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놀라서 고개를 드니 그곳엔 일면식 없는 영식이 있었다.
꿀이 흐르는 것같이 웨이브가 진 짧은 금발,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하얀 얼굴, 그리고 사파이어가 떠오르는 파란색 눈동자. 마치 동화책 속 왕자님처럼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그가 테라스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우습냐고 물었잖아, 내가.”
‘내가’에 악센트를 주며 말하는 것도 꼭 오만한 왕자를 연상케 해, 어찌 보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난 저런 타입이 딱 질색이다. 환생 전의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남자는 사근사근한 맛이 있어야 한다는 걸 지론으로 세웠다.
난 좀 심드렁해져서 말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본인을 소개하지도 않는 분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는 것이 저희 가문의 가르침이어서요.”
“뭐?”
“그럼 이만 가 보겠어요.”
난 영식에게 간단하게 인사하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영식은 날 보낼 생각이 없는지, 내 손목을 탁 낚아챘다.
그가 비웃는 목소리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하, 신선하네?”
무슨 어린애 힘이…….
난 내 손목을 꽉 틀어잡고 있는 영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그 주위가 벌써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울어?”
“뭐?”
“안 우냐고. 아프잖아. 안 아파? 이래도?”
영식이 더 세게 힘을 줬다. 아하, 얜 내가 아프다며 엉엉 울길 바란 모양이다. 난 기가 찼다.
“너.”
“너어?”
영식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반말이야?”
“그러는 넌 내가 누군 줄 알아?”
“알아, 글라델리스 후작가 첫째 딸이잖아.”
그런데도 나한테 반말을 찍찍 한다고?
이 파티에 글라델리스 후작보다 잘난 집안은 꽤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패악을 부리고도 용서를 받을 만한 가문’은 얼마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에메르나 황비의 외가인 이플란트 백작가가 있긴 한데……. 아, 잠깐만.
난 조금 노기를 담고 있는 영식의 얼굴을 살펴봤다. 깨끗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 싱그러운 외모에서 묘하게 풍기는 사나운 분위기.
너구나. 엘레네의 약혼자가.
난 그를 똑똑히 노려보며 말했다.
“나도 알아. 너, 엘레네의 약혼자잖아. 그러니까 이름이, 헨델…… 이었나?”
“허, 알면서도 나한테 반말을 찍찍 한다고?”
“안 될 거 있어? 너도 하는데.”
“난……!”
헨델이 뭐라 소리를 지르려던 때였다.
“악!”
그가 별안간 뒤로 나동그라졌는데, 그 바람에 내 손목도 놓쳐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밀쳐져 내 손목을 놓치는 바람에 나동그라졌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카르시안이었다.
“너 뭐야? 너 뭔데 라티아 손목을 잡, ……이게 뭐야.”
내 손목엔 이미 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카르시안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험상궂어졌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헨델을 돌아보는 대신 나를 살폈다.
“괜찮아? 더 다친 곳은 없어?”
“아, 응. 다른 곳은 괜찮아.”
“저택으로 가면 멍 빠지는 연고를 바르는 게 좋겠어.”
마치 카르시안은 헨델이 있다는 것조차 까먹은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이건 헨델에게 아주 제격인 복수였다.
“익…… 야!”
헨델의 이모는 에메르나 황비다. 현 황제의 가장 큰 총애를 받는다는 그 황비. 그러니 헨델은 어디를 가도 이목을 집중 받았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무시라니! 화가 나도 단단히 날 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헨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카르시안은 지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만 살피고 있었는데, 헨델이 그에 대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카르시안!”
내가 놀라서 부르자 카르시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헨델이 내지르는 주먹을 잡아 뒤로 확 꺾어 버렸다.
“아악!”
카르시안이 헨델을 제압한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헨델의 주먹을 잡아 등 뒤로 가서 팔을 꺾었다. 헨델의 푸른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파! 아프다고!”
헨델이 발악을 했지만 카르시안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파?”
오히려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고작 이런 걸로도 아프다고 엄살을 피울 만한 맷집이면, 다른 사람도 건들지 말았어야지.”
이게 10살의 목소리가 맞아?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았을 텐데 너무 낮아 깜짝 놀랐다.
“너……!”
“약해 빠졌기는.”
헨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려보자, 카르시안은 그를 비웃으며 놓아줬다. ‘약해 빠졌다’는 말에 헨델의 얼굴에 충격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너, 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아?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날 이렇게……!”
헨델이 욱신거리는 팔을 움켜쥐고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 듬뿍 비웃으며 말했다.
“눈물이나 닦고 말해.”
“익……!”
“그리고 날 모함하고 싶으면 해.”
“하! 모함? 너는 폭력을 저지른 거야!”
헨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악을 썼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난 헨델에게 벌써 검붉게 울혈까지 생긴 손목을 들어 보였다.
“이건 폭력 아니고 정중한 인사니?”
“그건…… 내, 내가 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어?”
“네 손자국이랑 비교해 보면 알겠지. 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덕분에 지금 밖에선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 여긴 나와 너, 그리고 얘뿐이지.”
카르시안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헨델이 정말 해코지를 할까 봐 말을 바꿨다.
“얜 우리보다 월등히 커. 손도 그렇지. 그럼 손자국을 비교해 봤을 때, 내 손목에 남은 멍은 누구의 손과 꼭 맞을까?”
헨델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는 힐끔 테라스 밖을 살폈다. 내 말대로 테라스 밖에서는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궁금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어서 자세한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듯 보이지만, 일단 ‘소란’이 일었다는 건 알 터.
“나가서 외쳐 봐. 우리가 널 때렸다고.”
“…….”
“나도 네가 먼저 나에게 폭력을 저질렀고, 얘가 날 구해 주는 과정에서 네가 발버둥 쳐서 다친 거라고 하면 되니까.”
헨델이 아랫입술을 아득 물고 뇌까렸다.
“이대로 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래, 그럼 뭐. 기대라도 하고 있을까? 사교계에서 ‘왕자님’으로 통하는 네가 오늘 처음 만난 영애인 내게 이렇게 끔찍한 폭력을 저지른 후, 영애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지?”
헨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와 카르시안을 번갈아 보며 씨근덕거리다가 테라스를 박차고 나갔다.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이 헨델의 주위로 다가갔지만, 헨델은 성질만 부릴 뿐이었다. 난 그걸 보며 픽 웃었지만, 카르시안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어떻게 된 거야?”
“응? 뭐가?”
“다른 영식들이랑 이야기하다가 네가 안 보여서, 저 영애들에게 물어보니까 엘레네와 여기로 들어왔다잖아.”
카르시안의 입에서 ‘엘레네’라는 이름이 나오자 또 기분이 이상하게 가슴이 수런거렸다.
“와 보니까 너랑 엘레네랑 이야기 중이기에 기다렸는데, 엘레네가 나온 후에도 나오지 않아서.”
카르시안이 눈썹 사이를 와락 찌푸리며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웬 놈팽이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잖아. 어떻게 된 거냐고. 쟨 누구야?”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어. 쟤한테 반말 따박따박 하면서 쏘아붙이고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쟨 이플란트 백작 영식이야. 놈팽이가 아니라, 엘레네 약혼자.”
“아, 그 이플란트 백작.”
그의 명성은 카르시안도 아는지 아는 척을 했다. 그가 내게 물었다.
“근데 나는 왜 숨겨?”
“응?”
“왜 쟤한테 내가 라움디셀 영식이라고 밝히지 않았냐고.”
카르시안이 ‘내가 창피해?’ 하고 묻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난 화들짝 놀라 변명했다.
“아니! 그야! 쟤는 엘레네의 약혼자잖아! 그 총애받는 황비의 조카라고. 괜히 입김이 들어와서 네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리게 되면 어떡해.”
“……내가 후작저에서 쫓겨날까 봐 말하지 않은 거라고?”
“혹시나 싶어서.”
“하지만 네 파트너로 들어왔을 때 모두가 내 이름을 들었으니까 조사하면 다 알 텐데?”
“쟤 씨근덕거리느라 당장은 조사할 생각 못 할걸? 그사이 시엘 선생님하고…….”
“난 싫었어.”
“……응?”
“네가 쟤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거, 난 싫었다고.”
카르시안이 얼굴을 찌푸리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냥 이름 불러. 쟤, 얘, 이렇게 하지 말고.”
“……너도 아까 나한테 ‘너’라고 했잖아. 엘레네는 ‘엘레네’인데.”
“그럼…….”
카르시안이 내 손을 조심스레 놓고 잘 정돈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나도 라티아라고 할게. 너도 카르시안이라고 해.”
그럼 됐지. 하고 카르시안이 콧김을 내쉬며 턱짓했다. 난 그를 보다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카르시안이 엘레네의 이름을 부르며 수런거렸던 가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래, 좋아. 알았어, 카르시안.”
내 대답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카르시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가자, 라티아.”
“응.”
난 카르시안의 손을 잡고 다시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영애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오는 게 보였다.
카르시안이 내게 속삭였다.
“근데 저 자식은 그냥 저 대로 둘 거야?”
“응?”
“이대로 없던 일로 할 거냐고.”
카르시안이 내 손목을 눈짓했다. 난 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당연히 다 까발릴 건데?
내 표정에 카르시안이 ‘그럼 그렇지’ 하고 피식 웃었다.
난 영애들이 지척에 다가오자 환한 얼굴로 그녀들에게 다가가려다가 비틀거렸다.
“아앗.”
“괜찮아?”
카르시안이 나를 얼른 부축해 줬고, 영애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녀들에게 들릴락 말락, 카르시안에게만 속삭이듯 말했다.
“아…… 고마워. 아까 이플란트 영식 때문에 넘어졌더니 다리‘도’ 삐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