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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38화 (38/186)

38화

물론 이거 하나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호냥이가 죽은 후 이상할 만큼 악독해진 엘레네 기준에 ‘약한 것’은 라티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티아는 ‘착한 언니’라는 이유로 때때로 엘레네에게 머리채가 잡혀도 참아야 했다.

‘내가 그 일들을 어떻게 잊겠어.’

회귀 전 라티아가 겪었던 그 수모는 이번 생에서 엘레네가 똑같이 겪을 것이다. 라티아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그건 그렇고, 라티아는 엘레네가 다음 달에 열릴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 당할 창피를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바보 같은 엘레네. 오몽 살롱은 창립 이후 단 한 번도 뒤처진 적 없는걸.’

듣기로는 그 배후에 어마어마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누군진 잘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라티아는 제가 엘레네를 속여 넘겨서 삐로리가 아프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삐로리,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삑? 삐르.”

삐로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이 정도의 거짓말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어젯밤, 삐로리 몰래 천사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만 아니면 괜찮다고 했는데 정말인가 봐.’

도박장 생각을 했을 땐 몸져눕던 삐로리가 지금은 태평하기만 했다. 그래도 괜히 마음이 쓰이는 게 사실이라, 라티아는 삐로리를 손가락으로 옮겨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대한 착한 생각만 할게.’

속으로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한편, 삐로리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삐로리는 수호천사이기에 그간 수많은 아이들을 봤고, 그들을 모두 좋아했다. 하지만 엘레네는 그런 삐로리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영혼이 있을 수 있지?’

아이의 재능은 물론 영혼마저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삐로리는 조금 전, 엘레네를 제대로 마주했고 그녀의 영혼을 봤다.

‘그렇게, 그렇게 하얀 영혼은 처음 봤어.’

삐로리는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흔히들 아이의 영혼을 순수한 흰색에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들의 영혼은 모두 각자의 색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라티아의 경우엔 생존에 대한 욕망 탓에 강렬한 보라색이 섞여 전체적으로 연보랏빛을 띠었다.

‘라티아는 사생아로 태어나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어.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 무엇보다 강렬하지.’

카르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라티아처럼 연한 보랏빛 바탕에 애정결핍을 뜻하는 검붉은 색이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도는 모양새였다.

‘어릴 적 세상을 뜬 어머니와 망망대해로 나간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애정 결핍이, 후작가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고 있어 생존에 대한 열망이 있어.’

이렇듯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감정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영혼은 더 많은 색에 물든다.

‘이후 아이들은 가치관이 생기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의 색을 바탕으로 나머지 색들이 조화를 이루지.’

인간들은 이렇듯 영혼의 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사회성이 길러진다’고 부른다. 하지만 엘레네의 영혼은 지독하게 하얗기만 했다. 그 색만 보면 고결하다 못해 성스러울 정도였다. 요컨대 ‘인간답지 못하다’는 거다.

‘이렇게 흴 바엔 차라리 검은색이 나은데.’

검은색은 다른 색과 빛을 흡수라도 하지, 흰색은 모든 색과 빛을 튕겨내 버린다. 감정과 가치관, 도덕관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엘레네의 하얗기만 한 영혼에 과연…… 다른 색이 섞일 수 있을까? 자신의 수호천사마저 죽이려고 하는 아이가?’

삐로리는 곧 죽을 듯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호냥이를 떠올리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랬다. 엘레네가 두 번이나 해친 그 고양이, 호냥이는 바로 엘레네의 수호천사였다.

‘자신의 수호천사를 죽게 하는 건 정말 엄청난 죄야.’

살아생전에는 절대로 죄를 갚지 못하고 죽어서 저세상은커녕 지옥에도 가지 못한다. 지옥에서도 ‘어우, 이건 좀.’ 하고 손을 내저을만한 죄란 말이다. 이럴 경우 영혼은 구천을 떠돌며 점점 더 새까맣게 타락하다 결국 천사들에 의해 아주 고통스럽게 소멸한다.

‘또 살아서도 숱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으로 지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지.’

희대의 연쇄 살인마, 국가 지명 수배범 등이 이 경우다.

‘라티아가 호냥이를 살릴 테니, 엘레네는 그렇게까지 타락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수호천사는 이 일을 계기로 엘레네에게 극심히 실망하여 곁을 떠날 것이다.

‘수호천사가 떠난 아이에게 보장된 미래는…….’

삐로리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호천사를 잃은 엘레네의 인생은 앞으로 절망과 좌절, 망신의 연속일 것이다.

‘천사의 축복이 없어졌으니까.’

삐로리는 엘레네의 인생에 미리 애도를 표했다.

* * *

호냥이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엘레네의 유모가 호냥이를 쓰다듬으며 내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수잔의 말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귀 전 때와 마찬가지로 호냥이의 입양 준비를 다 마쳐 놨다고 한다.

“전 이대로 호냥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엘레네 아가씨의 눈을 피해야 할 테니까요.”

“잘 생각했어. 맥피는 훌륭한 유모이니 아버지께서 분명 추천장을 써 줄 거야.”

안 써 준다고 하면 내가 써 주지, 뭐. 회귀 전에 아버지 대신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필체를 따라 하는 건 도가 텄거든.

수술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던 길버트와 그를 돕던 집사장이 내게 왔다.

“대체 엘레네 아가씨를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맞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엘레네 아가씨께서 호냥이를 포기하신 거죠?”

길버트야 내게 원래도 적개심은 없었다지만, 집사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날 보는 집사장의 표정엔 감탄과 감동뿐이었다. 뭐, 당연했다. 집사장은 조금 전 엘레네가 오몽 살롱 드레스를 찢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들었겠지.

‘호냥이는 언니에게 맡길게.’

덕분에 계속해서 수술을 망설이던 길버트가 지체 없이 집도할 수 있었다.

내가 ‘아, 다 해결했다니까?’ 하고 씩씩거렸을 땐 반신반의했으면서.

아무튼 난 엘레네의 만행을 막아 준 영웅이 됐다. 난 두 사람에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정말 아가씨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걸요.”

술이 완전히 깬 길버트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길버트의 눈에 잠시 ‘위치가 위태롭잖아.’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집사장은 그런 길버트를 한번 흘겨보고는 내게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늙어 그간 눈이 흐려졌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귀한 분을 제가 감히…….”

집사장이 실질적으로 날 괴롭힌 적은 없지만, 하녀들의 하극상을 방관했다. 그는 그것을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버틀러. 아가씨께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며 동시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집사장, 버틀러가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솔직히 난 집사장에게 딱히 호감은 없겠지만, 그의 충성을 기꺼이 받기로 했다. 왜냐면 그는 아버지의 최측근이다. 곁에 두면 분명 도움이 될 터이다.

어쨌든, 호냥이도 살렸겠다. 이제 난 내 원래 목적을 달성할 때였다.

난 곧장 나를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는 길버트에게 말했다.

“잠깐 나랑 대화 좀 할래?”

“음? 뭐, 어려울 거 없죠.”

버틀러는 곧장 창고를 후다닥 정리해서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줬다. 과연 글라델리스 후작가에서 40년이나 봉사한 집사. 그 몸놀림은 정말 훌륭했다.

“그럼 전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차와 투박한 쿠키까지 내놓고 깍듯하게 인사한 후 나가는 태도까지! 이건 후작저 사람들을 모두 삐딱하게 보는 나마저도 인정할 만했다.

버틀러가 나가고, 난 길버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삼촌이라면서?”

“알면서도 하대하시네요. 아가씨?”

난 나름 빈틈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길버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받아쳤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읽혔다.

‘내가 과거의 후작가 사람이었단 이유로 비아냥을 얼마나 들어왔는데, 고작 어린애의 물음에 당황할까.’

생각해 보니 그는 버틀러의 하대에도 익숙해 보였다. 자존심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으면, 얼마나 아득바득 버텨 왔으면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일까. 이건 내가 멍청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꿀릴 건 아니지.

“난 아직까지는 후작가 사람이거든.”

“음? ‘아직까지는’?”

“응.”

난 ‘아차’ 싶어 해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씩 웃으며 길버트에게 앞으로의 뜻을 넌지시 알렸다. 길버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와하하! 웃었다.

“후작이 아가씨 이야기를 꽤 한다고, 아까 버틀러가 그랬는데.”

길버트는 내가 아버지와 반대 길로 걸을 거라는 게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 참. 뜻밖의 재미를 발견했네.”

“그렇지? 내게 고맙지?”

“뭐, 고마움까지는 아니고.”

길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래서? 과거 글라델리스 후작가 사람이었던 길버트 글라델리스에게, 라티아 글라델리스는 무슨 말을 하러 온 겁니까?”

길버트는 나를 탐색하듯 바라봤다. 난 어른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길버트의 눈빛에 새롭게 감탄이 어렸을 쯤, 입을 열었다.

“카르시안을 교육해 줬으면 해.”

* * *

그날 저녁.

엘레네가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찢었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네가 제정신이야아!”

“아빠야말로 어떻게 제게 오몽 살롱 드레스를 줄 수 있어요!”

나는 아버지와 엘레네가 다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으며 혼자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다. 버틀러를 시켜 카르시안에게도 똑같은 음식이 전달되도록 준비해 놨다.

아버지는 기가 차서 말도 잘 안 나오는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오몽 살롱 드레스가 얼마나……!”

“아빠 미워요!”

하지만 엘레네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딱 철부지 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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