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하.”
이 서늘한 웃음은 지금껏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이플란트 백작 부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이플란트 백작 부인의 친언니가 바로 에메르나 황비였다. 에메르나 황비는 황제의 가장 큰 총애를 받는 후궁이지만, 아직 황후는 아니다. 요컨대 이플란트 백작 가문은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드는 공을 세워 에메르나를 황후로 정식 책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들의 약혼녀 가문인 글라델리스 후작가가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니?
“자, 잠시만. 백작 부인. 이건 제가 다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의 차가운 조소를 들은 알버스가 다급히 해명했지만.
“잠시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이플란트 백작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이플란트 백작은 아내를 사랑해서 본가의 공작이라는 작위도 동생에게 주고 데릴사위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아내의 가문인 이플란트 가문을 사랑한단 뜻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황성 기사단의 참모를 맡을 정도로 청렴결백했다.
즉, 알버스의 서재에 약점도 없다는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알버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이플란트 백작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백작 부인도 엘레네를 수습해 줄 생각이 사라졌다.
‘헨델에게 약혼녀를 잃어도 상심치 말라고 말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도어맨이 외쳤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님과 라티아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 카르시안 라움디셀 백작 영식 입장하십니다.”
* * *
파티장 입구.
나는 카르시안의 팔에 손을 얹고 시엘의 뒤에 섰다. 긴장을 한 건지, 카르시안의 팔뚝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긴장했어?”
“내가 왜.”
카르시안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지만 무척 어색했다. 그게 귀여워서 난 피식 웃었다.
근데 남주는 남주구나.
평소에도 예민한 고양이처럼 잘생겼는데, 작정하고 꾸며 두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늘 대충 빗어 두기만 해서 잘생긴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는 한쪽으로 잘 넘겼고, 시엘의 속성 피부 관리로 얼굴에선 윤기가 돌았다. 벌써 굳은살이 박인 손은 장갑으로 가렸고, 시엘이 선물해 준 옷은 맞춤 제작처럼 몸에 딱 맞았다.
은색으로 자수가 놓인 흰색 자켓 어깨에 푸른색 술을 달아 심심하지 않게 했고, 크라바트 브로치는 붉은 가넷이었다. 마구간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다른 영식들보다 키도 훤칠하고 근육이 잡혀 옷 태도 살았다.
“키가 볼 때마다 크는 것 같아.”
“오늘은 구두를 신었어.”
내 칭찬이 민망한지, 카르시안이 농담을 했다.
“구두 그거 신어 봐야 손가락 한 마디밖에 더 돼?”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으니 원래 클 키보다 더 크나 보지.”
카르시안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가 보기 좋아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난 잠시 표정을 지웠다. 카르시안이 날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란 건 안다. 하지만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진짜, 정말, 바로 카르시안을 마구간 일에서 해방시켜 줘야지.
내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내 코가 석 자라…….
“내가 조만간 아버지께 말씀드릴게.”
“아,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었어.”
“부담 아니야.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아, 그렇지. 마구간에서 해방되면 나랑 같이 시엘 선생님과 공부하는 건 어때?”
“뭐? 난…….”
카르시안이 나를 돌아봤다. 그는 잠시 우물거리다 말했다.
“너처럼 똑똑하지 않은데.”
“무슨 소리야?”
난 펄쩍 뛰었다.
넌 남자주인공이야!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훗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넌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대담도 한다고! 하지만 이건 지금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을 돌리기로 했다.
“넌 잘생겼으니까 괜찮아.”
난 그에게 위로랍시고 팔뚝을 두드렸지만, 카르시안의 몸은 더욱 긴장했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너도 예쁜데 똑똑하기까지 하잖아. 오늘도…… 아마 파티장에서 네가 제일 예쁠 거야.”
그리고는 창피한지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훤히 드러난 귓바퀴가 새빨간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흐흐, 짜식. 남주답게 벌써부터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구나. 물론 난 네가 아부할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하지만 카르시안의 말대로 나도 오늘은 좀 많이 예뻤다.
허리까지 오는 밀빛 머리는 상단을 꽃과 함께 땋아 반 묶음 머리를 했고, 하단엔 구불구불하게 웨이브를 했다. 은실로 자수를 놓은 공단 드레스엔 크리스탈 가루를 뿌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가슴팍이 심하게 파이지도 않았는데 레이스 목초커까지 해서 노출을 최대한으로 가렸고, 브로치는 단정한 느낌이 나게 진주로 했다. 허리 리본은 그의 어깨에 달린 술처럼 푸른색으로 단단하게 동여매어 코르셋을 대신했다. 수잔이 한 달여간 벼르고 벼른 결과물이었다.
우리의 신원을 확인한 도어맨이 외쳤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님과 라티아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 카르시안 라움디셀 백작 영식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등이 시원하게 파인 화려한 붉은 드레스로 치장한 시엘이 앞장서고, 그 뒤를 우리가 따랐다. 수많은 시선들이 우리에게 일제히 꽂히는 게 느껴졌다.
“저 사람이 바로…….”
“뒤에 있는 이들이…….”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게 시엘은 ‘그’ 예리엘 만물 상단주다. 나는 소문만 무성한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고, 카르시안은 무역을 떠난 라움디셀 백작의 영식이다. 관심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단 말이다.
해서, 나는 카르시안과 더욱 의젓한 표정으로 시엘의 뒤를 따랐다. 각각 시엘과 길버트에게 속성 강의를 받은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선들 사이에는 내게 익숙한 이들도 있었다.
바로 괴상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엘레네와 테라스에서 막 들어오고 있던 아버지다. 두 사람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
“처음 뵈어요. 즐거운 오후가 되시면 좋겠어요.”
“파티에서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예리엘 만물 상단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상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예리엘 만물 상단과 제휴를 맺은…….”
“안녕하십니까,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 부디 제게 당신의 성함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녕하세요, 글라델리스의 첫 번째 영애. 저는 케로본 대상단을 운영하는 모나인트 백작가의…….”
잠시 얼어붙어 있던 공기가 거짓말 같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제가 누구인지 말하기 바빠 정신이 없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한꺼번에 쏟아지는 정보를 일일이 기억하는 재주는 없는데!
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두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한 영식이 내 손을 가져가며.
“아, 어쩜 이렇게 앙증맞고 귀여운 손이 다 있을까요. 이 손은 분명 펜 한 자루 쥐어 본 적 없겠지요. 잉크 냄새가 나지 않는 손은 역시 무척 사랑스럽네요.”
레이스 장갑을 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려고 하려 했다.
“아, 잠깐……!”
환생 전도, 회귀 전도, 이번 생도 이런 사교 파티는 처음이라 잠시 당황한 사이, 턱.
“아닌데.”
카르시안이 내 손등과 영식의 입술 새로 손을 밀어 넣어 막아 줬다. 졸지에 영식은 흰 면장갑을 낀 카르시안의 손등에 입을 맞추게 됐다. 주변이 쩡 얼어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시안은 내 손을 잡아 나를 제 뒤로 숨기며 말했다.
“라티아는 잉크병을 이틀에 한 번씩 비울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해. 그리고 잉크 냄새가 난다고 해서 라티아의 손이 라티아의 것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냉랭한 말에 카르시안의 손등에 입을 맞춘 영식도, 주변을 둘러싼 이들도 모두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여자의 손에서 잉크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게 부끄러운 건 아니죠.”
“맞아요. 저희 아버지는 거래를 할 때 상대의 손톱 사이에 잉크가 스며들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시는걸요. 성실함의 척도라면서요.”
“그런 면에서 글라델리스 첫 번째 영애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다른 영식들과 영애들이 화기애애하게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사이 카르시안이 내게 속삭였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저기로 가.”
“어, 뭐?”
이런 사교 파티가 처음인 건 카르시안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는 아주 능숙하게 영식들을 데리고 조금 떨어졌다. 해서 내 주변엔 남자의 그림자는커녕, 굵은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됐다. ‘이성 파트너 필참’ 파티에서 말이다.
내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든 영애들이 이야기했다.
“드레스가 참 아름다워요.”
“오몽 살롱의 드레스죠? 저, 에나빈 시아온도 언젠가는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입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라움디셀 영식의 옷도 오몽 살롱의 것인 것 같던데요.”
“라움디셀 백작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으면 무척 기뻐하셨을 거예요. 아드님이 잘 지내고 있는 거니까요.”
“어머? 그런데 왜 글라델리스 후작님이 아닌 예리엘 만물 상단주님과 오신 건가요?”
“그러게요. 후작님은 두 번째 영애하고만 오셨죠? 그것도 후작 부인도 없이 혼자서요.”
이렇게 알아서 내가 입 벙긋하기도 전에 판을 다 깔아 줬다.
심지어.
“그러고 보니 두 번째 영애는 이상한 소리를 했죠?”
“네에. 오몽 살롱이 망한다지 뭐예요. 이렇게 멋진 드레스를 만드는 곳인데도요.”
우리가 입장하기 전의 이야기도 전달해 줬다. 기특하게도 엘레네가 내 조언대로 한 모양이다.
한 영애가 말했다.
“어깨의 앵무새 인형 보셨어요? 전 깜짝 놀랐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깃털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고 오신 건지…….”
“글라델리스 첫 번째 영애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 두 번째 영애인 거 아니에요?”
“영애! 그, 그런 말은…….”
쉬쉬, 내 앞에서 놀란 척을 해 봐야 난 다 들은 후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바란 게 바로 이거니까.
오늘 일로 엘레네는 ‘이상한 영애’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그리고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이 ‘정신 이상자’라는 소문도 돌겠지.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