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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51화 (51/186)

51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이시나는 충격에 소리를 꽥 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받을 충격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그러면, 그러면……!”

그간 카르시안을 괴롭혔던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고약한 녀석이 우리를 가만둘 리가 없어! 분명 제 아비에게 전부 고자질했을 거야!’

그런데 그의 아비인 클로드가 현재 제국의 위상을 드높인 영웅이 됐다. 요컨대 레이시나는 지금 영웅의 아들을 학대한 역적이 될 수도 있다.

‘어떡해, 어떡해?!’

레이시나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인과에 짓눌려 바들바들 떨었다.

얼마나 떨고 있었을까? 레이시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간…… 진짜 죽을지도 몰라!’

지금 제국민은 물론 황제도 클로드가 달성한 업적에 흠뻑 취해 있다. 이 흥취를 이어 나가기 위해 가장 좋은 건 ‘권선징악’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악’은 카르시안을 괴롭힌 후작저 사람들이었다. 외도한 알버스에게 화가 나서 친정에 있을 때가 아니었다. 레이시나는 다시 알버스가 쓴 전서를 읽었다.

[가정은 원래 위기를 극복하며 더욱 단단해지는 법 아닌가, 나의 사랑.]

“그래, 후작님의 말대로 행복에는 역경과 고난, 시련이 따르지.”

사실 레이시나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게 무척이나 슬펐다.

‘그 멍청한 라티아가 베티를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이 슬픈 기분을 몰랐을 텐데!’

가문을 이용해서 후작 자리에 앉혀 줬더니, 알버스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은 레이시나의 가슴을 무척 아프게 했다. 해서, 레이시나가 품은 분노의 화살은 이 사실을 알게 한 라티아에게로 향했다.

‘이 일을 잘 넘기면 다시 우리 가정은 화목해질 거야.’

레이시나는 알버스와 8여 년간 생활하며 큰 다툼 한 번 없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레이시나의 사고방식과 알버스의 사고방식이 비슷하단 것.

‘라티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자.’

어차피 천한 출생의 사생아다. 천것이 천한 짓을 배워 후작저를 휘젓고 다니며 카르시안을 괴롭히고, 선동했다고 하면 된다.

‘후작저엔 지금 아무도 없어. 그러니 내가 이…… 열쇠로 서재로 들어가서 증거를 인멸하면 그만이야.’

레이시나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 위에 올려진 열쇠를 보며 섬뜩하게 웃었다.

‘이걸 나에게 줬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 결국 후작님이 기댈 곳은 나와 우리 가문이란 뜻이지.’

유사시에 기댈 수 있는 가문이란 뜻은 곧 실세란 뜻이다. 레이시나는 그간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이 서재의 열쇠를 받은 것으로, 알버스를 용서하기로 했다. 라티아가 악녀라며 여론을 몰이하는 건 무척 쉬울 것이다. 그간 폄하해 온 라티아의 평판도 있었고,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무척이나 신사적인 가문이라 아는 권세가도 많았다.

‘우리에게 이로운 증언을 해 줄 자들은 차고 넘쳤어. 그러니 우리 가족은 괜찮을 거야.’

생각을 마친 레이시나는 곧장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 * *

아버지의 서재를 뒤진 지도 벌써 20분 째.

아버지가 불법 격투장을 운영했다는 증거는 빠르게 찾았지만, 귀족들의 약점은 아직 찾지 못했다. 황성 연락책이 왔다는 수잔의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된 후, 버틀러는 연속적으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아가씨! 어서 나오십시오! 후작님의 서재에 들어갔다는 게 들키면 정말 위험합니다!”

“아, 글쎄! 라티아 아가씨는 서재에 안 들어가셨다니까, 그러네!”

“그럼 왜 다들 여길 지키고 있는건가!”

“아가씨는 아까 후, 후원으로 갔어요! 약초를 찾으러요!”

“삐륵, 삐르륵!”

버틀러가 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수잔과 삐로리를 비롯하여 어느새 나타난 길버트까지 애를 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밖에서 난 소란에 내 불안감만 더 커졌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람!

마음이 너무 급해서 손도 덜덜 떨렸고, 아버지에 비해 내 키는 너무 작아서 사다리를 끌고 다니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다.

아버지의 서재는 2층부터 3층까지 층을 터서 만든 아주 큰 도서관 같았다. 책장이 많고 높은 데다가, 거기에 꽂힌 책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원작에선 분명 ‘명부’ 같은 거라고 했으니, 이 책들 사이에 숨겨 뒀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명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책을 일일이 다 꺼내 봐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을 허비했을까? 불안해서 턱까지 덜덜 떨렸을 무렵.

“찾았다!”

드디어 행운의 신께서 내 손을 들어 주셨다. 하지만 불행의 신도 나의 손을 들어 준 걸까?

“마, 마님!”

수잔이 지금 이 순간,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불렀다.

“어, 어떻게 여길……!”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게 이상한가? 그런데 자네들은 대체 뭔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친정에 갔던 어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하필 왜, 지금?!

도망쳐야 한다는 건 아는데,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애당초 어디로 도망치지?

이 서재는 아버지의 성임과 동시에 나의 감옥이었다. 난 여기서 꼼짝 없이 독 안에 갇힌 쥐 신세였다.

이때였다. 노련한 집사장, 버틀러가 나섰다.

“그, 그것이. 탈출한 이 새가 여기까지 날아왔습니다. 수잔은 이 새를 잡으러 왔다는데, 워낙 날쌔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마님. 새나 쥐를 잡는 데엔 제가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길버트까지 적절하게 나서 줬다.

“새? 그러고 보니 저 새는 날쌔게 도망다니며 베티의 얼굴을 엉망으로 긁긴 했지.”

다행히 어머니도 그럭저럭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그럼 새를 잡았으니 이만 가 보게.”

“예? 아, 저…….”

길버트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달그락, 달그락. 어머니가 자물쇠를 만지는 소리가 났다.

“어머, 이상하네. 자물쇠가 왜 안 열리지? 이 열쇠가 분명한데.”

어머니의 말에 난 숨을 집어삼켰다. 열쇠가 있단 소리는 즉, 아버지에게 받았단 뜻이다.

그럼…… 지금 어머니도 클로드가 돌아온 걸 알고 있겠네?!

이렇게 태평하게 겁에 질려 얼어붙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황급히 몸을 숨기거나 탈출할 곳을 찾아봤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서재는 2층 끝 방이었다. 책은 직사광선을 피해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창가에는 높고 울창한 정원수도 심어져 있었다. 어쩌면 정원수를 타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황급히 아버지의 약점들을 챙겨 창문을 열어 봤다.

“하, 다행이다.”

안에서 여는 건 마법으로 따로 막혀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창문 바로 옆에 심어진 정원수는 활엽수여서 내 몸을 던진다고 해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일단 넓적하고 큰 가지 위로 아버지의 약점들을 던져 숨겼다. 풍성한 잎사귀가 잘 막아 줬다.

이제 나만 탈출하면 되는데, 그 순간.

“……너 뭐야!”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어머니가 들이닥쳤다.

헉, 안 돼!

난 황급히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와 내 발목을 콱 움켜쥐었다.

“꺄악!”

꼭 귀신에게 발목이 잡힌 것처럼 무서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났다.

“너 뭐야! 너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야! 설마 밖에 사람들이 있던 이유가……!”

어머니는 재빨리 상황파악을 마치고는 내 발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줬다. 헨델에게 붙잡힌 손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당장 이리 오지 못 해, 이 쥐새끼 같은 것! 대체 어떻게 숨어든 거지?”

“아악!”

어머니는 나를 잡아당겨 그대로 서재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온몸이 부딪치며 숨이 턱 막혔다.

“헉……!”

뒤통수도 부딪치는 바람에 순간 눈 앞이 까맣게 점멸했다가 다시 시야가 돌아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 내 머리채는 어느새 어머니의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또 뭘 훔치려고!”

“아, 흐윽…….”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어머니는 내 머리채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두피가 뜯겨 나갈 것같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것, 도……!”

“하! 아무것도? 너같이 천한 피가 흐르는 것이 하는 행동은 안 들어도 뻔하지, 어디에 숨겼어. 네가 훔친 것, 어디에 숨겼냐고!”

어머니는 나를 때리려고 반대쪽 손을 높게 들었다. 그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이대로 뺨을 맞으면 찢어질 게 분명했다.

“힉……!”

난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이것 참, 고맙군. 나 여기에 있으니 잡아가 달라고 소리를 치고 학대를 하는 현장까지 고스란히 보여 줘서.”

깜짝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섬뜩한 목소리는 버틀러나 길버트,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설마.

난 꽉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나를 내리치려는 어머니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바로 카르시안의 아버지인 클로드가 말이다.

“일이 수월해지겠어.”

그가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차갑게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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