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46화 (46/186)

46화

그 모습은 마치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라티아가 뚜렷하게 드러낸 속내에, 그들을 주목하고 있던 이들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정말 이플란트 영식이 손찌검을 했나 봐요.”

“글라델리스 영애는 보호자인 예리엘 만물 대상단주께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분이잖아요.”

“그런 글라델리스 영애가 이렇게 동요하시다니…….”

“이플란트 영식을 보고 겁에 질린 것 같은데,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소?”

“네, 저도 그렇게 보여요. 세상에나. 영애가 딱하네요.”

“첫 파티라고 들었는데, 놀랐겠어요.”

라티아의 주변에 서 있는 영애들은 물론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까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헨델은 진짜 억울했다.

‘내가 뭘 했다고!’

손목에 멍을 들게 한 건 자신의 잘못이 맞지만, 넘어진 건 라티아가 아니다.

‘난데, 넘어진 쪽은 나인데!’

헨델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헨델은 5살에 검술 초식을 뗐다. 그런데 가난하기로 유명한 라움디셀 백작가 영식에게 그렇게 꼼짝없이 제압당했다 말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훈련했기에 그렇게 재빨랐던 거지?’

카르시안은 말과 함께 일하면서 말 뒷발에 채이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순발력이 길러졌다. 그걸 모르는 헨델은 카르시안이 괴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헨델로만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플란트 백작과 그의 부인이 라티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때 라티아는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알버스와 눈이 마주치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아버지를 봐서 안도한 얼굴이었다.

이를 본 알버스는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조금 전까진 우리가 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군!’

알버스는 한달음에 라티아의 곁으로 와서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라티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세상에, 손목에 이게 다 뭐냐!”

그 모습은 제 몸을 낮출 정도로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 같았다.

“큼…….”

조금 전까지 알버스에게 역정을 냈던 이플란트 백작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엇하느냐. 사과드려라.”

이플란트 백작이 헨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라티아가 영 껄끄럽다는 듯 눈을 내리뜨자 영애들이 그녀의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싸며 말했다.

“영애, 괜찮아요.”

“많이 놀라셨겠지만, 곁에 저희들이 있는걸요.”

라티아는 오늘 처음 파티에 참석했으면서 완전히 군림하는 모양새였다. 달리 말하면 지금 이 상황 속에, 헨델의 편은 없단 것이다. 헨델은 입술만 잘근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존심이 무척 상해 끝말이 떨렸다. 헨델이 라티아를 다치게 했기 때문에, 이플란트 백작과 알버스의 입장도 바뀌었다.

“고작 이런 사과 한마디로……!”

알버스가 큰 소리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라티아는 적정선을 알았다.

‘모든 건 과유불급이지.’

해서, 라티아는 저를 위해 진심으로 화내 주는 아버지에게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알버스의 손을 꼭 잡았다. 라티아가 만류하자 알버스도 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우리 가문의 신사적인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는 게 낫겠군. 그러려면 대인배처럼 용서를 하는 모습도 보여야 해.’

어떻게 해야 더 효과적으로 여론을 몰고 갈 수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아, 이플란트 영식. 저는 괜찮아요. 진심을 담아 사과해 주시다니 기뻐요.”

라티아의 말에 용서해 줘서 고맙다며 이플란트 백작과 그의 부인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하여, 라티아는 여기서 정말로 그만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엘레네였다.

“헨델 님? 어째서 언니에게 고개를 숙이시는 건가요?”

어느새 사람들 무리에 섞여 있던 엘레네가 눈치도 없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녀는 헨델이 제가 아닌 라티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헨델 님은 왕자님이야. 공주님은 엘레네라고. 엘레네가 아닌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이건 있을 수 없어!’

엘레네는 어서 일어나라며 헨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째서 몸을 숙이시는 거죠? 헨델 님이 설령 언니를 좀 다치게 했다고 하더라도, 헨델 님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심지어 편을 들어 주는 건지, 멕이는 건지 모를 말만 늘어놓았다.

헨델은 짜증이 울컥 솟았다. 이제 끝날 일인데, 엘레네 때문에 다시 불거지게 됐으니 말이다.

“오히려 사과는 언니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헨델 님께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다니요!”

엘레네는 제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라티아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논점을 완전히 잘못 짚은 엘레네 덕분에 그녀의 평판이 더욱 나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분통이 터지는 건 알버스뿐이었다.

‘저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구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알버스는 속으로 씩씩거리며 멍청한 엘레네를 쏘아봤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엘레네는 몇 번이고 헨델에게 라티아 탓을 했다.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한 헨델이 쏘아붙였다.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으십시오! 그 괴상한 드레스를 입고 왔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가 낸 큰 소리에 엘레네의 눈이 휘둥그레 뜨이더니 이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헤, 헨델 님…….”

헨델은 그런 엘레네를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 앞에서 가식을 떨던 성질머리를 고스란히 들켜 아주 창피했다.

이플란트 백작 부부는 곤란한 얼굴로 사람들을 힐끔거리다가 얼른 헨델을 따라갔다. 이 일에 관심을 가졌던 모두가 엘레네를 애잔하게, 또는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리고 라티아에겐 약간의 동정과 칭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모자란 동생을 두어 고생이 많겠어요.’ 하는 표정들이었다.

오늘 하루만으로 라티아는 엘레네와의 입지를 완전히 뒤바꿔 버린 셈이었다.

* * *

파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플란트 백작가와 글라델리스 후작가 사이에서 있던 일들은 서로의 잘못을 묻어 두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사실 애초부터 엄청 대단하게 일을 키울 생각도 아니라서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보고 있어? 이제 엘레네한테는 아무도 안 가.”

케이크를 가져온 카르시안이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난 카르시안에게서 케이크를 받아들며 대답했다.

“그렇겠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활약을 해 줬으니까.”

덕분에 엘레네와 나의 입지가 뒤바뀌고, 아버지 안의 생각도 전복된 것 같다.

“우리 라티아는 말입니다, 하하하!”

내가 다친 이후, 다시 사교계에서의 입지를 되찾은 아버지는 아까부터 내 자랑만 늘어놓기 바빴다. 하지만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어 했던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내 손목과 발목은 상황이 정리될 무렵, 시엘이 치료해 줬다. 애초에 다치지 않았으니 치료해 준 척만 한 거지만 말이다. 덕분에 나는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예리엘 만물 대상단주가 나를 애지중지한다는 소문이 돌아, 영애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나에게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소문을 들었습니다, 영애. 상단의 제2 관리자를 맡고 계신다면서요?”

“이렇게 어린데 대단하군요.”

“후작님의 말로는 암산으로 여덟 자리 수까지 계산이 가능하다던데요.”

“주판이 있으면 열 자리까지 완벽하다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군요.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장녀를 두고 왜 차녀를 재상가의 티파티에 보내서 창피를 당했…….”

“쉿,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아요.”

어른들은 어린 영애들 못지않게 나와 다정다감하게 이야기를 해 줬다. 아버지는 내가 자신의 딸이라며 어른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또 카르시안이 그들에게 ‘허튼소리’를 할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도 있었다.

힐끔 본 카르시안은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귀족들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고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걸 내세우며 나를 꼬드기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다음엔 우리 가문의 티파티에 와 주세요.”

“제게 영애만 한 차녀가 한 명 있습니다.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쿠키는 좋아하나요? 이번에 새로 데려온 파티쉐의 실력이 무척 뛰어나답니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님하고는 어떻게 만났나요? 부디 자리에 와서 이야기해 주길 바라요.”

난 그들에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영광이에요. 모두 참석하고 싶으니, 저택으로 정식 초대장을 보내 주세요.”

내 이름을 적어서, 아버지가 엘레네로 바꿔치기도 못 하게요.

뒷말은 쏙 삼켰지만, 어른들은 내 대답이 아주 흡족한지 만족스러워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인파의 행렬은 정말 끝이 없었고, 슬슬 지치려고 하던 참이었다.

“어머!”

한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새빨간 화염같이 붉은 머리칼,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와 매혹적인 화장, 눈 밑의 야릇한 눈물점까지. 단 한 번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 남자들을 다 홀려버릴 만큼 유혹적으로 생긴 여인이었다.

씁, 내가 원작에서 분명 이 묘사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누구였더라?

살짝 눈썹을 찌푸린 때, 내 옆에 서 있던 영애들이 말했다.

“마담 아리엔느예요.”

“마담 아리엔느요?”

“네. 코르티잔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은 정보와 소문을 꽉 쥐고 있는 암흑 정보상이라는 말이 있어요.”

“암흑 정보상…….”

아! 기억났다! 원작에서 카르시안을 공격하다 꼬리가 잡혀 괴멸 위기에 처했던 그 암흑 길드, 튜베로즈의 수장!

영애들의 소문대로 마담 아리엔느는 정보와 소문을 꽉 잡고 있는 가십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마담 아리엔느는 사교계에 굉장히 능숙한 사람이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큰 소리를 냈던 걸까요?”

마담 아리엔느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얼른 테라스로 빠져나갔다.

흠, 뭔가 냄새가 난다. 그것도 아주 재밌는 냄새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