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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45화 (45/186)

45화

내가 소곤거리는 척 다 들을 수 있게 낸 목소리에, 영애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리‘도’……?”

“그럼 다른 곳도 다쳤다는 건가요……?”

영애들도 저들끼리만 들리게 속닥거렸다. 날 훑어보는 시선이 바빴다. 난 그녀들에게 나를 내던지듯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그리고 원작 속에서도 헨델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영식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물론인 데다가 총애받는 황비의 조카라는 자리는 그를 다른 사람들이 더욱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그런 만큼 헨델에게는 소위 말하는 ‘팬클럽’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손찌검하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난 절뚝거리는 걸 감추기 위하는 척 카르시안에게 가냘프게 기댔다. 카르시안이 긴장한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나와 장단을 잘 맞춰 줬다.

“괜찮아? 그쪽 손은 다쳤으니까 이쪽으로…….”

그러며 내 손을 잡아 검붉게 손자국이 난 손목까지 슬쩍 영애들에게 보여 줬다.

얘 좀 봐?

괜히 남주는 아닌 듯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내 손목에 남은 멍은 누가 봐도 카르시안의 손보다는 작아 보였다. 테라스에 있던 사람은 나와 카르시안 그리고 헨델뿐. 내 손목에 멍을 남긴 데다가 넘어뜨려 다리까지 삐끗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확실해졌다.

“어쩜…….”

“그렇게 안 봤는데…….”

저들끼리 쑥덕거리던 영애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카르시안에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라움디셀 영식?”

“글라델리스 영애는 저희가 부축할 테니, 의자를 좀 가져와 주시겠어요?”

“다리를 다친 분을 서 있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카르시안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 오는 영애들이 낯설 법도 한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시안이 내 손을 영애들에게로 넘겼고, 난 비틀거리며 그녀들의 부축을 받았다.

“금방 가져올게. 조금만 기다려.”

“아, 고마워.”

카르시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를 찾으러 갔고, 난 나를 부축한 영애들을 돌아보며 나른하게 눈을 내려 떴다.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친절이라뇨.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죠.”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파티는 이제 시작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다들 제각기 나를 걱정하는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난 그녀들에게 멋쩍게 웃고는 아픈 척하고 있는 발목을 슬쩍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말을 아끼는 모습에 영애들이 나를 ‘어른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까 엘레네에게 대놓고 ‘정신 이상자’가 아니냐고 직설적으로 말했던 영애가 이번에도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플란트 영식도 정말 너무하군요. 그렇게 안 봤는데, 영애를 밀쳐 넘어뜨리게 한데다가, 이런 폭력까지 저질러 놓고 사과 한마디 없다니요?”

“게다가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는 이플란트 영식의 약혼자 가족이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영애들이 대신 분통을 터트려 주고 있는 사이, 카르시안이 한 시종을 시켜 의자를 들고 왔다. 시엘도 놀란 얼굴로 가까이 왔다.

“아, 예리엘 대상단주님…….”

한 영애가 놀라서 아는 척을 하자, 시엘은 그녀에게 싱긋 웃어 줬다. 영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의자에 앉자, 시엘이 내 앞에 공손하게 물었다.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인가요?”

“아…….”

난 주위를 한 번 힐끔거렸다. 마침 다른 어른들의 시선도 이곳으로 많이 몰려 있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좀…… 복잡해서요.”

사실 시엘의 표정을 보고 카르시안에게 사정을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가 헨델에게 되갚아 주려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있었다. 요컨대 시엘은 지금 내게 장단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었다.

기실 파티장 안에도 쉬는 곳은 있다. 파우더룸이나, 벽 쪽의 의자 또는 테라스가 바로 그런 곳이다. 하지만 난 일부러 파티장의 적당한 구석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주변엔 영애들에, 예리엘 대상단주인 시엘까지 있다. 어른들의 관심이 몰리다 못해 대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들 것이다.

“저 영애는 아까 영식과 함께 테라스에 있던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안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제 부모님 옆에서 혼자 씩씩거리고 있는 헨델에게 물어봐서 말이다. 관심을 좋아하는 헨델은 관중을 좀 모은 후에야 ‘아니 글쎄……!’ 하고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이미 선수를 쳤다.

환생 전에 배웠던 생활팁 중 하나는 교통사고가 나면 일단 드러누우란 거였다. 아니면 핸들에 머리를 박고 빠아앙 하는 클락션 소리가 쨍하게 울리게 놔두든가. 그렇게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후 조리하는 게 더 쉽다.

난 한숨을 내쉬며 팔걸이에 올려 둔 손목을 조물조물 주무르는 척 소매를 슬쩍 걷었다. 멍이 든 손목이 똑똑히 보였다. 그에 이플란트 백작은 물론 백작 부인까지 놀라 헨델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설마 네가 한 짓이니?”

“네가 저 영애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냐?”

“아, 전……!”

이플란트 백작의 물음에 헨델은 입만 벙긋거렸다.

원작에서 읽기로, 이플란트 백작은 굉장히 청렴결백한 데다가 깨끗하고 올곧은 인물이었다. 이플란트 가문과 아내를 사랑해서 데릴사위가 된 후에도 가문이나 재산 문제가 한 번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남자가, 제 아들이 한 영애를 폭행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엘레네의 복장 때문에 창피를 당했던 아버지도 놀라서 우리를 쳐다봤다. 난 아버지가 엘레네 때문에 당한 창피를 내게 뒤집어씌울 걸 알고 있다.

듣자 하니, 오몽 살롱의 큰손이 황제라지?

그럼 오몽 살롱을 모욕한 건 황제를 모욕한 것이라 비춰질 수도 있다. 또 에메르나 황비와 자매인 이플란트 백작 부인이 헨델과 엘레네의 약혼을 파기하려고 할 수도 있고. 이대로 있다간 아버지는 에메르나 황비에 대는 연줄을 잃게 되니, 나에게 짜증을 부릴 것이다.

하지만 때마침 헨델이 나한테 손찌검을 했네? 아버지, 사생아라 무시했던 제가 아버지께 여러 번 효도를 하네요.

난 속으로 씩 웃으며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분한 얼굴로 내게 걸어오는 헨델을 바라봤다.

* * *

헨델은 억울했다.

라티아하고는 잠깐 대화를 나눌 생각뿐이었다. 엘레네의 언니는 소문으로만 들었지, 처음 봤다.

‘어린 나이인데도 정신 이상자라느니,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느니…….’

무성한 소문에 비해 마주한 모습은 너무도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이 아니었다. 괴상한 몰골의 엘레네를 보고 난 뒤여서 그런 걸까?

‘좀…… 예쁘네.’

라티아의 총명한 보라색 눈동자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헨델은 처음, 엘레네가 라티아에게 패악질을 부릴까 봐 ‘걱정되어’ 라티아를 따라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몰래 숨어서 듣고 있자니 라티아가 마냥 약하고 착한, 천사 같은 아이가 아니란 걸 알았다.

‘엘레네를 완전히 잘 다루잖아……?’

엘레네는 바보같이 라티아가 저를 농락하는 줄도 모르고 놀아나고 있었다. 그게 무척 새로웠다.

‘그 패악질을 부리는 엘레네를 이렇게까지 다루다니.’

라티아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듣자 하니 오몽 살롱이 망했다고 말한 건 정말 글라델리스 후작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엘레네가 나오기에, 헨델은 얼른 커튼 뒤로 숨었다. 훔쳐본 라티아는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무척 귀여운 작은 악마 같기도 했다. 천사에서 악마를 넘나드는 영애라니, 이런 매력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헨델은 말을 걸었을 뿐이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하고.

보통 제가 이렇게 선뜻 말을 걸면 영애들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라티아는 아니었다.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묘하게 나른한 표정으로 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표정에 괜히 초조해졌다.

‘나를 반기지 않나?’

설마, 그럴 리가.

라티아와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헨델의 뜻과 달리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럼 이만 가 보겠어요.”

라티아가 그렇게 말하며 지나치려고 한 것이다. 헨델은 기가 찼다.

‘감히 날 몰라? 그리고 날 무시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헨델은 곧장 라티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자신을 더는 무시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변모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울려 주겠어.’

저 예쁘게 방긋거리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꽤 볼만할 것 같기도 했다.

‘울면 손수건을 주면서 달래 줘야지. 그럼 나에게 반하겠지.’

헨델은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꽉 줬다. 이제 겨우 7살이지만 다섯 살 때 검술 초식을 뗀 천재다. 악력만큼은 9살, 10살 못지않았다. 하지만 라티아는 울지 않았다.

‘뭐, 뭐야?’

오히려 더 심드렁하고 귀찮다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당황하던 사이 카르시안이 나타나고, 볼썽사납게 나자빠져 울음을 터트린 건 헨델이었다.

‘그런데 왜 나더러 사과를 하라고 하는 거야!’

헨델은 영애를 괴롭혔냐며 저를 다그치는 아버지를 보며 씩씩거렸다.

‘아직도 어깨랑 팔이 아픈데!’

하지만 선수는 라티아가 쳤다. 여기서 제가 ‘사실은 나도 피해자다!’라고 나서 봐야 볼품없다. 지금도 벌써 영애들은 헨델을 실망한 눈빛으로 보고 있지 않나.

“이러다간 너와 엘레네 영애의 약혼을 제대로 파기하지도 못해. 우리도 책 잡힐 일을 하면 어쩌니!”

어머니의 꾸짖음에 헨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사답게 가서 사과하고 오너라.”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헨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여기선 신사답게 사과를 인정하고, 잘못을 비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나을 거야. 그럼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모습에 다시 이미지도 회복되겠지.’

헨델은 그렇게 생각하며 라티아에게로 향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계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헨델의 속을 고스란히 꿰뚫어 본 라티아가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움찔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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