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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40화 (40/186)

40화

“사실 예리엘 만물 상단의 이름을 걸어 두고 일부러 하품의 물건을 주는 건 좀 위험하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예리엘 만물 상단의 이름을 걸고 엘레네 아가씨에게 시원찮은 드레스를 주면, 제 명성에 금이 가니까요.”

“네, 그래서 오늘 이 일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웬걸. 세상이 날 돕는 게 분명했다. 때마침 ‘품질이 나빠진 이름 있는 살롱’이 있을 게 뭐람!

“다행이에요.”

“네. 저희 상단에도 큰 피해는 없을 테니까요.”

시엘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엘 만물 상단은 그 살롱을 믿고 일을 줬는데 엘레네가 이를 입고 파티에서 큰 창피를 당하게 되면 이는 살롱의 책임이 된다. 왜냐면 아버지께 미리 말씀을 드려 ‘대외적으로는 글라델리스 후작가가 예리엘 만물 상단에 의뢰를 한 것처럼’ 보이게 해뒀으니까.

‘엘레네의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그 비싸고 만나기 어렵다는 예리엘 만물 상단에 의뢰를 했다는 소문이 돌면 좋지 않을까요?’

‘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설과 저희 가문의 이미지 말이에요.’

내가 덧붙인 말에 아버지의 눈이 빛났다.

만약 이 물건에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결국 아버지의 안목과 이어진단 말이다. 왜냐면 아무리 예리엘 상단이 드레스를 추천했다 하더라도, 결국 고르는 건 구매자의 취향이니까.

아버지는 분명 ‘눈에 차지 않아도 예리엘 상단의 추천이니…….’ 하고 구매할 것이다. 이 탓에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제 안목이 실패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터. 그리고 예리엘 만물 상단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 상단의 탓을 할 리도 없었다.

겉으로 무척 신사적인 가문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드레스 살롱의 책임으로 돌릴 게 뻔했다. ‘애당초 이런 물건을 가져오는 게 가당키나 하냐! 이건 예리엘 상단과 우리 후작가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라면서.

하여, 이 일로 예리엘 상단은 골머리를 앓던 살롱과 거래를 끊어 낼 수 있고, 난 엘레네를 골탕 먹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꿩 먹고 알 먹기란 말이지.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는 물품 검수도 하지 않나?’라는 말이 돌까 봐 걱정되긴 하는데,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수용한 곳이 바로 글라델리스 후작가니까.

그 누가 신사적이고 귀족적인 글라델리스 후작의 안목을 대놓고 비하하겠어?

시원찮은 물건을 납품하더니, 끝내는 후작까지 속여 넘긴 간사한 혀라며, 드레스 살롱의 마담을 탓할지도 모른다.

시엘이 말했다.

“자, 그러면 오늘도 수업을 해 볼까요?”

“네,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복습하면서 궁금한 점을 정리해 온 참이에요.”

“역시 아가씨께선 배울 자세가 되셨네요.”

시엘이 흐뭇하게 웃으며 내 복습 노트를 받아 갔다.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드디어 오늘, 황성 경매 전야 파티가 열린다.

“그럼 다녀오마.”

“다녀올게, 언니!”

아버지와 엘레네가 내게 인사했다.

난 현관에서 그들을 배웅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엘레네는 내가 서운한 마음에 말도 못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니지롱. 거기서 만날 건데, 뭘 인사를 하고 그래?

난 아버지와 엘레네가 탄 마차가 멀어지는 걸 보며 지난 한 달간의 일을 상기했다.

일단 여전한 게 하나 있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냉전 관계다. 시엘과 함께 찾아온 셀트론이 말해 줬는데, 조만간 후작 부부가 이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밖으로 돈다고 했다. 이렇게 글라델리스 후작저에 대한 추문이 처음으로 하나 생겼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나는 엘레네를 꼬드겨 계속해서 장신구와 모자, 장갑, 구두 등의 사치품을 구매하게 했다. 그사이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은화를 모아 아버지께 자그마한 넥타이핀을 선물했다. 아버지가 나와 엘레네를 더욱더 자주 비교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루는 엘레네에게 대놓고 말도 했다.

‘너무 사치를 부리지 말거라. 바깥에서 너를, 우리를 어떻게 보겠느냐?’

지금보다 더 큰 소비를 해도 별말 듣지 않았던 엘레네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미처 나서기도 전에, 엘레네는 이걸 어머니께 쪼르르 일러바쳤다. 덕분에 어머니는 ‘바람도 피우더니 이젠 딸에게 드는 돈도 아깝냐!’며 찾아와 아버지와 대판 싸웠다.

해서 오늘 파티로 향하는 부녀의 사이는 아주 껄끄럽단 말이지. 게다가 내가 시엘을 통해 전달해 준 드레스는 “와, 이건 진짜 아니다…….”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별로였고.

아버지와 엘레네도 보는 눈이 있으니 별로라는 걸 알 테지만, 예리엘 만물 상단의 물건이라 말도 못 했을 것이다. 일전에 동물어 번역기로 한차례 난리가 났었으니.

나는 마차가 완전히 사라진 정문을 한 번 보고는 얼른 방으로 돌아갔다.

“오셨어요, 아가씨? 준비는 다 마쳤어요!”

“도련님을 꾸밀 준비도 마쳐 놨습니다!”

오늘만을 벼르고 있던 수잔과 시엘이 결연하게 말했다.

오늘, 나와 카르시안은 처음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

* * *

황도로 향하는 길, 엘레네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비록 텔레포트는 속이 울렁거리고, 돌아왔던 레이시나는 다시 친정으로 떠난 데다가 알버스와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지만.

‘난 오늘 공주님인걸!’

오늘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무려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준비해 준 것이다. 장신구는 알버스에게 떼를 써서 몽땅 새로 샀고, 구두는 라티아를 이용해서 미리 길을 들여 놨다.

‘언니의 뒤꿈치가 까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어차피 금방 낫는 곳 아닌가?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삐로리를 안 주는 대신 구두를 길들여 주고 이 모형을 준다고 했으니까.’

라티아는 엘레네의 뜻을 따라 주지 않았지만 결국 엘레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긴 했다.

왜, 한 달 전에 라티아가 엘레네의 방을 나가기 전에 속삭였던 말 말이다.

‘아버지에게 나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건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왜?’

‘그야 내가 널 돕는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네게 새로운 걸 사 주지 않으실 거 아니야. ‘자매끼리 돌아가며 쓰면 되겠다.’며 나에게 새로운 걸 사 줄지도 몰라.‘엘레네는 새 드레스나 장신구를 사기 위해 갖고 있는 것들을 라티아에게 ‘물려준다’는 이름으로 버리고는 했다. 그런데 라티아도 자신의 물건을 ‘물려준다’며 엘레네에게 주면?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새로운 걸 사 주지 않으실 거야!’

라티아는 그것을 걱정해서 당시 엘레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 하녀들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어제는 밤에 몰래 찾아와 이런 조언도 해 줬다.

‘네가 받은 모든 것들은 전부 아버지가 사 주셨다고 알리는 건 어떨까?’

‘응?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아니, 좀 더 뽐내라는 말이야. 네 드레스는 아버지가 특별히 주문해 준 예리엘 만물 상단의 것이잖아.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부자다!’ 하고 자랑하면, 아버지께서 널 얼마나 기특하게 보겠니?’

듣고 보니 이만한 효도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엘레네가 공주님이 될 운명이어서 하녀 같은 언니도 날 돕는 거겠지?’

엘레네는 어깨에 얹어 둔 새 모형을 만지작거리며 히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알버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떨떠름해 보였다.

‘어째 날이 갈수록 애가 멍청해지는 것 같은데.’

알버스는 심란했다. 사실 알버스의 생각이 맞기도 했다. 엘레네는 일전에 자신의 수호천사인 ‘호냥이’를 죽이려고 했다. 다행히 라티아 덕분에 수호천사를 죽이는 죄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그 탓에 호냥이는 엘레네의 곁을 떠났다. 천사의 축복이 사라졌단 뜻이다.

‘맥피가 없어서 그런가?’

맥피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도무지 엘레네를 모실 수 없다며 사표를 냈다. 그러며 알버스의 앞에서 엘레네의 험담을 늘어놨다.

‘아무리 엘레네에게 공부를 가르치려 해도 소용이 없을 거란 악담까지 퍼붓다니.’

사생아인 라티아의 앞에서 듣기 창피한 말이었지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7살에 주판까지 다루는 라티아와 달리 한 자릿수 덧셈도 못 하는 이가 엘레네였으니까.

맥피는 마지막 충언이라며 엘레네 대신 라티아를 키우라고 했다. 화가 난 알버스는 맥피를 내쫓으려고 했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엘레네가 그간 동물은 물론이고 카르시안을 괴롭혔던 것을 숨겨야 했다.

‘추천장에, 퇴직금까지……. 대체 얼마나 들어간 건지.’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다 쓰렸다.

‘다행히 그 돈을 메울 구석이 있으니 망정이지.’

내일 경매에 출품되는 제네스의 만년필 말이다. 그것만 낙찰받으면 에메르나 황비와 연줄을 만들게 된다.

‘그럼 난 정계의 중심으로 진출하겠지. 상단은 라티아가 맡을 테니, 이제 돈을 쓸어 담는 일만 남았어.’

엘레네 때문에 손해 본 돈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었는데, 아주 자그마한 문제가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맥피가 이렇게 그만둘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못 해서 약점을 잡아 두지 않았는데…….’

엘레네 때문에 되레 약점이 잡혔단 거다. 맥피는 유능하니 곧바로 다른 귀족가에 취직할 것이다. 그곳에서 신변을 보호받을 테니 베티 때처럼 처리를 할 수도 없다. 약점을 잡기만 했지, 잡히는 건 처음이라 알버스는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알버스와 달리 엘레네는 해맑기 그지없었다.

“후후후, 네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삐……릭!”

엘레네가 앵무새 인형에 녹음된 소리를 들으며 꺄르르 웃었다. 그 모습에 알버스는 더욱 심란해졌다. 맥피의 마지막 충언, “라티아 아가씨는 무척 영특하십니다. 엘레네 아가씨와 달리요.” 하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카르시안 그놈도 백작 영식이긴 했는데. 라티아와 함께 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 * *

“저기, 이플란트 영식이 왔다!”

“이플란트 영식님, 안녕하세요?”

“못 뵌 사이에 키가 많이 자라셨군요? 이제 신사가 다 되셨습니다.”

엘레네의 약혼자, 헨델 이플란트 백작 영식은 자신의 주변을 꽉 채운 이들을 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헨델의 첫째 이모가 바로 현 황제가 최고로 총애하는 후궁, 에메르나 황비였다. 게다가 헨델은 제네스 황태자의 배동이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헨델의 부친인 이플란트 백작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건 오래된 일이다. 그러니 어쭙잖게 이플란트 백작을 공략하기보다 어린 헨델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을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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