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하녀를 교육한 라티아의 눈에 마침 소파 등받이에 늘어진 드레스가 들어왔다.
‘손님이 와서 소파로 안내를 했는데도 정리를 하지 않았단 말이야?’
엘레네의 하녀들도 참 문제가 많았다.
‘뭐, 덕분에 회귀 전 때의 일을 복수할 구실을 얻었네.’
라티아는 속으로 씩 웃으며 드레스를 가리켰다.
“엘레네, 이 드레스는 뭐니?”
“아! 한 달 뒤에 황성 경매 전야 파티가 열리잖아. 거기에 입고 갈 드레스야.”
“흐음…….”
라티아의 표정에 일순간 부러움이 비쳤다. 아니, 그런 듯 보였다.
이를 본 엘레네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약혼자가 없어서 파티에 못 간다고, 아버지가 어제 그랬지.’
딱하고 안쓰러운 언니.
‘엘레네는 공주님이 되어 파티에 가고 왕자님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건데.’
이참에 공주님이 된 자신에게 새를 선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생각했다. 마침 엘레네가 원하는 건 수잔의 어깨에 있었다.
“언니, 있잖아.”
“응.”
“저 새 필요해?”
엘레네가 삐로리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라티아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이건 엘레네의 화법이다. ‘언니 그거 필요해?’ 하면서 은근히 갖고 싶다고 말하는 거 말이다. 이걸 애교스럽게 말하곤 해서, 어른들은 대부분 라티아에게 양보하도록 종용했다. 그렇기에 라티아는 가진 것도 얼마 없는데도 엘레네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그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어.’
어영부영 뺏긴 것 중에는 엘레네의 죄를 뒤집어쓰고 받은 사탕 한 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잠시 그때의 감정을 느끼던 라티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응, 필요한데?”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라티아의 말에, 엘레네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
제가 이렇게 넌지시 “필요해애?” 하고 말하면 모두들 “아휴, 아니에요.” 하고 주곤 했다. 그들 중에는 라티아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니가…….’
엘레네가 큼직한 눈을 깜빡이자, 라티아는 싱긋 웃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드레스가 참 예쁘다.”
“어, 어? 맞아. 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셨어. 오몽 살롱의 드레스야! 여기 드레스를 사려면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한대.”
엘레네가 꿈꾸듯 말했다.
이건 라티아도 알고 있었다. 시엘이 사 준 드레스가 바로 오몽 살롱 드레스니까. 그러나 라티아는 곧장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아버지께서? 엘레네에게?”
“응. ……왜?”
엘레네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그에 라티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내가 요즘 아버지의 상단 일을 돕고 있잖니?”
“응…….”
엘레네가 조금 뾰로통해졌다. 라티아가 알버스를 도와 두각을 보이고 있는 탓에 엘레네도 재미없는 산수 공부를 계속 해야 했다.
‘다 언니 때문이야.’
이 생각이 들자 라티아가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라티아가 말했다.
“아버지는 황도에서 들리는 소문 같은 것도 열심히 들으시는데, 황도에서는 이제 오몽 살롱이 한물갔다고 하더라고.”
“뭐어? 아,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응. 그래서 난 아버지가 다른 살롱에서 네 드레스를 맞춰 줄 거라고 생각했어.”
“아…….”
“아무리 우리가 아직 사교계에 입문하기 전이라지만, 황도에 그런 소문이 퍼져 있는데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입고 간다는 건 유행에 뒤처졌다는 말이잖니.”
“그런……!”
엘레네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아버지가 다 알면서도 내게 촌스러운 드레스를 사 준 거라고?’
가만히 보니 저 연분홍 공단 드레스도, 하얀 샤 천도, 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것이다. 달라진 거라곤 장미 넝쿨 모양으로 뜬 레이스와 보석의 배치 정도였다. 물론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지만, 엘레네는 이런 점을 몰랐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난 지난달 티파티에도 분홍색 드레스를 입었어.’
이번에도 똑같이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가면 저번과 별다를 게 없을 것이다. 엘레네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 라티아는 바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새로운 드레스를 맞출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어디서…….”
엘레네의 머릿속을 장악한 글귀, ‘공주님은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차분히 멀어지고 있었다.
엘레네를 살피던 라티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나. 예리엘 만물 상단주님에게 수업을 받았어.”
“아, 응. 내가 공부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오지 않으셨지.”
엘레네가 조금 뚱하게 대답했다.
“내가 선생님께 부탁해 볼까?”
“응?”
“예리엘 만물 상단이라면 황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드레스를 구해다 줄 거야.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말이야.”
“그게, 그게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라티아가 인자하게 웃자 엘레네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응! 그렇게 해 줘, 언니! 엘레네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래, 알았어. 그럼 저 드레스는…….”
어떻게 할 거냐며 라티아가 힐끔, 엘레네의 드레스를 눈짓했다. 엘레네는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빠한테 따질 거야. 어떻게 엘레네에게 이런 드레스를 사 줄 수 있어?”
그리고는 하녀를 시켜 가위를 가져오게 했다. 수잔과 있던 하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린이용 가위를 가져왔고, 엘레네는 지체 없이 드레스를 죽 찢어 버렸다.
“꺅, 아가씨!”
“아가씨!”
하녀들이 다급히 엘레네를 말렸지만 ‘하마터면 이런 촌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갔다가 창피를 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엘레네를 막을 수는 없었다. 라티아는 엘레네가 드레스를 넝마로 만들 동안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엘레네가 조금 분이 풀린 듯 보인 후에, 라티아가 말했다.
“참, 엘레네. 호냥이 말이야.”
“응?”
“너무 건방지지 않니? 나보다 수잔을 더 따르는 거 있지.”
“언니한테도? 엘레네한테도 그랬어! 그래서 엘레네가 혼쭐을 내줬어.”
“그랬어? 근데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던데.”
라티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니 언니인 내가 조금 더 혼쭐을 내도 될까?”
“응? 응. 알았어. 앞으로 언니 마음대로 해.”
라티아는 씩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아, 참. 엘레네.”
라티아가 엘레네에가 다가가 귓가에 뭔가를 소곤거렸다. 엘레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가 이내 배시시 웃음을 매달았다.
“알았어. 언니. 고마워!”
“고맙긴, 우린 자매잖아.”
라티아가 엘레네의 어깨에 앉지도 않은 먼지를 툭툭 쓸어 줬다.
라티아가 나간 후, 엘레네가 엉망으로 찢은 드레스를 정리한 하녀가 물었다.
“라티아 아가씨께서 나가기 전에 무슨 말을 하셨나요?”
“응? 그건 비밀이야.”
엘레네가 입을 막고 키득키득 웃었다.
* * *
라티아는 계단을 내려가며 수잔에게 말했다.
“이제 호냥이는 치료에 전념하기만 하면 돼.”
라티아는 처음부터 엘레네에게 ‘내가 호냥이를 더 혼내겠다’고 말하기 위해 찾아왔다.
‘엘레네는 약한 것들을 괴롭힐 때 꼭 혼낸다고 말하는 버릇이 있거든.’
그러니 라티아가 호냥이를 혼내겠다고 말한 이상, 엘레네는 곧 호냥이가 죽을 거라고 여길 게 분명했다. 또 호냥이를 향한 분풀이는 이미 마쳤고, 알버스를 향한 화는 드레스로 대체했다.
‘한동안은 굳이 호냥이같이 약한 동물을 괴롭히지 않을 거란 말이지.’
게다가 엘레네가 드레스를 찢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버스는 엘레네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릴 게 뻔했다. 그러는 사이에 호냥이를 후다닥 치료해서 다른 곳으로 입양 보내면 된다.
“치료한 후에는 어떻게 할까요? 저택에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이미 데려갈 사람이 있으니까.”
라티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분명 이번에도 엘레네의 유모가 데려가려고 할 거야.’
회귀 전, 엘레네의 유모는 입양할 준비를 모두 마쳐두고 호냥이의 죽음을 목도했다고 그랬다.
“엘레네의 유모와 말을 맞춰 두면 될 거야. 그녀는 호냥이를 무척 귀여워했고, 엘레네의 성격을 알고 있을 테니까.”
호냥이가 살아 있다는 걸 엘레네에게 들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 테니, 입을 꾹 다물 것이다.
“엘레네는 후원에서 호냥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말한 라티아는 곧장 수잔에게 엘레네의 유모를 찾아가라 일렀다.
“네, 알겠어요.”
수잔이 엘레네의 유모를 찾아가고, 라티아는 후원으로 향했다.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 입을 드레스를 발견한 건 정말 행운이야. 덕분에 그때의 수모를 갚을 수 있겠어.’
덕분에 복수까지 할 수 있게 됐으니, 무척 잘된 일이었다.
회귀 전, 라티아가 9살일 때의 일이다. 간신히 얻은 파티 초대장 하나. 라티아는 엘레네에게 물려받은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엘레네가 찾아왔다.
‘언니, 이 드레스가 좋겠어. 내가 언니에게 준 거긴 하지만 그래도 소르젠 살롱 드레스는 언제나 유행하는 드레스거든!’
라티아는 파티에 참석하는 게 처음이라 사교계 소문을 몰랐다. 그래서 엘레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소르젠 살롱은 두 달 전에 망한 곳이었다. 조금 전, 라티아가 엘레네에게 말한 대로 망한 살롱의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는 건 그만큼 무지하고 유행에 뒤떨어졌단 뜻이다. 심지어 엘레네의 드레스는 오몽 살롱의 것이었다.
‘휴우. 엘레네는 언니를 말렸지만, 언니는 저 드레스가 좋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엘레네가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입는 것보다 언니가 소르젠 살롱의 드레스를 입는 게 더 아름다울 거라고 폭언을 하지 뭐예요.’
라티아는 망신을 당한 그날 이후로 파티 공포증까지 생겨서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해서 라티아에게 붙은 추문, ‘어딘가 하자가 있어서 약혼자가 없다.’ 또는 ‘정신이상자여서 동물을 괴롭히며 즐기는 악녀다.’ 같은 소문이 더욱 불거졌다.
‘거기에 오직 나만이 카르시안을 괴롭혔다는 죄까지 더해졌지.’
엘레네의 유모가 후작저를 떠나서 퍼트린 엘레네의 험담은 고스란히 라티아의 차지가 됐었다.
과거를 상기하며 늘어져라 기지개를 켠 라티아는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하나 되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