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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47화 (47/186)

47화

그러나 아쉽게도 그 재밌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나설 새는 없었다. 팡파르가 울리고 황성 경매 전야 파티를 빛내러 황제가 행차했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영원한 하늘이자 광휘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를 비롯한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고, 황제는 우리를 보며 권력을 즐기다가 고개를 들라 했다. 그의 곁에는 황후도 아니고 총애받는 황비, 에메르나가 있었다.

총애받는 황비라고 하더니, 과연 그 미모가 남달랐다. 헨델의 금발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화사한 허니 블론드는 크리스탈과 각종 보석을 뿌려 반짝반짝 오팔처럼 빛나게 했고,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눈을 뗄 수 없이 고혹적인 느낌이 들었다.

황제의 사랑을 권력 삼아 귀족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도도한 고양이 같았다. 게다가 오프숄더 드레스 위로 드러난 살결은 또 얼마나 하얀지! 과연 제국을 아우르는 최고의 미녀로 손꼽힐 만했다.

“다들 파티는 잘 즐기고 있는가.”

“폐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파티를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가 운을 떼자 귀족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아부를 했다.

황제의 나이는 이제 서른 중반쯤일 텐데도, 얼굴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일 만큼 굉장히 젊어 보였다. 잘 빗어 넘긴 은발에선 은은한 푸른 기가 돌았고, 총명한 녹색 눈동자는 지혜로워 보였다.

피부는 에메르나 황비 못지않게 좋았고, 체격은 기사처럼 좋았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에는 황제의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어딘가 한 끗이 서늘한 눈매에선 냉혹한 성정이 엿보였다.

원작에서 말하길, 저 황제는 여색에 무척 약하다고 했다. 강건해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말이다.

황제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 아주 귀하고도 반가운 소식이 있다네.”

“반가운 소식이라니요?”

“그게 대체 뭘까요?”

황제가 한마디 할 때마다 귀족들은 종달새마냥 떠들어 댔다. 그 사이로 보이는 마담 아리엔느의 눈가엔 미묘한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귀족들의 술렁거림을 만끽한 황제가 문을 보며 말했다.

“들라.”

입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묵직하게 들렸다. 해서, 모두가 그곳을 향해 돌아봤는데 거기엔.

“세상에……!”

“아니, 어떻게……!”

호기롭게 무역을 나갔던 가난한 백작, 클로드 라움디셀이 서 있었다. 그것도 양옆과 뒤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험상궂은 해적들을 데리고!

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클로드를 바라봤다.

카르시안보다 한층 더 짙어, 한밤중의 바다같이 새까만 머리칼에 샹들리에 빛이 비치자 희미한 푸른색이 감돌았다.

그 밑의 적색 눈동자는 마치 신선한 혈액 같았고, 왼쪽 눈에 세로 모양 흉터가 생겨 서늘한 눈매가 더욱 매서워 보였다.

웬만한 귀족들보다 큰 키는 뭘 걸쳐도 태가 날 듯했고,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몸을 단련한 건지 무척 단단해 보였다. 서른 중반인데도 황제보다도 더 젊어 보이는 얼굴에선 고귀한 야성미가 물씬 느껴졌다.

“아, ……아버지?”

카르시안의 부름을 들은 걸까?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는 클로드가 눈동자만 굴려 카르시안을 돌아봤다. 일순간 클로드의 얼굴에 지독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마치 당장이라도 카르시안에게 달려와 아들과 감동의 상봉을 이루고 싶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명을 듣고 들어온 사람. 황제 먼저 알현해야 했다.

클로드는 밑단이 날카롭게 찢어진 흰색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위풍당당하게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어깨 부근에 달린 금색 완장의 수술이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클로드의 뒤로 얼굴과 온몸에 흉터가 가득하고 걸음걸이마저 불량한 해적들이 껄렁하게 따라 들어갔다. 휘익, 해적 중 누군가가 번쩍번쩍한 무도회장과 치장한 귀족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난 그들을 보며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아니…… 3년 뒤에나 와야 하는 아저씨들이 왜 지금 나와요……?

* * *

한 달 전.

클로드는 오랜만에 아들, 카르시안의 편지를 받았다.

“수고했다.”

“고작 그런 말이 다인가요? 그간은 마법약이 흐려져서 잘 못 왔던 거라니까요? 화 그만 풀고 나 좀 봐 줘요.”

세이렌이 몸을 꼬며 말했지만, 클로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오랜만에 접한 아들의 소식만 궁금해할 뿐이었다.

지난 3개월간, 어찌 된 일인지 편지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클로드가 먼저 편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바다는 세이렌의 고향이자 주 서식지다. 여기서 섣불리 세이렌을 부르는 마법약이 발라진 편지를 썼다간, 수백 마리의 세이렌이 몰려올 게 뻔했다. 해서, 세이렌 편지는 내륙에서 보낸 편지를 들고 온 세이렌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읽고 답장을 적어 올 테니.”

“네에, 알았어요.”

세이렌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로드는 곧장 선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엔 클로드에게 교화된 트라이던트 해적단의 선장이 있었다.

“오, 편지가 왔어? 오랜만인데!”

헥터가 보석을 닦다가 아는 척을 했다.

그는 해적단의 선장답게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고, 선명한 태양에 탄 검은 피부와 대비되는 하얀 머리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흰자가 삼면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마치 맹수처럼 샛노랬고,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는 입매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는 짐승처럼 뾰족했다.

“어디 봐, 봐. 우리 조카가 뭐라고 보냈나 궁금하네.”

헥터가 카르시안을 ‘조카’라고 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카는 무슨 조카.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야 널 습격했을 때부터지!”

클로드의 핀잔에 헥터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헥터는 속도도 느리고 화력도 좋지 않은 소형 범선을 타고 무역길에 오른 클로드를 습격했었다. 하지만 클로드의 배에는 마땅한 선원도 없었고 값이 나가는 물건도 없었다. 헥터는 혀를 차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클로드가 말을 건넸다.

‘왜 나를 죽이지 않지? 다른 선원들도 그렇고. 하다못해 술도 약탈하지 않는군.’

제압당한 클로드가 그를 무신경하게 바라봤다. 헥터는 그 무심한 말투에 호기심이 동했다. 헥터가 선장으로 있는 이 트라이던트 해적선은 아주 악명이 높았다. 모두들 저만 보면 총을 겨누거나 겁에 질리기 마련인데, 클로드는 마치 헥터를 기다렸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뭐야, 꼭 죽여 달라는 것처럼 들리네? 죽여 줘?’

‘아니, 악명에 비해 그 행동들이 시시해서 묻는 말이다.’

‘시시하다고? 이 몸이?’

헥터는 어이가 없어 기가 찬 표정으로 클로드를 훑어봤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낡았지만 분명 귀족의 것이었다.

‘제아무리 콧대 높은 귀족이라 해도 내 앞에서는 살려 달라 눈물, 콧물 빼기 일쑤인데.’

클로드는 눈에 피가 들어가서 눈을 뜨기도 어려우면서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말했다.

‘이 바다에 나온 이상 한 번쯤은 해적을 만날 거라고 예상했지. 하지만 다행이야, 내가 뺏길 게 없는 상태에서 만나서.’

‘뭐어?’

‘난 앞으로도 뺏길 게 없을 테니, 다음에 나를 또 만나거든 지나치길 바라.’

‘흠, 마치 지금은 뺏길 게 없지만 나중엔 많다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 그러니 주변 해적들에게도 내 배는 건드려 봐야 시간 낭비라고 전해 주면 고맙겠군.’

클로드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헥터는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헥터에겐 별명이 아주 많았다. 세기의 해적, 역사상 가작 끔찍한 해적, 바다의 악마, 포세이돈도 포기한 인간 등…….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클로드는 그런 헥터를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이건…… 농담인가? 참 나, 뭐 하는 놈인데 이렇게 대담해?’

그것에 관심이 가서 클로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후 헥터가 클로드에게 물었다.

‘야, 너 내가 누군 줄은 아냐?’

‘선장인 줄 알고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었는데, 말단이었다면 내 운은 여기까지군.’

그 특유의 뻔뻔하면서도 능글맞은 말투는 전혀 귀족적이지 않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클로드의 이런 화법은 헥터 본인을 ‘척결해야 할 해적’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끼게 해 줬다. 비록 그게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라 할지라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헥터는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일까? 헥터는 처음 본 클로드에게 좀처럼 꺼내지 않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사실 헥터가 해적질을 하고 있는 데엔 사정이 있었다. 그에게 딸린 식솔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태생이 고아였던 헥터는 해적의 노예로 팔려갔지만 운 좋게 항해사로서의 능력을 발견해 인정받았다. 그렇게 한 해적단의 항해사가 되었지만, 자신처럼 부모에게 버려져 팔려 가는 아이들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해서, 헥터는 아이들을 구해 무인도라고 알려진 섬에서 살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생겨, 해적단에서 쫓겨났고 이후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만든 게 이 트라이던트 해적단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트라이던트 해적단에 입단하려면 몇 가지 특이한 맹세를 해야 했다.

1. 아이와 노약자는 건들지 말 것.

2. 걸어 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되 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말 것.

3. 한 번 턴 배는 연속적으로 털지 않을 것.

4. 되도록 사상자를 내지 말 것.

해적단의 입단조건치고는 아주 이상했지만, 트라이던트 해적단은 이 맹세를 아주 잘 지켰다.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트라이던트 해적단에 입단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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