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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53화 (53/186)

53화

“대체.”

클로드가 성큼 레이시나의 곁으로 걸어갔다. 군화 특유의 소리는 무척 두려웠다. 레이시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확 물렸는데, 클로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어떤 괴롭힘을 어떻게 했기에 괴롭혔다는 증거가 자신의 방도 아니고 부친의 서재에 있는 거지?

“그건…….”

“아하, 알겠군.”

레이시나가 입을 벙긋거리자, 클로드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레이시나는 턱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앓는 소리를 흘렸다. 두려움으로 입술이 덜덜 떨렸다.

클로드는 겁에 질린 레이시나를 섬뜩하게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내가 바다에서 죽을 줄 알고 내 아들을 학대했던 그 멍청한 머리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까지 쳐들어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레이시나는 지척에서 마주한 클로드의 핏빛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처, 음부터…….”

클로드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애초에 레이시나의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마구 요동치는 레이시나의 탁한 노란색 눈동자와 달리 클로드의 붉은 눈동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오로지 경멸과 혐오 그리고 레이시나가 온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분노뿐이었다.

‘시, 시선이 칼날 같다.’

온몸이 난자당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아…….”

결국 레이시나는 클로드의 엄청난 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다.

“쯧.”

클로드는 혀를 차고는 제 쪽으로 축 늘어지는 레이시나를 옆으로 툭 밀어뜨렸다. 그리고는 곧장 빈센트의 품에 안겨있는 라티아를 돌아봤다.

“…….”

레이시나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았으니 제가 무서울 법도 한데, 라티아는 마치 영웅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클로드는 표정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시나가 괘씸하여 뜻대로 표정이 지어지지 않았다. 굳은 뺨만 쓸어내리고 있는데, 라티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에게 증거가 있어요.”

“무슨 증거.”

레이시나를 향한 분노가 꺼지지 않아, 클로드의 말투는 무척 냉랭했다. 그러나 라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후작가를 통으로 무너뜨릴 증거요.”

* * *

글라델리스 후작 일가를 원고로 세운 귀족 재판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라티아가 창밖 두툼한 나뭇가지에 던져 둔 증거들과 레이시나에게 손찌검을 당하던 현장 덕분이었다.

“이거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너 소속이 어디야!”

레이시나가 알아서 하리라 믿고 황성에서 여유롭게 와인을 즐기던 알버스는 황성 기사단들에게 포박되어 질질 끌려왔다.

“흐아앙…….”

엘레네는 울면서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런 알버스의 뒤를 따랐다.

“…….”

클로드의 살기를 이기지 못해 실신했던 레이시나도 재판장으로 향했다.

황성에서 쉬던 귀족들은 이 엄청난 사건에 눈을 빛내며 늦은 시간임에도 대부분 재판장으로 향했다.

“그 글라델리스 후작가에게 뒷모습이 있을 줄이야…….”

“어느 사람이든 그림자가 있는 법이죠.”

“전 장녀가 딱해 죽겠어요. 그렇게 혹독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가문과 상단을 위해서 일하다니요?”

“후작도 참 뻔뻔하기도 하지! 오늘 그 영애 자랑을 얼마나 했습니까?”

재판장을 꽉 메운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여 알버스를 욕했다. 하지만 몇몇의 귀족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알버스에게 약점이 잡힌 이들이었다.

‘젠장, 내 약점은 어떻게 되는 거지?’

‘후작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들켰나?’

‘그걸 들키면 우리 가문은 끝장이다!’

그들은 다른 귀족이 말을 걸어도 태산 같은 걱정에 어색하게 웃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레오나르도 황제와 에메르나 황비가 들어왔다. 이런 자리에도 황후가 아닌 황비를 대동했다는 게 어떻게 보면 황제도 참 순애보였다.

귀족들이 황제 부부의 눈치를 살폈다. 황비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황제는 아주 분노하고 있었다.

‘영웅의 아들이 학대를 당했으니 화가 날만도 하지.’

‘오늘 얼마나 치하했어. 그런데 이렇게 그의 아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던 사실이 밝혀지다니.’

‘황성의 태도도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좋은 이미지에 일조했잖아? 그런 그가 뒷모습이 있었다니.’

‘황성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군.’

귀족들은 제각기 황제가 분노한 이유를 예상했지만, 그중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글라델리스 후작, 그놈의 서재에 있는 치부책은 어떻게 됐지?’

알버스는 귀족의 약점을 아주 많이 모아 뒀는데, 그중에는 황제의 최측근도 있었다.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황제의 어머니, 선황후의 비밀이었다.

선황후는 아들인 레오나르도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남편인 선황제에게 사특한 주술을 걸었다. 선황제가 말년에 갑자기 이지가 흐려지고 노망이 나, 선황후가 정무를 본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걸 들켜서는 곤란한데.’

하이페디움 제국에서는 흑마법이나 흑주술이 아주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황제가 그 금지된 마법으로 즉위했다는 게 밝혀지면 황권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황제는 어머니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글라델리스 후작가에 몰래 황성 마법사를 파견하여, 서재에 마법도 걸어 줬었다.

‘황성 마법사가, 그것도 수석 마법사가 건 마법이 대체 어떻게 뚫린 거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이것을 파고들 때가 아니었다.

‘사형만은 막아야 한다.’

알버스는 아주 고약하고 치졸한 성정의 사내다.

‘놈은 절대로 혼자 죽지 않을 것이야.’

기억나는 대로 모든 약점들을 떠들어 대며 재판장을 떠날 게 분명했다. 약점을 잡힌 귀족이 한둘이 아닐 테니, 귀족 사회에 불온한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 중엔 나의 사람도 있을 터.’

황권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들마저 잃으면 여간 곤란해지는 게 아니다. 하여, 레오나르도는 이번 재판에서 어떻게든 알버스를 두둔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

“아니…….”

“어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기사들에 의해 호송되고 있는 글라델리스 후작 일가들은 모두 입에 재갈을 물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귀족에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리 죄인으로 고발당했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 심한 처사예요.”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재판소의 경위가 외쳤다.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하지만 후작이라는 귀족을 포박하다 못해 입까지 막은 건 너무 과한 처사라, 소란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정숙해 주십시오, 여긴 신성한 천칭의 아래 죄를 묻는 자리입니다!”

재판소의 경위가 몇 번이나 외친 후에야 그 소란은 잦아들었다.

알버스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 레오나르도가 한 소리 하려던 때였다.

“재판관님 드십니다.”

드디어 이 귀족 재판의 판결을 맡을 재판관이 들어온 것이다.

재판, 그것도 귀족 재판이 열리는 동안에는 황제도 재판관을 찍어 누를 수는 없었다. 하이페디움 제국의 문양은 은색 천칭이다. 그건 이 나라의 주신인 정의의 신, 디케가 들고 있는 저울이었다. 요컨대 재판장 내에서 재판관은 정의의 신, 디케의 대리인이므로 황제보다 높다는 뜻이다.

때를 놓친 레오나르도는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가만히 재판장, 빈센트를 바라봤다.

‘하필이면 빈센트 올리비온즈일 게 뭔가.’

빈센트는 디케가 가장 사랑하는 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공명정대한 판사로 유명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의를 외치고 죽을 노인이니, 내 명령이라 하더라도 듣지 않을 테지.’

알버스 또한 빈센트가 자신의 재판관인 걸 확인하고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흠…….’

레오나르도는 아까와는 달리 알버스가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그가 약점을 떠벌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해서, 레오나르도는 귀족 재판이 시작되는 모습을 엄중히 지켜봤다. 이는 약점이 잡힌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흐읍, 읍……!”

알버스는 후작인 제가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편을 들어 주지 않자 당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 섣불리 알버스의 편을 들었다간, 그에게 약점이 잡혀있다는 게 들통난다. 숨길 만한 약점이 있다 밝혀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알버스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사색이 됐다.

‘아, 이것들이 내 입이 막혀 약점을 폭로할 수 없단 걸 알고 지켜보고만 있는 거구나!’

알버스는 어떻게든 재갈을 벗으려 몸부림을 쳤지만, 번번이 기사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사이 재판이 시작되었다.

빈센트가 안경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증인이 학대받은 피해자 본인이고 피고인이 현장에서 검거되었으므로 항변을 거부합니다.”

“읍, 으읍……!”

알버스가 부당하다는 듯 몸부림쳤지만, 참작될 리가 없었다.

“진술 시작하세요.”

빈센트가 말하자, 곧장 클로드가 나섰다.

“알버스 글라델리스 후작은 8년 전부터 제국 전역에 걸쳐 대소규모의 불법 격투장을 운영하여 연간 약 900억 골드 이상의 수익을 내고 탈세했습니다.

불법 격투장엔 격투 노예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오갈 곳 없는 고아, 또는 인신매매, 납치 사건의 피해자였습니다.

이는 노예제도를 철폐한 현 제국의 법률상 명백한 불법이며, 황명을 어긴 모독죄 및 대역죄에 해당합니다. 증거로 알버스 글라델리스의 서재에서 찾은 이 장부를 제출합니다.”

귀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불법 격투장, 그것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10여 년 전부터 황실이 가장 신경 써서 단속하던 도박 중 하나였다. 그런데 버젓이 운영이 되고 있던 것으로도 모자라, 연간 900억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탈세했다니! 황가의 1년 품위유지 비용이 1000억 골드 언저리인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다.

“또한 알버스 글라델리스는 상습적으로 아동을 학대해 왔습니다. 본인, 라티아 글라델리스와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를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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