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중에는.
“오늘 이플란트 영식을 보셨어요?”
“네에. 전 지난 백작가에서 열린 파티 이후로 처음 뵙는데, 정말 신이 빚은 것 같아요.”
“하아아…… 어쩜 이렇게 왕자님 같으신지…….”
“제 데뷔탕트에 와 주신다면 너무 기쁠 텐데요.”
“저도 첫 춤은 꼭 이플란트 영식과 함께 하고 싶어요.”
앞으로 몇 년만 기다리면 사교계를 휘어잡을 만큼 아름다운 꽃봉오리들도 있었다. 헨델은 그 주위를 일부러 얼쩡거리며 영애들이 얼굴을 붉히는 모습, 저를 칭송하는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이때였다.
“저어, 이플란츠 영식. 여기, 전에 갖고 싶다고 하셨던 로즈쿼츠 원석입니다.”
“저, 저도 이플란트 영식과 무척 닮은 장미를 준비했습니다. 옐로우 토파즈로 세공한 보석 장미입니다.”
“저는 오로라처럼 오묘한 빛을 담은 유리로 만든 오르골을 준비했습니다!”
“전 크리스탈 하나를 통으로 깎아 만든 워터 고블렛을……!”
헨델을 다리 삼아 에메르나 황비와 어떻게든 닿아 보려는 어른들이 선물 공세를 시작했다. 헨델은 제 환심을 사고 싶어 안달 난 이들이 거금을 들여 구입한 선물들을 받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 이모님과 함께 만찬을 갖기로 했습니다. 참, 자리가 커서 몇 분 더 초대해도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만…….”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며, 몇 명 정도 더 합석할 수 있는 겁니까?”
“음, 글쎄요. 세 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헨델이 던진 떡밥을 먹기 위해 물고기들이 피 튀기는 사투를 벌였다.
“자넨 저번에도 다녀왔지 않은가!”
“그러는 남작님이야말로 이번엔 제게 양보하시죠!”
“이번엔 제가 함께하는 걸 도와주기로 일전에 약조해 주셨잖아요!”
“어허, 자작 부인께서 왜 이리 순진하신가!”
헨델은 그 추악한 어른들을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관람한 헨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파티가 끝난 후 아버지와 상의해서 초대장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귀족들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얼른 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귀족들은 헨델에게 값비싼 선물을 바쳤음에도 무엇 하나 얻지 못해 허망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헨델은 아버지, 이플란트 백작의 곁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아, 슬슬 따분해지는데.’
영애들의 앓는 소리를 듣거나, 어른들의 선물을 챙기며 가지고 노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지만, 몇 시간 동안 하다 보니 아무래도 질린다.
헨델이 지루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알버스 글라델리스 후작님과 엘레네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그의 약혼녀가 왔다. 헨델의 푸른색 눈이 일순간 호기심으로 빛났다.
‘왔군.’
헨델은 엘레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구경하는 건 좋아했다. 엘레네는 모든 영애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헨델의 약혼녀란 이유로 얼마나 으스대며 패악질을 일삼는지 모른다.
‘물론 어른들은 모르지.’
엘레네의 얼굴은 정말 한 떨기 백합처럼 깨끗하고 순진하기만 했으니까.
‘진짜 순수한 건지, 아니면 백치인 건지.’
전에는 헨델에게 마카롱을 권한 한 자작 영애의 옷에 케이크를 던진 적이 있었다. 접시를 들고 가다가 손이 미끄러졌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꽤 재밌었단 말이야…….’
수치스럽고 억울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자작 영애의 얼굴이 말이다. 헨델은 자작 영애에게 손수건을 건넸고, 덕분에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했다. 물론 엘레네의 질투심도 폭발했고 말이다. 저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소녀들을 보는 건 아주 재미있는 유흥이었다.
‘오늘은 또 어떤 짓으로 날 즐겁게 할까?’
무척 기대가 되는 나머지, 부드럽게 퍼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 미소를 본 다른 영애들은 “역시 약혼녀가 제일 좋으신 거겠죠.” 하고 한탄했다. 그러나 헨델의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글라델리스 부녀가 들자마자 화기애애하게 웅성거리던 귀족들도 입을 딱 다물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엘레네에게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입은 드레스에 말이다.
곁으로 다가가면 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뾰족한 어깨 뽕. 피는 통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꽉 조인 소매. 촌스럽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쨍한 샛노란 색 드레스에 멋을 낸답시고 덧댄 원색 원단들. 드레스에 덧대진 원단들은 꾸밈 요소라기보다는 기워 입은 것 같았다. 게다가 옆으로 과하게 퍼지다 못해 직각을 이루며 뚝 떨어지는 치마 라인은 또 어떻고?
세상에 이런 게 왜 진짜로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의문이 들 정도로 괴상한 차림새였다.
“광……대?”
“삐에로…… 같죠?”
귀부인들이 쑥덕거렸다.
엘레네의 목에는 노부인도 꺼릴 만큼 철 지난 디자인의 진주 목걸이가 있었고, 열 손가락엔 모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목걸이는 순수하게 엘레네의 안목이었고, 반지는 갖고 있는 예쁜 걸 몽땅 낀 결과물이었다. 심지어는 쫙 달라붙은 소매 위로 새빨간 루비 때문에 부담스러운 스팽글 팔찌까지 꼈다. 머리를 장식한 티아라는 너무 과해서 진품 보석도 모조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차 안에서 한 차례 만류했지만 엘레네는 알버스의 말을 듣는 척도 안 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사십 평생, 저런 차림은 처음이에요.”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하고 괴상한 사건을 겪어 온 노련한 부인들도 입을 떡 벌릴 만한 차림새였다.
알버스는 귀족들의 시선을 받자마자 느꼈다.
‘망했다.’
이건 그냥 놀람 수준도 아니었다. ‘경악’ 그 자체였다. 여전히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사이로 누군가 너무 놀란 나머지 부채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아, 안녕하세요. 후작님, 후작 영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는 이플란트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괴로워 보였다. 제 아들의 약혼자 가문이니 어떻게든 수습은 하고 싶은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는 모양이다.
백작 부인은 우선 엘레네를 데리고 이 파티장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우더룸에 가서 얼른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혀야 해.’
급하게 공수해 온 드레스를 입혀도 지금의 몰골보다는 나을 것이다.
“후작 영애, 오늘 옷차림이 참…… 예, 예쁘세요.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저와 파우더룸으로…….”
백작 부인이 가까스로 웃으며 한 말에, 엘레네의 표정이 환하게 피었다.
“그렇죠? 이건 아버지께서 예리엘 만물 상단에 직접 의뢰해서 준비해 주신 드레스예요.”
엘레네는 착하게도 알버스의 변명거리마저도 칼같이 차단했다. 이 덕분에 알버스는 ‘예리엘 만물 상단을 믿고 맡겼는데 제대로 검수도 하지 않았더라.’ 하는 말 돌리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보석들도 모두 아버지께서 사 주신 거예요!”
엘레네는 라티아에게 더 많은 드레스와 장신구를 버리고 새것을 얻을 생각에, 알버스를 열심히 칭송했다. 라티아의 조언대로 말이다.
엘레네의 대답에 주변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후작님께서 저런 드레스를……?”
“그것도 굳이 예리엘 만물 상단을 이용하면서까지요?”
“왜 하필 저런 드레스를…….”
“설마 저런 드레스와 차림이 아름답다고 여기시는 걸까요?”
“그럴 리가요.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저건 아니란 걸 알 텐데요.”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에, 알버스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엘레네의 만행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 입고 계신 드레스는…… 오몽 살롱이네요?”
“네? 아, 네. 알아보시는 걸 보니 영애도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준비하셨나 봐요.”
근데 왜 그걸 안 입고 이런 걸 입고 왔니?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네는 돌려 말하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히려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 글라델리스 후작님이 그러시는데 오몽 살롱은 곧 망할 거래요! 그래서 곧 망할 살롱의 드레스를 입힐 수 없으니 예리엘 만물 상단에 의뢰하신 거거든요!”
그 말에 파티장은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심지어 엘레네가 힘차게 말한 덕분에 악단들도 얼어붙었다.
“오몽 살롱이 망하다니?”
“오몽 살롱이 어떻게 망하나요?”
귀족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오몽 살롱은 황후와 황비의 드레스도 만드는 곳인 데다가, 뒷배가 황제의 상단인 ‘크라우닉’이라는 말이 있는 곳이니까! 이는 쉬쉬하는 소리지만 사교계에서 방귀 좀 뀌는 귀부인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오몽이 망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글라델리스 후작’이 말했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황제 폐하에 대한 반기일까요?”
“설마요! 그건 반역이나 마찬가지인걸요!”
“하지만 글라델리스 후작님은…… 글라델리스 상단을 갖고 계신 분이잖아요.”
“설마 글라델리스 상단과 클라우닉 상단이 맞붙는단…… 선전포고인 걸까요?”
“그래서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게 크라우닉 상단을 뒷배로 둔 오몽 살롱이고……?”
귀부인들의 입을 탄 수군거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벌써 거대한 파티장 내를 한 번 휩쓸었다. 다들 기겁하는 사이로 가장 자빠질 것처럼 놀란 사람은 역시 알버스였다.
“에, 엘레네! 누, 누가 그런, 그런……!”
“네에?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러셨잖아요.”
엘레네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확히는 ‘라티아에게 전해 들은 말’이지만, 어쨌든 알버스가 라티아에게 말한 건 사실이지 않나?
엘레네는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알버스를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