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황성 경매 전야 파티에 초청받아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황성에서 하루 객으로 묵는 영광을 누린다. 이는 황제가 베푸는 은혜로, 거절하면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게 된다.
그 탓에 알버스는 클로드가 돌아왔다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직면했지만 후작저로 돌아가지 못했다. 알버스가 돌아가지 못하니, 엘레네도 당연히 오늘은 황성에서 꼼짝없이 묵어야 했다. 하지만 라티아는 아니었다.
“제가 아가씨의 대역을 세울게요.”
“그리고 나도 황성에 남아 네가 있는 척할게.”
시엘과 카르시안이 함께 말을 맞춰 주기로 한 것이다. 라티아는 후작저로 돌아가 알버스가 저질렀던 불법 격투장 운영이라는 죄와 귀족의 약점을 모은 걸 회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라움디셀 공작님께서는 분명 후작저를 용서하지 않으시겠죠. 그러니 이때 한 번에 벌을 받게 하고 싶어요.’
카르시안과 시엘은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라티아는 완전히 안심했다. 카르시안이 자신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것만 완벽하게 준비하면, 난 죽지 않아.’
라티아는 굳게 다짐하며 시엘의 도움으로 황성을 빠져나가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고작 7살짜리에게 맡겨 두기엔 너무 중대한 임무였지만,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라티아’다.
두 사람은 라티아가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같은 시각, 알버스는 안내받은 객실에서 뭐 마려운 개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클로드 그놈이 정말로 돌아올 줄이야!’
알버스와 클로드의 인연은 꽤 깊었다. 두 사람은 10살 남짓한 무렵에 처음 부모님의 소개로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움디셀 백작가는 아주 부유했지.’
하지만 클로드와 사랑에 빠진 아이샤. 카르시안의 어머니인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라움디셀 백작가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아이샤는 무척 유서 깊은 공작가의 외동딸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순식간에 수많은 빚을 떠안았다.
‘그리고 클로드를 아이샤를 사랑하여 이 빚을 대신 갚아 주느라 백작가의 재산을 대부분 탕진했지.’
당시에는 이플란트 백작 영애였던 에메르나가 아이샤에게 사특한 주술을 걸어 보증을 서게 했다는 등 소문이 많았다. 에메르나는 클로드를 오랫동안 짝사랑하여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등, 흑마법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메르나는 곧 황제의 후궁이 되었기에 이 소문은 불식됐다.
‘흥, 황제의 총애를 얻은 이가 대체 뭐가 부족하여 가난한 백작인 클로드 따위를 탐내겠어.’
문제는 라움디셀 백작가가 이렇게 망한 후에도,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신사적인 이미지 때문에 클로드를 버릴 수 없었단 거다.
‘그 재수 없는 클로드 자식을 비웃어 줄 수도 없었지!’
제국에서 손에 꼽게 잘생긴 클로드는 어릴 적부터 못 하는 게 없었다. 해서, 글라델리스 선대 후작은 툭하면 알버스와 클로드를 비교하기 일쑤였다.
‘클로드는 네 살에 검술 초식을 뗐다더라.’
‘클로드는 열 살에 아카데미 최연소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더라.’
‘클로드는 열다섯 살에 오러를 발현했다더라. 그것도 현 오러 중 최강인 붉은색 오러를!’
‘클로드는 여섯 살에 만난 약혼자, 아이샤와 벌써 결혼한다던데 넌 벌써 몇 번째 파혼이냐!’
요컨대 알버스에게 있어서 클로드는 콤플렉스의 집합체였다. 그렇기에 클로드가 가난 때문에 지옥 길과 다름없는 무역을 하러 바다로 가겠다고 했을 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대쪽같이 뻗대기만 하던 놈이 드디어 죽는구나!’
하지만 카르시안이라는 짐을 얻게 되어 아주 통탄했다.
‘뭐, 그거야 내 기분 풀이로 삼으면 그만이었지만.’
아무튼 그동안 알버스는 클로드가 죽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오늘, 충격적이게도 클로드는 살아 돌아오다 못해 공작까지 되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카르시안은 분명 클로드에게 그동안 제가 어떤 푸대접을 받았는지 낱낱이 이야기할 것이다.
‘지금 클로드는 영웅이 됐다.’
신사적인 가문이 그냥 아이도 아니고 영웅의 아이를 학대했다는 소문은 분명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지금 알버스는 황성에 발이 묶여 저택으로 돌아가 방법을 강구할 수도 없었다. 알버스가 객실로 받은 스위트룸의 거실을 열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아빠, 엄마는 이 사실을 알까요?”
이제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엘레네가 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 순간 알버스는 천사를 조우한 것 같았다. 머리에서 종소리가 뎅뎅 울리며 이 최악의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 아직 레이시나가 밖에 있지!’
라티아는 레이시나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레이시나는 영특하니 라티아에게 카르시안이 행한 학대를 모두 뒤집어씌울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레이시나가 끌어안고 사탕 몇 개만 주면, 라티아는 자신이 전부 앞장서서 벌인 일이라 증언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 발을 뺄 수 있게 된다!’
이후 귀족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여론을 몰면, 라티아만 엄벌에 처하는 걸로 끝날 수도 있다.
“아! 엘레네, 역시 내 딸은 너밖에 없구나!”
알버스는 곧장 전서구를 불러와 레이시나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 * *
라티아가 탄 황성 마차가 글라델리스 후작저의 정문을 넘었다. 그것을 본 수잔과 삐로리는 곧장 그녀를 맞이하러 현관으로 나왔다.
“아가씨, 일찍 오셨네요?”
“삐륵?”
분명 전야 파티는 황성에서 하루 자고 오는 것이 관례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의아해서 물었건만, 라티아는 지금 자세히 대답해 줄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급하게 말했다.
“카르시안의 아버지가 돌아왔어!”
“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수잔과 삐로리를 지나쳐 황급히 알버스의 서재로 향했다.
‘거기에 모든 게 다 있을 거야!’
불법 격투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증거인 장부도, 알버스가 잡은 귀족들의 약점도, 모두! 라티아는 얼른 서재의 문을 잡아당겼지만, 덜컹!
“잠겼잖아?”
서재는 당연하게도 잠겨 있었고, 열쇠는 알버스가 챙겨갔을 게 분명했다. 라티아가 발만 동동 구르는 때에, 집사장인 버틀러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니, 아가씨! 혼자서 돌아오신 겁니까?”
“버틀러! 혹시 아버지 서재의 열쇠가 있어?”
“예?”
느닷없는 소리에 버틀러는 황망하게 눈만 끔벅였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재에 걸린 잠금쇠는 마도구입니다. 이 마법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하나뿐으로, 그건 후작님께서 들고 다니십니다.”
라티아는 초조해졌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시엘이 있었다면 마법으로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지금 황성에서 라티아의 대역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저택 내엔 따로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있다 한들 라티아를 도울 리도 없었다.
문만 노려보던 라티아는 생각했다.
‘……차라리 문을 부술까?’
도끼로 내리치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서재가 어떤 곳인데, 알버스가 손을 써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버틀러가 정중하게 물었지만, 라티아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카르시안의 아버지가 돌아왔으니 우리는 이제 몽땅 죽은 목숨이라, 아버지를 팔아 살아남으려고 한다는 말을 집사에게 어떻게 해?’
심지어 그는 이 글라델리스 후작가를 40년이나 모셔온 충신이다. 아무리 라티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지만, 40년을 바친 알버스도 살리기 위해 증거 자체를 인멸하려 들지도 모른다.
라티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였다.
[라티아! 서재에 들어가려는 거지?]
라티아의 방에 다녀온 건지, 동물어 번역기 목걸이를 착용한 삐로리가 포르르 날아왔다.
“어, 응!”
삐로리는 라티아의 수호천사다.
‘뭔가 방도가 있나?’
라티아가 눈을 빛내고 있을 때, 삐로리가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잠깐 뒤돌아 있어 봐. 내가 발톱으로 열어 볼게!]
발톱으로 여는데 왜 뒤를 돌아야 할까? 의문이 생겼지만, 라티아는 이내 삐로리가 자신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응, 알았어!”
그래서 라티아는 삐로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버틀러가 둘을 저지했다.
“아가씨 잠깐만요.”
버틀러가 황급히 라티아와 삐로리의 앞을 가로막아 문을 사수하려 했지만, 수잔이 더 빨랐다.
“집사장님! 현관에 황성 연락책이 온 것 같던데요?”
사실은 라티아가 타고 온 황성 마차였지만, 수잔은 기지를 발휘했다.
“뭐라고?”
아니나 다를까 버틀러는 갈등했다.
서재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후작의 명령을 듣는 것과 황성의 연락책을 맞이하는 것 중 뭐가 더 무거운가? 고민은 짧았다.
“현관엔 내가 나가 보겠네. 자네는 라티아 아가씨를 말려 주게. 서재엔 절대로 들어가면 안 돼, 후작님께서 경을 칠 거야! 아가씨가 위험해진다고!”
버틀러는 달려 나가면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 소리에 저택의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며 서재 쪽으로 모여들었지만, 이 또한 수잔이 눈을 부라려 다들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사이 달칵. 삐로리는 천사의 신성력을 써서 잠긴 자물쇠를 열었다.
‘흥, 꽤 고난이도 마법이었지만 내가 못 열 정도로 어려운 마법은 아니지.’
이 마법은 황제가 보내 준 황성 마법사가 건 것이지만, 삐로리는 신을 앞둔 천사.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삐로리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어서 들어가 봐, 라티아!]
“고마워!”
라티아는 황급히 알버스의 서재로 뛰어들어갔고, 수잔은 그 서재 앞을 청소하는 척하며 망을 봤다. 삐로리 또한 수잔의 곁에서 함께 망을 봤지만 어째선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급하게 일을 처리하다가 실수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삐로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번 일로 라티아가 ‘삐로리 좀 수상한데?’ 하고 생각하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내가 수호천사라는 걸 들키면, 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삐…….”
삐로리는 걱정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알버스의 서재 문을 바라봤다.
그 무렵, 알버스가 황성에서 쓴 전서가 레이시나의 손에 닿았다.
“뭐? 라움디셀 백작이 돌아와? ……공작이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