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가씨.”
이제 더 이상 후작 영애가 아니니, 아가씨라 불릴 수도 없건만 빈센트는 이 호칭을 고집했다.
라티아가 말간 시선을 보내자, 그가 말했다.
“그루안 상단주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건 아가씨가 최선으로 고른 선택지입니까?”
“네?”
“아니면 유일한 선택지입니까?”
라티아는 빈센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속내가 읽히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네.’
하지만 빈센트가 한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제게는 유일한 선택지죠. 기본적인 의식주와 안전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단원으로 일하는 수밖에 없어요.”
클로드가 3년 뒤에 왔더라면 그사이에 돈을 모아 놨을 텐데, 시간이 부족했다. 라티아는 멸문한 후작가의 사생아이니, 친정이나 친한 방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생각해 낸 게 상단의 직원으로 몸을 의탁하는 것이었다.
이에 빈센트가 허허,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황도에 남을 수도 있고 일을 하지 않아도 성인 때까지의 의식주와 안전을 책임져 주는, 보다 나은 선택지가 있으면 그걸 선택하실 겁니까?”
“……이, 있나요?”
“있다마다요. 전 재판관입니다. 이 제국의 법은 훤히 꿰고 있지요.”
라티아도 시엘과 법을 배우긴 했지만, 가족법보단 민상법에 치중했기에 몰랐다.
“아, 하지만 입양은…….”
라티아가 카르시안을 힐끔거렸다. 그가 쭈뼛 놀랐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고 빈센트가 허허 웃었다.
빈센트가 말했다.
“입양이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이 제국엔 ‘후견인’ 제도가 있으니까요.”
후견인, 그건 미성년자의 몸과 재산에 대하여 법적으로 보호하거나 대신할 책임이 있는 성인을 가리킨다.
빈센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계신 라움디셀 공작 각하가 아가씨의 후견인이 되어 주시면, 입양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서 힐끗, 카르시안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르시안의 눈빛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공인된 관계이기에 넓은 의미에서는 입양이나 결국 양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여 ‘공녀’ 대우는 받지 못하겠지만, 공작가의 피후견자가 되는 것이니 모두들 아가씨를 ‘공작가의 영애’라고 부를 겁니다. 그러니 귀족이라 데뷔탕트도 준비할 수 있겠지요.”
이번엔 클로드를 바라봤다. 클로드의 표정에 미묘한 아쉬움과 함께 만족감이 차올랐다. 빈센트의 생각대로 라움디셀 부자의 마음에 이 ‘후견인 제도’가 쏙 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라티아 아가씨의 동의뿐인데.’
빈센트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라티아를 바라봤다.
라티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새벽녘 같은 눈동자를 올려 뜨며 물었다.
“그럼 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예?”
“제가 그루안 상단주의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 또한 상단원으로 받아 주겠다는 말 때문이었어요. 전 제 유모인 수잔과 삼촌인 길버트 그리고 반려 새인 삐로리와 함께 살고 싶어요.”
수잔과 길버트는 라티아의 증언 덕분에 풀려났다. 하지만 수잔은 추천장이 없어 재취직에 어려움을 겪을 게 분명했다. 또 길버트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모든 상속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평민이었다.
“전 그들을 모른 척할 수 없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집사장인 버틀러도 함께하고 싶고요.”
버틀러는 40여 년간 글라델리스 후작가를 모신 충신이었으나 최근엔 라티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알버스가 불법 격투장을 운영하는 걸 몰랐으나 집사로서 주인의 범죄 행위를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버틀러는 40년이나 후작 가문을 모셨던 경력이 있다.
‘분명 상단 일에도 도움이 될 거야.’
해서, 라티아는 어떻게든 버틀러를 보석방시키고 함께 상단 일을 꾸려갈 생각이었다.
라티아의 말을 들은 빈센트가 클로드에게 시선을 건넸다. 클로드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빈센트에게 묻듯이 말했다.
“하사받은 영지에 이미 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을 보수하려면 허드렛일이 능숙하면서도 저택이나 성에 익숙한 남자 하인이 필요할 테지요.”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또 청소를 하려면 오랜 시간 아이를 보살필 만큼 세심하고 꼼꼼한 여자 하인도 필요할 거고요.”
“물론입니다, 각하.”
“그리고 라움디셀 백작저에서 돈을 훔쳐 도망간 몹쓸 집사 대신, 한 가문에 반평생을 바칠 만큼 신의 있는 집사도 구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겠군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새는…….”
클로드가 저를 홀린 듯이 올려다보고 있는 라티아를 보며 말을 끌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침을 깨우는 용도로 쓰면 딱이겠군.”
그 말을 들은 빈센트가 후후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고, 클로드는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클로드는 여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라티아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 생각에, 너의 이해관계와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
“네 의사는 어떻지?”
클로드는 끝까지 라티아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했다. 라티아는 저 같은 사생아를 이토록 대우해 주는 클로드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라티아를 입양한다 했을 때 기를 쓰고 반대했었다. 라티아가 카르시안을 힐끔 보자, 그는 어딘가 들뜬 표정이었다.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읽혀, 라티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가족이 되는 건 싫지만, 같이 있는 건 싫지 않은 모양이네.’
대체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카르시안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라티아가 클로드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라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저를 보고 있는 클로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제 후견인이 되어 주세요. 전 공작님께 제 사람을 인력으로 제공할게요.”
그 당돌한 말에 클로드는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서늘하고 어딘가 퇴폐적이라 차가운 인상이던 얼굴이 환한 미소를 짓자, 이보다 화사할 수가 없었다.
큭큭 웃음을 갈무리한 클로드가 라티아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지.”
클로드는 라티아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잘생긴 미소에 라티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를 본 카르시안은 도끼눈을 뜨고 제 아버지와 라티아를 번갈아 보다가 황급히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위로 제 손을 올리고는 악수를 하듯 흔들었다.
“나도 잘 부탁해, 라티아. 앞으로도.”
카르시안은 제 아버지에게 미묘하게 등을 돌린 채 오로지 라티아만 보며 말했다. 라티아는 카르시안이 왜 이러는지 몰라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매끄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또 같이 살게 되어서 다행이야. 좋다.”
해사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카르시안의 심장이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그 말은 꼭, 라티아도 카르시안과 같이 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해서 슬펐다는 것 같았으니까.
카르시안이 멍하니 라티아를 보며 혼자 설레어 하자, 이를 본 클로드의 눈빛에 살짝 나른한 빛이 스쳤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여동생이 되는 걸 반대했는지 알겠군.’
아무래도 제 아들은 자신의 은인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클로드가 보기에 라티아는 카르시안에게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생 좀 하겠군.’
클로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물론 클로드도 카르시안을 놀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가만있어 보자, 피후견인을 성인이 되자마자 며느리로 맞이할 수 있던가?’
어쩌면 도둑놈이라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고, 아들과 맺어 준다는 불순(!)한 이유로 후견했다는 추문이 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대수는 아니지.’
클로드는 앞선 걱정을 한 번에 정리해 버렸다.
클로드는 여전히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라티아만 보고 있는 카르시안과 아무것도 모른 채 생글생글 웃는 라티아를 보다 툭 말했다.
“그럼 집으로 가자.”
“네!”
“네!”
아이들이 씩씩하게 대답했고, 어른들은 그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그간 수도의 타운 하우스에서 지냈던 우리는 오늘, 드디어 공작령으로 향한다. 라움디셀 공작령이라 명명된 영지는 황도와 무척 가까운 중앙지방이었다.
난 마차를 마주한 순간부터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타고 있는 마차는 황제가 하사한 최고급품이었다. 후작가가 멸문한 후, 난 티아나 아메시스트의 차명계좌에 보관된 돈으로 싸구려 마차를 빌릴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셀트론의 고향으로 가는 기간 동안 날 호위할 용병을 고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힘들면 시엘에게 눈 딱 감고 돈을 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 그런 구질구질했던 계획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호화로운 마차에 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