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클로드는 황성 경매 전야 파티를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트라이던트 해적단을 데리고 한 재판관을 찾아갔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다마다요. 무역을 떠난다 할 때는 걱정이 많았는데, 건강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그 친구의 낯을 볼 면목이 섰습니다.”
그는 클로드와 안면이 있는 사이로, 선대 라움디셀 백작과는 가까운 친우였다.
“라움디셀 백작…… 아니지, 이제는 공작이군요. 공작 각하의 영웅담은 벌써 전해 들었습니다.”
이는 황제에게 언질을 들었다는 말이었다. 재판관은 지체 없이 황명에 따랐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은 클로드와 해적단 앞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비록 약탈을 일삼았지만 끝내는 교화되어 반성하고, 해적단 소탕 및 최초의 해상 무역로 개척이라는 혁혁한 공로에 이바지한 것을 참작하여 트라이던트 해적단들의 죄를 사하고 하이페디움 제국민으로 인정한다. 이는 재판관 빈센트 올리비온즈의 판결이며 동시에 황명이므로 그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사면은 대표로 해적단의 선장이었던 헥터가 받았다. 이로써 헥터를 비롯한 트라이던트 해적단은 더 이상 해적 난민이 아닌 하이페디움 제국민이 되었다.
이후 재판관인 빈센트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전야 파티에 아들이 참석했다고요. 바로 그곳으로 돌아갈 겁니까?”
“아뇨. 아들과 제대로 재회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두 손 무겁게 하고 갈 겁니다.”
클로드가 서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두 손을…… 무겁게 하고 간다고?”
대체 무엇으로? 영문을 모르겠는 클로드의 말에 눈가에 다정한 주름이 진 빈센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군.’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건만, 위험천만한 바다 생활은 클로드의 붉은 눈동자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눈가의 자상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클로드가 짙은 눈썹 밑,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해서, 재판관님. 재판관님께서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 재판관님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그 순간 빈센트는 어쩐지 이 제국에 아주 두려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별로 좋은 예감은 아니구나. 상당히 섬뜩해.’
이는 수많은 재판을 열고 판결을 내리며, 많은 범죄자들을 마주한 재판관의 감이었다. 하지만 빈센트는 클로드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혈혈단신으로 무역을 떠날 때도 천칭의 눈총이 두려워 늙은 몸을 사렸던 대가를 치르지요.”
재판관 자리는 그 누구보다 공정한 이가 앉아야 하는 자리인 만큼 중립을 지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점이 없어야 했고, 약점이 없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공명정대하게 대해야 했다.
‘설령 친우의 아들이 가난에 허덕이다 사지로 가겠다 결심했다 하더라도, 부채관계가 있어서는 안 됐지.’
빈센트는 클로드가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무사히 돌아온 데다가 영웅까지 된 지금, ‘도움’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것이 위조나 위증이라 할지라도.’
빈센트는 법복을 벗을 각오를 다지고 클로드와 함께 했다.
클로드는 지체하지 않고 트라이던트 해적단을 이끌고 곧장 글라델리스 후작가로 향했다. 목적지를 알게 된 빈센트는 어쩐지 조용히 분노를 태우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생각했다.
‘모두들 파티에 참석했다 들어, 후작저엔 지금 아무도 없을 텐데?’
의아했지만 생각해 보니 클로드의 아들인 카르시안이 현재 글라델리스 후작저에 의탁하고 있었다.
‘먼저 짐을 챙기려는 모양이구나.’
빈센트는 클로드에게 다 생각이 있겠거니 싶어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잠자코 그를 따랐다. 하지만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도 놀라서 나와 보는 시종인 한 명 없는 건 너무 의아했다. 때마침 위층에서 큰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시종들이 전부 다 저기에 몰려 있나 본데요.”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클로드와 빈센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하! 아무것도? 너같이 천한 피가 흐르는 것이 하는 행동은 안 들어도 뻔하지, 도둑 고양이 같은 것!”
충격적이게도 그 고귀하고 신사적인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안주인, 레이시나가 가문의 장녀를 학대하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장녀는 이런 손찌검이 익숙한 듯 울거나 빌지도 않고 그저 겁에 질려 있기만 했다. 그 가슴 아픈 모습에 빈센트의 갈색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런데 클로드는 이 현장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가 비릿하게 말했다.
“아주 고맙습니다. 내 아들을 어떻게 학대했는지 보여 줘서.”
클로드가 레이시나를 제압하여 그녀가 라티아를 내동댕이쳤을 때처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꺅!”
레이시나는 꼭 라티아처럼 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인이 받기에도 큰 충격인데, 라티아처럼 어린아이의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갔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레이시나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라티아가 휘청거렸다.
“영애!”
빈센트는 바닥에 엎어진 채 덜덜 떨고 있는 라티아에게로 얼른 달려갔다.
‘분명 예리엘 만물 상단주와 전야 파티에 참석했다 들었는데…….’
소문의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가 왜 후작저에 있는지, 어째서 레이시나에겐 뭇매를 맞고 있었는지 물어볼 게 산더미였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아이에게 물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충격적인 장면에 빈센트의 나이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이 어린 영애는 얼마나 놀랐을꼬.’
안쓰러운 마음에 빈센트는 라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바닥에 부딪혔는지 머리엔 혹이 나 있었고, 곱게 빗은 머리칼은 헝클어져 손가락에 걸렸다. 아이의 몸이 성인에 비해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는 빈센트는 화가 났다.
“어떻게 자신의 딸에게 이런……!”
그에게도 딱 라티아만 한 손녀가 있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레이시나 같은 아동학대범에 학을 뗐다.
“아동 학대 현장의 현행범으로 지금 당장 귀족 재판에 세우겠습니다. 재판관, 빈센트 올리비온즈가 증인으로 설 것입니다!”
귀족 재판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도 레이시나는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인데.
‘재판, 재판관이라고?! 내가 지금…… 재판관의 앞에서……!’
라티아를 때리려는 걸 아주 훤하게 들켰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아, 아…….”
레이시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라티아는 저를 조심스레 살피는 빈센트를 돌아봤다.
‘사, ……산 건가?’
사형대에 서기 전에, 레이시나의 손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라티아는 아직도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놀란 몸이 경기를 일으키듯 틱틱 튕기며 발작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그런 라티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 달래 줬다. 그 손길은 라티아에게는 없는 할아버지처럼 따스해서, 그제야 공포로 얼어붙었던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빈센트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이런 일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겁니다. 내, 재판관 인생의 명예를 걸고 저 추악한 여인을 엄벌에 처할 겁니다.”
빈센트는 아주 자상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라티아를 달랬다. 라티아는 그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들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파도처럼 몰려와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 무렵 서재 밖에서 트라이던트 해적단들이 외쳤다.
“저택 고용인들을 전부 포박했습니다!”
그 우렁찬 목소리 사이로 고용인들의 겁에 질린 신음이나 울음이 간간이 섞여 들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걸까? 클로드에 의해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킨 레이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어, 억울합니다. 오해가 있습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들어 주세요.”
“오해?”
클로드의 분노는 극에 치달은 탓에 오히려 표정이 지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직 그렇게 화가 나진 않은 모양이야.’
하지만 레이시나는 클로드가 지은 무표정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제게 변명할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다.
“네, 지금 보신 건 너무 단편적입니다. 저는 저것, 저 악랄하고 못된 것이 저지른 죄를 알아차리고 훈육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저것은 사실 제 딸이 아닙니다. 사생아로…….”
“훈육?”
클로드는 레이시나의 주절거림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고 물었다. 그에 레이시나는 잠시 울컥했지만 이내 다시 납작 엎드린 태도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간 라티아는 카르시안 영식을 괴롭혔습니다. 정확히는 라티아‘만’ 카르시안 영식을 괴롭혔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라티아를 말렸지만, 천한 피가 섞여 너무도 악랄한 탓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 아가씨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에 해적들에 의해 포박된 수잔이 외쳤다. 험상궂은 해적이 두려울 법도 한데, 수잔은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클로드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런데 저기에 있는 여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아닙니다! 저 계집은 바로 이 악랄한 사생아의 유모입니다. 천한 것들끼리 어울리는 겁니다. 거짓말을 고하고 있는 거예요!”
레이시나의 말 덕분에 클로드는 수잔이 편지에 등장한 라티아의 유모라는 걸 알아차렸다. 클로드가 수잔을 턱짓하자, 해적이 그녀를 놓아줬다. 해적이 수잔을 풀어 주자 레이시나가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클로드를 올려다봤다.
“어, 째서……?”
하지만 클로드는 레이시나에게 대답해 주는 대신 되물었다.
“그래서, 역부족이어서?”
클로드가 호응하는 듯 보이자, 레이시나는 당혹감을 감추고 더욱 열성적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셨단 걸 알고 라티아 저것이 카르시안 영식을 괴롭힌 증거를 감추기 위해 후작의 서재를 뒤지고 있었……!”
그런데 너무 신난 탓일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피식, 클로드의 비웃음이 레이시나의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