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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54화 (54/186)

54화

클로드의 말에 귀족들이 다시금 술렁거렸다. 어린 피해자가 가해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문제가 되는데,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다니?

“괜찮을까요?”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야 할 텐데요.”

아무리 죄를 밝히기 위해서라지만 클로드가 너무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라티아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라티아는 꼭 제가 증인으로 서고 싶다고 부탁했고, 졸지에 재판장에서 재회하게 된 그의 아들인 카르시안도 라티아의 말에 힘을 실어 줬다.

‘라티아는 굉장히 영특하니, 재판에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아버지.’

해서, 클로드는 악역은 제가 맡을 테니 원한을 풀고 오라는 뜻으로 라티아의 손을 들어 줬다.

증인석에 앉아 있던 라티아가 천천히 일어섰다. 동시에 재판장을 꽉 채운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 무척 날카롭고 무거워 겁에 질릴 법도 한데, 라티아는 무척 태연해 보였다.

“―사실만을 증언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위증 시 처벌을 받겠다는 선언문을 낭독한 라티아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라티아는 총명한 자색 눈동자를 빛내며 빈센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혼외자식입니다.”

“……!”

“세상에……!”

라티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재판장을 발칵 뒤집을 정도로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여태 라티아는 후작가의 명실상부한 장녀로 통해 왔다.

“라티아 글라델리스 영애가 혼외자식이란 말은…….”

“사, 사생이라고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 사실을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영애가 알고 있다니요!”

이 사실을 아이가 알게 놔둔 것 또한 또 다른 학대이므로, 빈센트가 재판봉을 아무리 두드려도 소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 어떤 증언보다 확실한 ‘나는 학대 받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라티아의 증언을 들은 알버스와 레이시나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설마 라티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모를 수가 없을 만큼 티가 났지만, 라티아는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섞여 들고 싶어 했다.

‘설령 누가 알려 줬다 하더라도 부정하고, 절대로 믿지 않으려 할 줄 알았는데……!’

레이시나가 멍한 얼굴로 라티아를 바라봤지만, 라티아는 그녀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라티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제 어머니는 대리모입니다. 후사를 잇기 위해 후작은 대리모를 고용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쩐 일인지 후작 부인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엘레네입니다. 엘레네의 탄생과 동시에 저는 불필요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라티아는 자신의 입지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는 불필요한 아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대목에선 다들 숨을 들이켰다.

“얼마나 ‘그런 대우’를 받았으면, 거기에 면역이 되었으면…….”

“저렇게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안타까워요.”

몇몇 마음이 여린 부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라티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저는 그간 저를 사생아라 무시하고, 굶기고, 하극상을 일삼는 사용인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요. 이러한 상황은 저기에 있는 라움디셀 공자에게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라움디셀 공자에게도 다를 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 그에게도 행패를 부렸단 말입니까?”

라티아가 명백한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던 빈센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카르시안도 당황해서 라티아를 보고 있었다.

‘설마…….’

카르시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의 예상이 맞았다.

“전 부모님의 관심을 얻기 위해 라움디셀 공자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니 저 또한 가해자입니다.”

라티아는 이 자리를 빌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순간 장내가 술렁거렸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라티아는 제 속죄를 위해 이야기한 거지만, 아이가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 위험하거나 못된 짓을 벌이는 건 흔했다. 인형을 내동댕이치거나, 종이를 찢는다거나, 그런 일 말이다. 물론 사람을 괴롭힌 건 이에 비할 만큼 작은 문제가 아니지만, 라티아가 처한 상황은 특별했다.

“사생아라는 폭언까지 듣고, 하인들이 하극상까지 일으켰다니요.”

“후작가는 대체 하인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죠?”

“아이는 본능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말을 달리 하면, 사랑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덕분에 라티아에겐 동정 여론이 일었고, 여기서 카르시안이 나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발언을 허가합니다.”

“감사합니다. 글라델리스 영애가 저를 괴롭힌 것은 맞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피해를 입었다는 걸 인정한다는 소립니까?”

“네. 하지만 영애는 저를 괴롭히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굶고 있을 때는 몰래 끼니를 챙겨 줬고, 약을 발라 줬습니다. 제가 오늘 황성 경매 전야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영애가 저를 보살폈기 때문입니다.”

카르시안의 말에 라티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늘 강단 있고 총명하게 빛나던 자색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카르시안…….’

라티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행복과 감동이 끓어올랐다. 지금, 카르시안은 라티아를 변호해 줬다. 라티아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쟤는 좀 착했어요.’ 소리를 한 것이다!

라티아의 눈동자 가득 차오른 기쁜 눈물을 보지 못한 카르시안은, 빈센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그녀가 처한 상황을 헤아려 주십시오.”

카르시안은 절박해 보였다. 이대로 라티아가 벌을 받게 둘 수는 없다는 듯이. 라티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찬 시선으로 그를 보다 빈센트 앞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클로드의 입가엔 나른한 미소가 어렸다.

다시 귀족들이 쑥덕거렸다.

“앞에선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쁜 짓을 하지만, 양심과 죄책감에 뒤에서 반성을 했던…… 걸까요?”

“글라델리스 영애의 상황이 너무 딱해요.”

“저 같아도 집안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 같기는 해요.”

덕분에 라티아를 향한 동정 여론이 더욱 거세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고 있던 글라델리스 후작 일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대로 가다간 저들만 죽고 라티아는 살아남게 생겼으니까.

‘말도 안 돼!’

이건 알버스의 계획과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입이 틀어막힌 알버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황제가 철폐한 노예제도를 이용하여 불법 격투장을 운영한 것부터 사형은 확정이었다.

‘그 증거를 대체, 어떻게, 누가 찾았단 말이야! 그 장부가 서재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을 텐데!’

내내 재갈이 물려 있던 통에 레이시나에게 ‘라티아가 서재에 있다고 했다’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문득 알버스는 전에, 베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티아가 서재로 숨어들었단 것 말이다.

‘하지만 그때 라티아가 숨어든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만약 조작된 거라면? 라티아는 시엘과 친하지 않나?

‘그러니 시엘의 도움을 받아 베티를 공격했겠지!’

대체 어떻게 시엘과 안면을 트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엘과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다면…… 시엘의 도움을 받아 라티아가 서재에 남긴 흔적을 지웠을 수도 있다.

‘마법약을 훔치러 들어왔다가, 그 장부를 본 게 분명해!’

알버스는 격분한 나머지 흰자까지 누렇게 떴다.

“흐으읍! 으읍!”

그러나 입이 틀어막혔기에 그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에게 약점을 잡혔던 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가 이대로 꼼짝없이 죽길 바랐다.

이윽고 판결이 내려졌다.

“글라델리스 후작 일가에게 전원 사형을 고한다. 단, 라티아 글라델리스는 제외한다.”

끝으로 재판봉이 세 번 내리쳐지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지옥을 선고했다.

* * *

아버지는 그 죄가 특별히 무거워 단두대에 세워질 것이고, 어머니와 엘레네는 교수형에 그칠 거라 했다.

사실 어린 엘레네까지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건 좀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저지른 죄는 황명을 거역한 죄. 대역 죄인의 자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난 내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과 아버지를 고발하기 위해 증거를 제출한 점을 인정받아 무죄를 선고받았다.

결국 난 살아남은 것이다.

재판장에서 나와 밤인데도 하얗고 성스럽게 빛나는 법원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다리가 풀렸다.

“하아아…….”

난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재판장을 올려다봤다.

“라티아, 괜찮아?”

카르시안이 걱정스레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난 그에게 대답해 줄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바짝 긴장했던 몸에 힘이 쭉 풀려, 온몸이 다 후들거리고 있었다. 난 카르시안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내 웃음의 뜻을 알아본 걸까?

카르시안은 날 묵묵히 내려다보다 내 옆으로 와 마찬가지로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며, 목소리가 나왔다.

“공자가 이게 뭐야.”

“너도 후작 영애인데 이러고 있잖아.”

“나 이제 후작 영애 아닌데.”

우리 가문 망했어.

내가 덧붙이자 카르시안이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난 그런 카르시안을 보다가 피식 웃고는 법원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뭐랄까……. 기분이 이상해.”

가슴이 시원하면서도 동시에 헛헛했다. 드디어 난 끝을 봤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일.

‘살아남기’

난 그걸, 드디어 성공했다.

“흐으읍, 하이아…….”

난 깊게 심호흡을 했다. 눈물이 나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해냈다, 라티아. 해냈어.

그게 아주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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