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저, 저, 저!”
아버지는 엘레네를 손가락질하다가 기어이 뒷목을 잡았다.
오, 혈압이 오르면 진짜 저런 행동을 하게 되는구나.
“엘레네가 제대로 반성할 때까지, 아니. 버르장머리가 고쳐질 때까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해!”
아버지는 내 예상대로 엘레네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와장창, 쨍그랑! 식탁을 싹 쓸어 버려 음식과 식기가 바닥으로 죄다 내팽개쳤다.
식당 바닥은 깨진 그릇과 음식물들로 엉망이 되었다. 후식을 못 먹은 건 좀 아쉽지만, 이럴 줄 알고 카르시안의 방으로 아이스크림을 잔뜩 보내 놨다.
난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아버지, 너무 상심치 마세요. 엘레네가 왜 저러는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엘레네의 변덕이 하루 이틀인가요?”
내 말에 아버지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엘레네의 변덕이 죽 끓듯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간은 엘레네가 사랑스러워서 잠깐 화가 나다가도 진정됐지만 이젠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의젓한데다가 사업상에 도움도 되는 나와 비교될 테니까.
“엘레네가 너의 반만 닮았더라도…….”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이런 말까지 했다. 난 아버지에게 무해한 표정으로 한 번 웃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볼게요.”
“네 약혼자를 진즉 구해 줬어야 했다.”
식당을 나가는 내 뒷모습에 대고 아버지가 후회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전 여러분들의 핍박과 방치 덕분에 알아서 해결하는 방법을 배웠거든요.
난 고개를 돌려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웃어 주고는 곧장 카르시안의 방으로 향했다.
“카르시안, 나야.”
“들어와.”
안으로 들어가니 카르시안은 아직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너 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버틀러한테 난 식당에서 먹는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
“들었는데 어차피 네 아버지가 다 깨부쉈을 거 아냐.”
그래서 얼마 못 먹지 않았느냐고, 카르시안이 표정으로 물었다. 빤히 보는 붉은 눈동자는 너무도 착했다. 이대로만 가면 순조롭게 클로드가 돌아왔을 때 ‘라티아는 착해요.’라고 말해 줄 것 같았다.
난 카르시안의 곁으로 가며 말했다.
“에이, 나 그렇게 안 약해. 내 밥그릇은 열심히 챙기거든.”
“진짜 다 먹고 왔어?”
그런데 어쩐지, 카르시안이 좀 시무룩해 보인다. ‘이젠 따로 먹는 건가.’ 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읽혔다.
난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스크림이 든 볼을 들며 말했다.
“네 예상대로 아버지가 다 깨부숴서 디저트는 못 먹었지만 말이야.”
고작 디저트만 같이 먹겠다는 말인데도 카르시안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카르시안의 머리 위로 손이 올라갔다. 순간 아차 싶었다.
카르시안이 당한 학대엔 손찌검도 있는데!
난 카르시안이 겁에 질리기 전에 얼른 손을 거둬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내 손바닥 밑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 넣었다.
“어, 어?”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고개를 숙이느라 나를 살짝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채근했다. ‘뭐 해? 안 쓰다듬어?’ 하고. 그래서 난 멍하니 그의 보석 같은 눈을 보며 손을 슬슬 움직였다. 카르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감았다. 갸르릉거리는 맹수, 아니. 골골골거리는 아기 고양이가 생각났다.
한동안 그의 결 좋고 복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오늘 길버트한테 배운 건 어땠어?”
“아, 그거…….”
카르시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 한참 기분 좋았는데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은 고양이 같아서 뭔가 웃겼다. 하지만 카르시안의 입에서 나온 소린 뜻밖이었다.
그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잘 가르치더라.”
조금 퉁명스럽긴 해도 확실히 인정하는 말이었다.
“진짜 글라델리스 후작 영식이긴 했나 봐.”
카르시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혹여나 카르시안이 가문에서 제적당한 길버트에게 배우는 걸 불쾌히 여길까 봐, 열심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길버트가 잘 가르쳐?”
“응. 난 예법 공부를 놓은 지 꽤 됐거든.”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닌지, 카르시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해서 나도 그에게 이 일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내가 길버트에게 왜 카르시안을 교육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겠는가.
다 카르시안이 속한 라움디셀 백작가가 가난해서 예법 선생 하나 제대로 고용하지 못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런데 라티아, 갑자기 왜 날 가르치라고 한 거야?”
“응? 아…….”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안 해 줬구나.
난 카르시안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다음 달에 황성 경매 전야 파티가 열린다는 건 알고 있지?”
“음, 뭐.”
몰랐구나.
내 손이 떨어지자 아쉬운 생각 뒤로 애써 능청을 떠는 표정이 덧씌워졌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거기에 참석하는 자녀들은 이성 파트너와 함께 가야 한다더라. 아무리 부모와 함께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카르시안이 눈썹을 확 찌푸렸다.
“근데 난 너도 알다시피 약혼자가 없거든.”
“……아.”
카르시안의 눈동자에 일순간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알아들었겠지?
난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카르시안이 중얼거렸다.
“약혼자…… 생각지도 못했어. 다행이다…….”
응?
“뭐가?”
뭐가 다행인데?
의아해서 물으니 카르시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응?”
“그거랑 내가 길버트에게 교육받는 게 무슨 상관인데?”
“……으응?”
난 당황스러웠다.
뭐야, 아까 그 깨달음의 빛은 뭔데? 설마 내가 잘못 읽은 건가? 아니,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뭐어. 난 환생도 하고 회귀도 해서 어른만큼이나 눈치가 빠르지만, 카르시안은 이제 겨우 10살. 그래, 모를 만도 하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로 했다.
“난 그 파티에 참석하고 싶어. 여러모로 아버지를 물 먹일 수 있게 됐거든.”
“그건 잘된 일이네.”
“맞아. 그런데 난 약혼자가 없다잖아.”
“그것도 다행인 일이지.”
이게 왜?
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마저 이야기하라며 손짓을 했다. 여전히 내 쪽으로 고개는 숙인 채 말이다. 마치 언제든지 쓰다듬 받을 준비가 된 고양이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시 손이 올라갔고, 부드러운 그의 머리칼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듣자 하니 꼭 약혼관이나 결혼관일 필요는 없대. 상대가 귀족이기만 하면.”
“……설마.”
카르시안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내 손을 머리 위에 얹어 두고 날 쳐다봤다. 난 그에게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도와줄 거지?”
사실 이걸 먼저 물어보고 길버트에게 그를 교육시키라고 하는 게 맞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단 가르쳐 놓으면 카르시안이 공자가 됐을 때도 써먹을 수 있잖아.
실제로 원작에 의하면 카르시안은 예법이 부족해 몇 번 창피를 당한다.
그런데 여기 좋은 선생이 있다잖아? 그럼 기회를 잡아야지.
후작 영식이 가르치는 예법은 어지간한 자작, 남작 출신의 선생보다 낫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쳐 두면 나에게 빚을 지게 된 셈이니까 내가 살아남은 후에도 언젠가는 또 도움이 되지 않겠나.
“……알았어.”
물론 똑똑한 그가 날 거절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고.
카르시안이 내 손길을 받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 하얀 얼굴에서 ‘그런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읽혔다.
“내가 미리 말 안 해서 서운해?”
“뭐? 내가 왜 서운해해야 해?”
혹시나 싶어서 물으니, 카르시안이 이상한 걸 다 묻는단 얼굴로 대답했다. 드디어 내 손바닥 밑에서 빠져나간 카르시안이 제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네가 한 일이잖아.”
“응?”
“뭐, 어련히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있었어.”
“…….”
“호냥이는 나도 귀여워했으니까.”
“아.”
“그리고…….”
카르시안이 힐끔, 나를 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귓바퀴가 좀 붉다. 괜히 엄한 바닥만 쏘아보고 있는 카르시안의 생각이 어렴풋이 읽혔다. ‘넌 변했으니까.’라는, 아주 고마운 생각이.
난 그런 카르시안을 아주 흐뭇하게 보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 * *
다음 날, 난 시엘에게 본격적으로 예법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파트너가 카르시안이라는 말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성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공문을 봤어요. 그래서 오늘 아가씨께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통했다며 시엘이 무척 기뻐했다.
“사실 전 도련님도 데려가고 싶어서 옷을 준비했던 거거든요. 후작이 도련님을 데리고 갈 리가 없잖아요.”
이목은 좀 집중될지라도 아버지에게 카르시안이라는 혹을 달고 다니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그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다고 밝힐지도 모르고.
시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카르시안은 다음 달에 파티가 열린다는 걸 모르던데요?”
“어머, 그래요?”
“이상하네요. 지난번에 옷을 드리며 설명을 했었는데…….”
시엘의 말에 이어 수잔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 어쩌면 자신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귀담아듣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요.”
수잔의 말에 나와 시엘이 나란히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르시안도 알고 있는 거다. 우리 아버지처럼 나쁜 어른이 자신을 데리고 파티에 나가는 귀찮은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시엘에게 어제 있던 일도 이야기했다.
“그 아가씨가요…….”
엘레네가 동물을 학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엘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졌다. 시엘은 버틀러 못지않은 동물 애호가였다.
“그래서 제가 살짝 심술을 부렸어요.”
오몽 살롱 드레스를 찢게 한 일 말이다.
“엘레네에겐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드레스를 구해다 주기로 했거든요.”
“아하.”
시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눈치 좋게 말했다.
“마침 물건이 매번 시원찮아서 거래를 끊으려던 살롱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지방에선 좀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자작 부인이 하는 곳이라 못 하고 있었거든요.”
“네, 적당할 것 같네요.”
뜻을 알아들은 나는 그녀에게 싱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