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이들은 법원 건물 앞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긴장이 풀렸나 봅니다.”
어른들도 두려워하는 곳이 재판장이다. 아이들이 겁에 질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마침 그들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상담하고 있었다. 카르시안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고, 라티아는 그런 카르시안을 말갛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아들은 나와 같은 뜻인 모양이군.’
카르시안의 의사까지 확인한 클로드는 지체 없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뜻을 전했다. 그런데 여기엔 복병이 있었다.
“입양이라뇨? 절대 안 돼요!”
바로 카르시안이었다.
클로드는 당황스러웠다. 라티아를 입양하겠단 이야기는 당연히 카르시안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다. 방금 전까지도 라티아에게 저와 가자고 말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격한 반응이라니?
“안 돼요, 누구 맘대로요? 전 절대 싫어요!”
그것도 당사자인 라티아를 앞에 두고!
아들이 이렇게까지 결사반대를 하는 것도 처음인지라, 늘 고요하던 클로드의 붉은색 눈동자도 마구 흔들렸다. 일단 클로드는 입양허가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고개까지 붕붕 젓는 카르시안을 멍하니 보는 라티아의 귀를 막아 줬다.
“……?”
라티아가 의아한 듯 클로드를 올려다보자, 클로드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개소리 차단.”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이 한순간에 개가 되어 버렸다.
라티아는 아주 큰 손으로 제 양쪽 귀를 단단히 막아 준 클로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건조하고 딱딱한 손바닥에 말랑한 볼이 짜부러져서 불편했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스해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클로드가 읊조리듯 조용히 카르시안을 불렀다.
“대체 왜 싫다는 게냐. 난 당연히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만.”
“제가요?”
“그래.”
“제가 왜요?!”
카르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라티아의 귀를 막아 주느라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덕에 클로드와 카르시안의 눈높이가 좀 맞았다.
“라티아와 계속해서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방금도 그래서 같이 지내자고 말하고 있었잖아.”
“그건 맞지만……!”
“그런데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기에, 앞에 사람을 두고 그렇게 질색을 해.”
낮게 힐난하는 목소리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카르시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라티아는 클로드의 손에 귀가 막힌 채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찌부된 볼이 유독 오동통하고 뽀얘서 무척 귀여웠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의 순수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니, 카르시안은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하아……. 이따가 사과할게요.”
“그래. 앞으로 남매가 될 사이인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면 쓰나.”
“그러니까 전 라티아랑……!”
카르시안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혹여나 클로드의 손을 뚫고 그 소리가 라티아의 귀에 새어 들어갈까 봐 입을 딱 다물었다.
카르시안이 이를 악물고 복화술을 하듯 말했다.
“라티아랑 남매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요.”
“어째서?”
“그야…….”
힐끔, 카르시안은 다시 라티아를 훔쳐봤다.
어딘가 화사하면서도 나른한 느낌이라 아무리 봐도 눈이 피로하지 않은 깨끗한 밀빛 머리칼. 불순물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최고급 자수정이 떠오르는 어여쁜 자색 눈동자. 젖살이 있어 살짝 동그란 뺨은 늘 장미꽃물이 든 듯 발그레해서 사랑스러웠다.
“그야…….”
어린아이답게 늘 높은 편인 체온은 맞닿을 때마다 마음이 놓였고, 주변에서는 언제나 뽀송뽀송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깃털 펜을 야무지게 잡아 버릇하던 손이 카르시안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을 때면 무척 어른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아직 또래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아 걷는 뒷모습을 보면 ‘아장아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건, 그러니까…….”
오늘처럼 제대로 치장을 하고 앉아 있을 때면 장인이 정성껏 만든 인형보다도 깜찍했다. 라티아가 제게 집중을 하면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떨렸고, 혀를 씹을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더 모르겠다.
‘그러게. 난 왜 라티아가 내 여동생이 되는 게 싫지?’
라티아가 합법적으로 카르시안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입양되어 여동생이 되는 게 가장 빠르다. 그러면 함께 있을 수 있다. 근데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어째서?’
카르시안은 속으로 클로드가 그에게 건넸던 물음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답을 찾으려고 해도 모르겠다. 카르시안은 아랫입술만 잘근거리다가 제 검은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아, 아무튼! 라티아가 제 여동생이 되는 건 싫어요!”
“이해할 수가 없군.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라면 라티아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어.”
클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에 카르시안도 놀라 심장이 쿵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카르시안이 고집스레 입을 다물자, 클로드가 난처하단 듯 중얼거렸다.
“저 쇠고집. 누굴 닮아서…….”
“누굴 닮았겠습니까.”
“저라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흠흠, 글쎄요. 그나저나 곤란하군요. 영식이 입양을 거부하다니…….”
빈센트가 다가오며 말했다.
“라티아 아가씨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공자의 의사도 중요합니다. 가족이니까요. 밀어붙여서는 안 되지요.”
“음…….”
클로드가 곤란한 숨을 뱉었다. 라티아는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지금 싸우는 건가?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나 갈 곳 있는데…….’
뭐라 말하기에는 클로드가 귀를 너무 단단히 막아 뒀다. 자신이 눈치챈 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 섣불리 입을 열어 봐야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라티아는 불안하게 라움디셀 부자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느낀 부자들이 똑같은 얼굴로 당황했다.
카르시안의 개소리가 한차례 잦아든 것 같자, 클로드가 천천히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아무리 좋지 못한 소리를 차단한다는 이유라 하더라도, 주인공을 빼고 이야기를 나눴군.”
“라, 라티아. 아까 내가 했던 말은 미안해. 널 욕 보이려는 뜻은 아니었어.”
카르시안이 얼른 사과했다. 라티아는 카르시안을 이해했다.
‘아버지가 이제야 막 돌아오셨는걸. 부자간의 시간을 갖고 싶었겠지.’
아무리 라티아와 친하다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타인이다. 가족사에 이방인이 끼어드는 게 좋을 리가 없다.
“괜찮아. 난 별로 신경 안 써. 저, 무슨 대화를 나누셨나요?”
“너의 거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넌 카르시안의 은인이다. 저 배은망덕한 녀석도 편지에 분명 그렇게 적었지. 그런데 네게 보은하지는 못할망정,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
클로드가 마치 이르는 투로 대답했다. 그에 카르시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가 반복했다.
“전 그런 뜻이 아니고…… 아, 씨.”
하지만 카르시안도 제가 왜 라티아와 남매가 되기 싫은지 몰라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라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 제가 의탁할 곳이라면 있어요. 그루안 상단이요. 이미 말도 해 뒀는걸요.”
라티아는 오늘만을 위해 차명계좌까지 만들어 둔 후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람?
“괜히 저 때문에 다투지 마세요. 가족이잖아요.”
라티아의 말에 클로드와 카르시안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래, 내가 지금 가족을 잃은 아이의 앞에서 가족과 싸웠군.’
‘난 바보야. 라티아가 아무리 괜찮아 보이더라도 더 헤아렸어야 했는데.’
라움디셀 부자는 미안한 얼굴로 라티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라티아가 갈 곳이 있다니, 클로드도 더 이상 입양하겠다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는 카르시안에게 있다.
“전 그루안 상단주의 고향인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뭐? 남쪽으로?”
“응, 셀트론의 고향은 아주 한미한 자작 영지거든. 난 거기서 그루안 상단을 도우며 의탁할 생각이야.”
라움디셀 백작가엔 작긴 하나 영지도 있었고, 수도의 타운 하우스도 있었다. 이번에 공작이 되었으니 그에 합당한 거대한 영지도 하사받을 것이다. 영웅의 영지인 만큼 황도와 가까울 테니, 그녀가 남쪽으로 내려가면 거리적으로 굉장히 멀어진다.
“그……럴 수가.”
카르시안은 소소하게 충격을 받았다. 라티아는 너무도 당연하게 저와 떨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걸 여태 카르시안에게 말도 해주지 않고 있었다.
‘너무해…… 난 당연하게 같이 지낼 줄 알았는데.’
카르시안은 단 한 순간도 라티아와 떨어져서 지낸다는 가정을 하지 않았다. 서운함이 파도 밀려오듯 들이닥쳤다.
‘의탁을 한다는 이유로 남쪽으로 내려가면 난, 난 앞으로 무슨 구실로 라티아를 만나지?’
애초에 만날 수는 있나? 어쩌면 1년에 한두 번 편지를 보내는 게 고작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예의상으로! 하지만 이 또한 라티아의 선택이다.
‘그 선택에 내가 고려되지 않았을 뿐…….’
어쩐지 가슴이 뻐근하게 아프고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카르시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리 위에 풀이 팍 죽은 고양이 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빈센트의 현명한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아무래도 라움디셀 공자는 라티아 아가씨를 마음에 품은 모양이군.’
과연 오랜 시간 재판을 했던 노련한 재판장. 본인은 물론 그의 아비와 상대조차 모르는 카르시안의 마음을 꿰뚫어 봤다.
“험험.”
빈센트가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모았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방도가 있습니까?”
클로드의 물음에 빈센트가 씩 웃으며 라티아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