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난 영애들의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아버지와 엘레네가 있을 곳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나를 황망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하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얼어붙어 나에게 다가올 생각도 못 했다. 난 그들에게 일부러 생긋 웃어 주고는 다시 영애들에게 집중했다.
영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와는 초면인 것 같네요.”
“어머나, 저도요.”
“저도예요. 그간 뵙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죠?”
영애들이 나를 향해 눈을 빛냈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요지는 그거였다.
이 파티가 나의 인생 첫 파티라는 것.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태 파티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냐는 것.
“그럼 라움디셀 영식이 약혼자이신 건가요?”
“그러고 보니 글라델리스 후작님과 라움디셀 백작님은 친우 사이라고 하셨죠.”
내게 약혼자가 없어 ‘하자’가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진짜냐는 것.
그리고.
“그런데 참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요.”
“그러게요. 물론 저희는 휘둘리지 않았지만요.”
“그럼요. 첫 번째 영애께서 예민하시다니, 이렇게 우아하신걸요.”
내게 정말 정신적인 문제가 있냐는 것.
솔직히 난 속으로 좀 놀랐다. 이번 생에서는 엘레네가 호냥이를 괴롭힌 사건을 막았으니, 나에게 ‘정신 이상자’라는 소문은 돌지 않을 줄 알았다.
“후작 영애께서 예민하셔서 약혼자가 모두 도망…… 아니. 긴밀한 사이로 발전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역시 다 헛소문이었던 거죠?”
“하지만 이상하네요. 그 소문은 분명 글라델리스 후작님이 승마 클럽에서 하신 이야기라고…… 아, 아니에요.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죠.”
한 영애가 눈치를 주자 얼른 말을 바꿨다.
아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난 명실상부한 후작가의 첫 번째 영애다. 그런데 약혼자도 없다니, 분명 의문을 가진 귀족들이 아버지에게 물어봤을 거다. 그에 아버지는 내가 성격이 괴상해서 약혼자들이 모두 도망가,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했나 보다.
그렇게 이미 정신 이상자라는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 엘레네의 범죄를 내가 뒤집어쓰게 된 거겠지.
날 향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는 어린 나이에 희대의 악녀가 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고작 7살인 내게 정말 너무하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이렇게 날 휘감은 소문을 다 알게 된 것도 기회다.
하나하나 다 타파해야지.
일단 카르시안부터.
“라움디셀 영식은 제 약혼자가 아니에요.”
“네? 정말요?”
“어머, 의외예요. 잘 어울리셨는데요.”
영애들이 놀라 부채를 팔락거리며 말했다. 난 그녀들에게 조금 애달프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가문에 남길 바라세요. 혹시 이야기 들으셨나요? 저는 글라델리스 상단의 제2 관리자거든요.”
“네에?”
“그게 사실인가요?”
어지간한 귀족들은 대부분 상단을 갖고 있다. 거상이나 쓸만한 상단으로 키우는 건 별개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해서, 귀족의 자녀들은 일단 상단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도는 필수로 배워야 했다.
다시 말해, 내가 말한 이 ‘제2 관리자’의 직책이 얼마나 높은지 다 알고 있단 소리지.
이 ‘제2 관리자’는 보통 안주인이 맡는다. 돈을 만져야 하고, 장부를 적는 등 ‘재산’에 관여하는 건 모두 안주인의 역할이니까. 요컨대 내가 ‘제2 관리자’라는 말은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실질적인 안주인이란 소리다.
그런데 안주인은 보통 부인이지 않나?
“그럼 후작 부부가 이혼하신다는 소문이…….”
“아아, 그게 정말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처음부터 이혼하실 생각이어서, 첫 번째 영애를 관리자로 키운 걸지도…….”
그래, 내가 ‘제2 관리자’라는 말은 부인이 현재 자리를 비우고, 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단 뜻이다. 영애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제가…… 가문과 상단 외의 일에 관심을 두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최근엔 더욱이요.”
“아, 어쩜…….”
“이혼한다는 소문이 정말인 모양이군요.”
난 애매한 표정만 지어 보였지만, 영애들은 이미 확신을 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귀족이 이혼하면 데릴사위가 아닌 이상, 보통 부친이 양육을 도맡는다. 가문과 재산 문제 등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장녀가 살림을 물려받는다.
근데 조금 전, 내가 제2 관리자가 되었고 최근 아버지는 내가 다른 일에 관심 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 이건 이혼설에 쐐기를 박은 거나 다름없다.
난 의젓한 장녀처럼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기에 카르시안 영식은 제 약혼자가 아니에요. 그저, 제 부탁에 따라와 주신 다정한 분이시지요.”
“그렇군요.”
“저 같았어도 영애를 도왔을 거예요.”
영애들이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렇게 해서 내게 약혼자가 없는 이유와 부모님의 이혼설의 진위 여부를 해결했다. 그리고 카르시안과의 사이에서 돌 수도 있는 추문도 손 써 뒀으니, 남은 건 내가 정신 이상자란 소문이다. 그런데 이건 내가 딱히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언니, 잠깐 엘레네랑 이야기 좀 해.”
조금 전만 하더라도 얼어붙어서 내게 올 생각조차 못 했던 엘레네 본인이 직접 행차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이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날 둘러싸고 있던 영애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길을 내어 줬다. 엘레네는 그녀들의 뒤에 있었는데, 영애들이 비켜서자 고맙단 인사도 한마디 없이 내게 다가왔다. 단단히 화가 난 듯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열 손가락에 다 낀 반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런 엘레네를 부드럽게 타박했다.
“엘레네, 대화 중인 영애들께 실례잖니.”
“됐고, 엘레네랑 이야기 좀 하자니까?”
나는 굉장히 우아한 데에 비해, 엘레네는 버르장머리 없이 굴고 있다. 이런 단편적인 모습만 봐도 ‘소문의 그 영애’는 내가 아니라 엘레네라는 생각에 힘이 실릴 터. 난 엘레네의 이런 행동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가까스로 한숨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애석하다는 듯 예사롭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자매를 보고 있는 영애들에게 말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네, 얼마든지요.”
“다녀오세요.”
그녀들은 아주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우리를 보며 나를 배웅해 줬다. 난 엘레네의 뒤를 따라 테라스로 나가, 문을 닫았다.
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엘레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다른 영애들이 놀라잖아. 실례고, 예의가 아니야.”
“지금 엘레네를 혼내는 거야?”
난 잠시 입을 다물고 주위의 소음에 집중했다. 다행히 지금 테라스에 나와 있는 사람은 우리뿐인 것 같다.
“혼내는 게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거야. 하지만, 뭐. 상관없어. 네가 계속 그렇게 굴수록 내게 좋을 뿐이니까.”
“뭐라는 거야?”
“됐고, 무슨 일이야?”
난 팔짱을 끼고 엘레네를 쳐다봤다. 엘레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마주하다가 말했다.
“언니가 여긴 무슨 일이야? 아빠가 물어보래.”
아, 뭐야. 난 또. 아버지가 시킨 일이었구나?
내가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걸 보고 정신을 차린 후에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딸에게 ‘너 왜 여기에 있니?’ 할 순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준비해 온 대답을 말했다.
“수잔하고 피크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엘 선생님이 오셨어. 오늘은 수업이 있는 날도 아닌데 의아해서 무슨 일이냐 물으니, 함께 가자고 하시더라.”
“그게 다야?”
“그럼 내가 어떻게 시엘 선생님과 여기에 올 수 있었겠어?”
내가 되묻자 엘레네가 우물쭈물거렸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하는 깨달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그럼 아버지는 고작 이걸 알아오라고 엘레네에게 심부름을 시킨 거야?’ 하는 짜증 섞인 생각도.
하여간 단순하다니까.
“근데 왜 언니 옷은 오몽 살롱 꺼야?”
엘레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게다가 예, 예쁘……. 꽤 봐 줄 만하잖아.”
엘레네가 힐끔거리며 내가 입은 드레스를 훔쳐봤다. 차마 예쁘다는 말은 못 하겠나 보다. 하지만 난 이 대답도 미리 준비해 왔다.
“오몽 살롱이니까.”
“……응?”
“내가 너한테 말해 줘서, 너도 알고 있잖아.”
난 엘레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오몽 살롱이 망한 거.”
“……아.”
“내가 어떻게 예리엘 만물 상단이 구해 준 옷 같은, 그러니까 네가 입은 드레스처럼 귀한 옷을 입겠니?”
엘레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풀어졌다. 어머니를 닮아 노란 호박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쁘게 훑었다.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를 찾는 것 같다. 난 엘레네와 달리 딱 필요한 장신구로만 꾸몄다. 당연하게도 정상적으로. 하지만 엘레네는 자기보다 보석을 덜 걸친 모습이라 무척 흐뭇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보석도 몇 개 없네?”
“뭐, 그렇지.”
“알았어. 아빠한텐 내가 말할게.”
엘레네는 나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 뿌듯한 얼굴로 테라스를 나섰다. 난 그런 엘레네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휴…….”
아버지가 아니고 엘레네가 와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아주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다.
힐끔 파티장 안을 확인해 보니, 제 부모에게 갔던 영애들이 다시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는 엘레네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시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귀족들은 이미 영애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인지,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게 보였다. 조금 고소한 기분이 들어서 혼자 고개를 숙이고 키득 웃고 있을 때였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낯선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