 보석을 사든, 기부를 하든, 아니면 어디에 투자를 하든, 그건 다 네 마음에 달렸다.”
클로드는 너무도 당연하게 이걸 오롯이 나의 것으로 돌려줬다.
“하, 하지만 이 돈은 제게 너무 큰 돈인걸요. 제가 아직 배움이 부족해 전부 탕진해 버리면…….”
“채워 주면 되지.”
클로드가 팔짱을 끼며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아니면 내가 아직도 코 묻은 돈을 뺏어야 할 만큼 가난해 보이냐?”
“헉,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알아.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쓰라는 소리야. 네 사재는 당연히 책정할 거고, 성인이 되어서 쓸 돈도 따로 알아서 저금할 거니까.”
클로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난 좀 얼떨떨해졌다. 머릿속 한가득 ‘왜?’라는 의문이 들어찼다.
왜 내게 이렇게까지 친절히 대해 주는 걸까? 난 이런 친절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카르시안도 끝내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고, 사생아라 진짜 귀족도 아닌 데다가 원수 집안의 생존자인데.
클로드의 자상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클로드를 보고 있었더니, 카르시안이 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됐네, 라티아. 드디어 온전한 네 것이 생겼잖아.”
“……응?”
“전에 수잔한테 들었어. 네가 갖고 있는 드레스, 보석, 구두…… 다 엘레네가 물려준 거라며.”
“아…….”
“그래서 네가 갖고 있는 것들 중 온전히 ‘라티아’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선물 받은 건 없다며. 시엘이 준 걸 제외하면 말이야.”
아버지가 준 자수정 목걸이도 셀트론에게 줬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젠 생긴 거잖아. 그러니까 잘된 일이야.”
“잘된 일…….”
“나도 아버지의 생각대로 그냥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될 것 같아.”
‘벌써부터 돈 걱정을 하기엔 우린 아직 너무 어리다’란 생각이 읽혔다. 난 내 손을 잡고 있는 카르시안의 손을 내려다보다 힘을 줘서 마주 잡았다.
“응, 알았어.”
그리고는 고개를 반짝 들고 그와 마주 보며 웃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끈한 뭔가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비교하는 자체가 실례인 걸 알지만, 후작저 사람이었다면 당장 “그래,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맡아 두마.” 했을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후작저 사람들이 죗값을 치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건만, 난 아직도 이렇게 내가 그들에게서 벗어났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그나저나, 지금 가져온 저 드레스들이 전부 동생에게 물려받은 거라고?”
클로드는 ‘동생’과 ‘물려받음’이 양립할 수 있냐고 재차 물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자, 그가 심드렁한 척 말했다.
“성에서 지내는 게 좀 적응이 되면 곧장 살롱의 마담을 부르마.”
“보석 세공사나, 장신구 장인도 부르는 게 좋겠어요.”
“그래. 구두, 가방, 전부 다 ‘라티아의 것’으로 채워 주마.”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클로드와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호의적으로 볼 때면 무척 기뻤다. 조금 숨이 벅찰 정도인데,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난 속으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이 30% 지분을 굴려서, 키우자고. 그래서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동안 감사했다며 클로드와 카르시안에게 주자고. 마냥 받고만 있지는 말자고. 이 기쁜 마음을 꼭 가슴에 품고 살자고.
난 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김질을 했다.
* * *
오랑제리를 나온 후, 나는 수잔의 안내를 받으며 방으로 향했다. 클로드, 카르시안, 나의 침실은 4층에 있었다. 처음엔 오고 가기 불편할 줄 알았는데, 후작저와 달리 마법으로 움직이는 승강기가 있어서 계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성의 안뜰을 기준으로 나와 카르시안의 방이 마주보고 있다고 했다. 클로드의 침실은 카르시안의 옆방이었다.
“아가씨의 방은 처음에 카르시안 도련님의 바로 옆방으로 하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불편할 거라며 조금 떨어트렸다고 했어요.”
“난 괜찮은데…….”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나중에 가면 불편할걸요. 당장 3, 4년만 지나도 카르시안 도련님은 훌쩍 자랄 테니까요.”
수잔이 후후 웃었다. 사춘기를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나에게도 사춘기는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홀로 동떨어진 위치가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 * *
내 방은 조금 떨어져 있는 대신 손님이 다니지 않아 무척 조용할 거라 했다.
“남향이라 겨울에도 따듯할 거예요.”
수잔이 방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난 방을 보기 위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는데, 이ㅌ때였다.
“삐르르륵!”
내 방에 있다던 삐로리가 파드득 날아와 내 얼굴에 찰딱 붙은 것이다.
“픕!
난 온몸으로 날아들다 못해 퍼덕거리는 삐로리를 얼굴에서 떼어 냈다.
“삐릭! 삐르르!”
삐로리가 반기는 건지 화내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울어 댔다. 얼굴을 보니 ‘야! 왜 이제 와!’ 하고 화를 내면서도 반기고 있었다. 삐로리는 마차를 모는 길버트의 어깨에 타고 공작성으로 왔는데, 이후 바로 내 방으로 왔던 모양이다.
‘가는 길 좀 구경하려고 길버트랑 있었는데, 이렇게 혼자 있을 줄 알았으면 그냥 너랑 있을걸!’
삐로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씩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