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내가 입꼬리를 씩 올린 채 멍하니 건물을 보고 있자니, 카르시안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왜…… 너도 날 괴롭혔다고 증언했어?”
“응?”
“너한테 불리하잖아.”
“근데 사실이잖아.”
난 팔을 뒤로 보내 상체를 지탱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쭉 뻗은 발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한테…… 다신 그러지 않는다고 하고, 사과했다고 해서 과거가 달라지는 건 아냐. 그것들을 덮어 두고 싶지 않았어.”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카르시안이 양반 다리를 하고 턱을 괴었다. 허벅지에 팔꿈치를 댄 탓에 웅크린 자세가 꽤 불량스럽다. 얘한테 귀족 교육시키려면 애 좀 먹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올려다보니, 카르시안이 날 보며 씩 웃었다.
“그거 알아, 라티아?”
“뭐?”
“너 지인짜 이상한 거.”
“뭐?!”
“아무리 그래도 누가 재판관 앞에서 ‘나도 가해자예요’ 하냐?”
“그럼 그냥 피해자인 척만 하고 있어? 나도 잘못한 게 있는데?!”
순간 울컥해서 되묻긴 했지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그래서 난 그냥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좀 무모하긴 했던 것 같네.”
“좀?”
“좀 많이?”
“아주 많이.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너도 꼼짝없이 처벌받았을걸?”
난 입술을 비죽거렸다.
치사하게 생색내냐.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재판장에서 날 두둔해줬던 카르시안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난 입술끼리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
“고마워.”
“…….”
“내 편, 들어 줘서.”
카르시안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약간 어색한 침묵 사이로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한참 뒤, 카르시안이 더듬더듬 말했다.
“뭐, ……뭐어. 그래.”
그리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채 옷깃 사이로 드러난 뒷목만 주물렀다. 길고 예쁜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뒷목이 붉어 보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민망했다.
괜히 딴청을 피우고 있자니, 카르시안이 눈치를 보듯 코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흠…… 근데 넌 이제 어쩔 생각이야?”
“뭘?”
“너네 가문 망했잖아. 어디로 갈 거냐고.”
“아, 그거.”
그건 다 생각이 있다. 내가 뭘 위해서 일찌감치 셀트론을 도와주고, 그루안 상단을 키워놨겠는가. 난 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되짚고 있는데,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카르시안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혹시 아아아, 아직 정하지 못했, 정해지지 않았으면, 아…… 아버지도 돌아오셨고, 그러니까 그냥 계속 나, 나랑…….”
“응?”
근데 말을 너무 더듬어서 뭔 소린지를 모르겠다. 다시 이야기해 보란 뜻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카르시안의 뽀얀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한참을 웅얼거리던 카르시안이 뭐라 말하려는 때.
“우리와 가자.”
“우리와 가, ……응?”
위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에 덩달아 그 목소리를 따라 말하던 카르시안이 놀라 위를 올려다봤다.
나도 놀라서 고개를 반짝 치켜들었는데, 거기엔 허허 웃고 있는 빈센트와 나른한 표정의 클로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에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시 자리를 떴었는데, 이제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금, 클로드가 뭐라고 했지?
“갈 곳이 없으면 우리와 가자고.”
“……네?”
“내가 널 입양하겠단 소리다.”
“……네에?!”
* * *
클로드가 아들과의 진짜 재회도 뒤로하고 빈센트와 대화를 나누러 간 이유는 바로 라티아의 거취 때문이었다.
빈센트가 놀라 물었다.
“입양을 하시겠다고요? 그 아가씨를요?”
“예.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멸문했습니다. 카르시안에게 돌아갈 때 제 양손에는 방계의 머리도 두둑이 매달려 있을 테니까요.”
클로드가 ‘글라델리스의 씨를 말리겠다’는 말을 아주 재치 있게 했다. 빈센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양 절차를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아들과 딸은 천지 차이입니다.”
빈센트의 슬하에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손자와 손녀도 두 명씩 아주 골고루 있었다. 그렇기에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가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들만 키워 본 공작이 딸을 잘 키울 수 있을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빈센트가 보기에 라티아는 굉장히 외향적이었다.
‘어른들의 시선에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 하며, 자신의 잘잘못을 똑똑히 알고 그것을 말하는 용기 하며…….’
보통 내향적인 아이는 수줍음이 많아 수많은 시선에 두려움부터 느낀다. 하지만 재판장에서 라티아는 어땠던가.
‘고대하던 무대에 오른 배우 같았지.’
그녀에 비해 카르시안은 조금 예민해 보였다. 잠자코 있다가 라티아가 불리해지자 나서는 걸 보아, 아주 소심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각이 무척 많아 보였다. 아마 라티아에 비해 카르시안이 좀 더 감정적일 것이다.
‘사용하는 단어나 화법만 봐도 알 수 있지.’
라티아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사정을 판단해 설명하고 ‘주장’했지만, 카르시안은 주관적으로 라티아를 감싸며 빈센트에게 가엾게 여겨달라 ‘호소’했다.
빈센트가 걱정하는 건 바로 이거다.
‘이렇게 상반된 아이들이 과연 한 가정에서 사춘기를 겪으며 잘 지낼 수 있을까?’
게다가 빈센트는 라티아의 지나치게 의젓한 성격이 걱정되었다.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아이는 분명 혼자 끙끙 앓을 거야.’
이미 가족에게 한 번 크게 상처를 입어 마음이 다친 아이다. 게다가 라티아는 멸문한 후작가의 영애고 카르시안을 괴롭힌 전적이 있다. 그런 아이가 저를 입양한 양아버지에게 안고 있는 문제를 토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면접을 통해 방계를 한두 명 살려 두고 그곳에 아가씨를 의탁하는 게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해서, 빈센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아뇨, 라티아는 제가 데려갈 겁니다.”
벌써 라티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클로드를 만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빈센트는 클로드에게 실토했다.
“늙은이의 오지랖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점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클로드는 딱 잘라 말했다.
“저도 충동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다 생각이 있다고.
사실 클로드도 처음엔 빈센트와 같은 생각이었다. 라티아는 카르시안 못지않게 상처를 입은 아이다. 그런 아이가 ‘내가 괴롭혔던 아이의 아버지’인 클로드에게 제대로 의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난 카르시안의 편지 덕분에 전반적인 상황을 알고 있고, 또 카르시안이 곧잘 따르니 개인적인 원한조차 없다지만, 라티아는 또 모르지.’
해서, 클로드는 몇 차례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라티아의 양부모를 정해 줄 생각이었다.
‘카르시안의 말에 따르면 라티아는 병에도 걸렸다니까.’
부유하고 어린 환자를 정성으로 대해 줄 어른이 필요했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클로드의 이런 생각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그 녀석이 직접 나설 줄이야.’
시엘에게 듣자 하니 카르시안이 학대받고 있단 사실을 감춘 이유는 클로드를 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공적을 오롯이 칭송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라티아가 기지를 발휘해 편지에서 카르시안의 상황을 드러내게 하지 않았더라면, 클로드는 아들의 고통을 몰랐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서둘러 귀국하지도 않았을 테니 카르시안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 그런데 그런 카르시안이 라티아에게 불리해질까 봐 다급히 발언권을 요청했다. 클로드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시엘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카르시안 도련님께서는 라티아 아가씨와 함께하고 싶으신 것 같았습니다.’
시엘은 카르시안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그곳엔 라티아가 없단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내 아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들어줘야지.’
라티아는 저를 두둔하는 카르시안을 보며 강한 감동을 느낀 듯했다.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오로지 합리적인 생각만 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성적인 아이의 얼굴에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온 것이다. 그것을 본 클로드는 냉철한 라티아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카르시안이란 걸 깨달았다.
‘정작 두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카르시안과 라티아는 서로에게 ‘자신에게 반(反)할 정도로’ 영향력을 끼치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었다.
“저도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 겁니다.”
빈센트는 클로드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걱정되는 한편, 어쩐지 클로드라면 정말 알아서 잘할 것 같았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잘 해내다 못해 영웅까지 됐지 않은가.
“그래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더 이상 만류할 수는 없겠지만…….”
“걱정을 하지 말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재판관께서는 인생의 선배기도 하시니 제가 때때로 조언을 얻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어려워하더라도, 좋은 오빠가 될 카르시안에겐 이미 마음을 열었을 테니까요.”
클로드의 말에, 빈센트는 결국 그에게 입양허가서를 건네줬다.
여기에 클로드와 라티아가 서명을 하면, 라티아는 그의 양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