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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58화 (58/186)

58화

중앙지방은 대부분의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설령 돌부리가 있다 하더라도 마차가 흔들리지 않았다. 하여 지금 내 앞엔 3단 트레이까지 놓인 에프터눈 티 세트가 차려져 있다.

“왜 손도 대지 않지?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아뇨. 좋아해요. 그런데…… 음,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요.”

“터무니없는 생각이군. 늘 그랬듯 다 먹으면 된다.”

그렇게 말한 클로드는 내 옆에 앉아 책을 읽는 카르시안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카르시안은 언제 그렇게 심드렁했냐는 얼굴로 곧장 포크를 들었고, 나를 빤히 보며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었다.

마치 ‘빨리 먹어, 나도 먹잖아.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것부터.’ 하는 것 같아서 웃겼다. 그래서 나도 카르시안을 따라 포크를 들었고 슈크림이 가득 찬 에클레어부터 조금 잘라 먹었다.

입 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고소한 크림의 풍미가 무척 황홀했다. 수잔이 몰래 훔쳐 주던 통밀 비스킷이나, 아버지가 하사하듯 주던 식후 디저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번 맛을 본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마차도 흔들리지 않아 체할 걱정도 없었다.

어느 정도 먹고 나자, 이속 마법이 걸린 마차는 벌써 공작성에 도착해 있었다.

“조심해서 내려라.”

클로드가 먼저 내렸고, 카르시안이 그의 뒤를 따르며 나를 잡아 줬다. 난 카르시안의 손을 맞잡고 마차에서 내려와, 공작성을 올려다봤다.

“와…….”

새하얀 외벽에 반대되게 검붉은 지붕과 날카로운 첨탑들이 무척 인상적인 성이었다. 이런 ‘성’을 가질 수 있는 건 공작부터였기에, 나도, 카르시안도 성에서 사는 건 처음이다. 카르시안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가자, 사용인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오시는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자님.”

그들은 가난했던 라움디셀 백작가에도 신의를 지키던 사용인이었다. 그들 다섯의 앞에는 내가 데려온 버틀러가 서 있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버틀러는 클로드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내게 슬쩍 시선을 줬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나를 무척 반가워하고 있었다.

버틀러는 후작저에서 40여 년을 봉사했지만, 변변한 집사복 하나 선물 받지 못했다. 해서, 항상 깔끔했지만 어딘가 허름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오늘 버틀러는 아주 멋있었다. 새 집사복은 물론이고, 잘 빗어넘긴 은회색 머리칼에 중후한 모노클도 끼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공작성의 집사장다웠다.

“먼저 성 내부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클로드는 곧장 버틀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가자.”

“응.”

난 설레는 마음으로 앞으로 내가 살 공작성을 향해 걸었다.

* * *

공작성은 후작저의 네 배는 될 만큼 넓었다. 방을 모두 열어 본 것도 아니고, 주요 연회장이나 구조만 좀 알아본 건데도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환생 전에 종종 다녔던 엄청나게 넓은 박물관을 관람한 기분이다.

나는 지쳐 정원 오랑제리의 티 룸에 앉자마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절반 보셨습니다.”

난 멍하니 버틀러를 올려다봤다. 큰일 났다. 집에 있는데,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은 클로드와 카르시안도 마찬가지인 건지, 두 사람도 죽을상이었다. 결국 클로드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다음에 마저 보지. 오늘 안내는 여기까지 해. 확인해야 할 곳은 다 확인했지 않나.”

집 구경하다가 초상 치르게 생겼다.

“하지만 아직 침실을 보지 못 했지 않습니까?”

“본인의 방을 다른 사람과 같이 들여다보는 것보단 혼자 보는 게 낫지 않겠나?”

클로드가 날 힐끔거렸다. 나를 배려해 주는 모양이다. 클로드의 말에 버틀러는 나직이 웃으면서 그러겠다 말했고, 곧 수잔이 시원한 냉침 차를 가져왔다. 후작가가 멸문한 직후 2주간은 나와 있었지만, 그 이후 2주간은 미리 성에 와 있었다. 이제 수잔은 나의 유모가 아니고 이 공작성의 하녀장이 되었다. 집사장 다음으로 입김이 센 총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하녀장이 직접 차를 내려 주다니, 영광인걸?”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수잔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바빠도 아가씨는 꼭 직접 모실 거예요.”

“응? 정말?”

“그럼요. 그러니 아무리 좋고, 유능한 수족 하녀가 생긴다 하더라도 절 멀리하시면 안 돼요. 서운해할 거예요.”

“내가 수잔을 어떻게 멀리해.”

걱정도 팔자라며 눈을 흘기자, 수잔이 다시 포근하게 웃었다. 클로드는 그런 우리를 미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카르시안의 생각도 때때로 읽히지 않을 때가 있다. 정확히는 재판이 끝난 후부터다. 수잔이나 버틀러의 생각은 지금도 아주 잘 읽히는데, 이상하게 클로드와 카르시안만 모르겠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어디에 조언을 구할 수도 없고, 참 곤란했다.

“삐로리는 어디에 있어?”

“아가씨의 방에 있는데, 아직 방에 못 가 보셨나 봐요.”

“응,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것만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래도 방을 안 본 건 너무 심했나?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카르시안이 말했다.

“여기서 조금 쉬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자. 오늘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또 나름 새집으로 온다고 긴장을 했을 테니 일찍 쉬는 것도 좋겠어.”

“음, 그래. 무리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

다행히 클로드도 카르시안의 말에 동조를 해서, 우리는 오랑제리에서 좀 쉬다가 각자 방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수잔이 내려준 냉침 차를 절반쯤 마셨을 때, 클로드가 내게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아까…….”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직설적으로 물었다.

“황제 폐하와 어떤 대화를 나눴지?”

사실 난 아까, 공작성으로 오는 마차를 타기 전에 황제에게 불려갔었다. 정확히는 황제를 모시는 호위 기사에게. 척 보기에는 흔한 복장이었지만, 그 허리춤에 찬 검이 무척 번쩍거려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걸 알아차렸다.

‘라티아 아가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잠시 저희와 가 주셔야겠습니다.’

클로드는 호위 기사를 대신할 해적들과 잠시 자리를 비웠고, 카르시안은 마차를 살피고 있었다.

흠, 모르는 어른은 따라가면 안 되는데.

내가 망설이자 그가 말했다.

‘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지지 않는 태양의 아래에 어둠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나는 그가 황성에서 나왔다는 걸 알았다. 보통 ‘지지 않는 태양’은 황제를 뜻하니까. 난 마차를 몰 길버트와 대화하는 카르시안을 보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앞장을 섰고, 난 흙바닥에 내가 향하는 방향으로 꺾쇠 표를 남기고는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곳에는 문양이 없는 하얀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문이 열렸지만 차창에 암막 커튼을 달았는지 내부가 무척 깜깜했다.

‘지지 않는 태양 아래에 어둠은 없다면서요?’

기사에게 물으니 그는 당돌한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으며 마차 안만 가리켰다. 난 그를 흘겨보고는 발뒤꿈치에 힘을 줘, 흙바닥에 구두 자국을 꾹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역시나 마차 안엔 황제, 레오나르도가 있었다.

‘제국의 영원한 광영을 누릴 하늘을 뵙습니다.’

내가 인사하자 그는 나를 신기하단 듯 훑어봤다. 어린데도 황제를 곧바로 알아본 데다가, 당황하지 않는 게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내가 마주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버스 글라델리스의 서재에 있던 물건 중 필요한 게 있다면 돌려주마.’

별다를 것 없는 말이었지만 난 레오나르도가 어떤 이유로 날 찾아왔는지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아버지가 모았던 귀족들의 약점이란 치부책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나를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로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황제의 앞에서 기가 죽어 알고 있는 사실만을 말할 줄 알았나 보다. 만약 내가 뭔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눈치를 보이면 겁박을 하거나 처리하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지.

난 황제의 앞에 얌전히 앉아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뇨,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음?’

‘전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간 적이 그때가 처음인걸요. 그런 제가 거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부탁을 드리겠어요.’

레오나르도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살펴봤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음, 그래. 불법 격투장을 운영했다는 장부를 찾아 제보했다고 했지.’

‘네. 그건 제가 글라델리스 상단의 운영을 도우면서 우연찮게 알게 된 거예요. 전 예리엘 만물 상단주에게 법을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격투장 운영이 불법이란 걸 알고 정말 운영한 건지 확인하러 들어갔을 뿐이에요.’

그때 우연히 클로드가 들어와 후작저의 흉측한 비밀을 파헤쳤을 뿐이라고, 난 황제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황제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삐로리가 탐내는 나의 독심술은 황제의 표정까지도 파악했다. ‘이 아이는 내 어머니의 약점을 모르는군.’ 하는 안도가 고스란히 읽혔으니 말이다.

물론 난 치부책을 읽었다. 이는 원작에도 나오지 않은 정보다. 알아 두면 분명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난 클로드가 내가 건넨 불법 격투장 장부를 확인하는 동안 후다닥 확인했다. 엄청 빠르게 읽느라 전부를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굵직한 인물들의 약점은 기억하고 있다. 선황후의 약점 또한 말이다. 하지만 그걸 내가 알고 있다고 밝혀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해서, 나는 시치미를 뚝 뗐고 황제는 나를 돌려보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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