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동화 속 공주님이 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하는 조건이 몇 개 있었다.
동물과 대화를 해야 했고, 금발을 길게 길러야 했고, 때로는 시련도 겪어야 했다. 시련이라면 지금 알버스가 라티아를 더 예뻐하고 있으니 충분히 겪고 있다.
‘내 머리칼은 하루에 백 번씩 빗질을 하고 있어.’
이제 남은 건 동물과 대화를 하는 것뿐인데, 그게 녹록치 않았다. 그때 엘레네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호냥이었다.
사실 엘레네는 호냥이를 알고 있었다. 글자를 배워 스스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어디서 들어온 건지 아기 고양이가 엘레네의 방으로 숨어든 것이다.
‘귀가 까딱거리는 게 너무 귀여워서 갖고 싶었어.’
엘레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제게 다가와 애교를 부리는 호냥이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가위를 찾아, 까딱거리던 귀여운 귀에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다행히 호냥이는 귀만 잘리고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즘 다시 보였지?’
후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버트가 귀를 치료해 주고 집사장과 그녀의 유모가 기르고 있던 것이다.
‘난 반가웠을 뿐이야.’
그래서 유모와 함께 달려갔던 건데, 호냥이는 엘레네를 원수 보듯 노려보며 하악질까지 했다. 호냥이는 엘레네를 절대로 따르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유모만 기다렸다. 마치 유모 때문에 이곳에 남아 있다는 듯이.
해서, 최근 엘레네는 호냥이가 이 저택의 아가씨인 자신보다 하인들을 잘 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고양이를 만질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던 유모도.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지.’
엘레네의 입가에 천진난만해서 더욱 소름 끼치는 미소가 걸렸다.
하녀들의 도움으로 거울 앞에서 몸에 드레스를 대보던 엘레네는 뭔가가 살짝 심심하게 느껴졌다.
‘티아라를 안 써서 그럴까? 목걸이가 빠져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제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그 새가 없어!’
그루안 상단주와 함께했던 오찬 때 라티아는 어깨에 삐로리를 얹고 나타났다. 그 새가 시선을 사로잡은 덕분에 엘레네가 물려준 드레스의 촌스러움이 완전히 묻혔다.
‘언니에게 말해서 그 새를 달라고 해야겠어.’
새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부러뜨려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엘레네는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 새까지 얹어 두고 파티에 참석한 자신을 가만히 상상해봤다. 영애들은 자신의 드레스에 시기와 질투, 부러움으로 눈을 빛낼 것이고 영식들은 어깨에 있는 새가 궁금해서 다가올 것이다.
‘그럼 순식간에 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주인공이 되겠지?’
엘레네의 오랜 약혼자인 헨델 이플린트 백작 영식은 어른들의 관심을 받는 걸 최고의 가치로 쳤다. 자신의 약혼자인 엘레네가 또래의 관심을 한데 받고 있으면, 그 옆에 있는 헨델 또한 관심을 받을 터.
‘그럼 헨델 님도 날 예쁘게 봐줄지도 몰라!’
엘레네는 헨델이 참 좋았다. 잘생긴 얼굴은 물론이고 금발과 푸른 눈이라니.
‘왕자님 같잖아!’
실제로 헨델의 이모가 에메르나 황비라고 했다.
‘나는 공주님, 헨델 님은 왕자님.’
헨델과 결혼을 하게 되면 동화 속 모든 공주님들이 그러하듯 엘레네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헨델 님은…….’
문제가 하나 있다면 왕자님인 헨델이 엘레네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헨델은 어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엘레네와 약혼을 유지하고 친한 척하는 것일 뿐, 마땅히 엘레네와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지금까진 그랬지만 이번 전야 파티에서 내 모습을 보면 헨델 님의 생각도 변할 거야.’
엘레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때, 하녀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라티아 언니가?”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라티아였다.
하녀들이 키득거리며 한 말에 따르면 라티아와 엘레네는 조금 다르다고 했다. ‘사생아’ 또는 ‘이복자매’라고 했는데, 그 말은 너무 어려워서 6살인 엘레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엘레네에게 라티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니에게 드레스랑 장신구를 주면 아버지가 새로 사 주시니까!’
그러니 엘레네는 라티아를 밝은 얼굴로 맞이할 수 있었다.
“어서 와, 언니! 계단을 올라오느라 힘들지는 않았어?”
라티아의 방은 1층이지만 엘레네의 방은 3층이었다.
엘레네는 일전에 아버지가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하고 손님과 인사했던 걸 떠올렸다. 그래서 그것을 변형해서 라티아에게 말했지만, 이건 올바른 인사가 아니었다. 하녀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라티아의 눈빛이 살짝 심드렁해졌다. 하지만 엘레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반짝반짝 눈만 빛내고 있었다.
라티아가 말했다.
“그러게. 좀 힘드네. 넌 매일같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데 힘들진 않니?”
“엘레네는―”
“내게 계단은 아직도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서 말이야. 아버지께서 걱정하셔서 1층에서 생활하는 거거든.”
“어?”
“난간 잘 붙잡고 다니도록 해. 어머니도 때때로 다리를 접질리지 않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라티아는 순식간에 판도를 바꿨다.
‘어차피 엘레네는 1층과 3층의 차이도 몰라.’
하녀들은 비웃을지언정, 알버스와 엘레네의 사이를 이간질하기엔 이렇게 촌스럽고 일차원적인 방법이 딱이다. 그 예로, 지금 엘레네는 ‘언니가 1층에서 사는 게 아버지가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라티아는 그런 엘레네를 지나쳐 멋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공부 책상 위에 산수 문제가 적힌 종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요즘 날 따라잡겠다고 산수 공부를 한다더니.’
한 자릿수 덧셈인데도 죄다 틀린 채였다.
방을 더 둘러보던 라티아가 엘레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니가 손님으로 왔지, 엘레네?”
“어, 어?”
“이렇게 멀뚱멀뚱 세워 놓다 못해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는 건, 너희 어머니께서 가르치신 걸까?”
라티아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에 엘레네의 주변에 서 있던 하녀들이 숨을 헙 집어삼켰다.
‘우리’ 어머니가 아니고 ‘너희’ 어머니다.
이 말은 레이시나가 제 어머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엘레네는 눈치채지 못했다.
“으응. 아니야. 언니가 온 게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엘레네는 손님인 라티아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면 돌아온 레이시나에게 혼날까 봐 얼른 하녀를 시켜 차와 과자를 가져오게 했다.
“언니, 자. 여기에 앉아.”
엘레네가 방긋 웃으며 라티아에게 소파를 권했다. 라티아는 그곳에 앉았고, 엘레네의 하녀가 차와 과자를 가져왔다.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라티아를 힐끔거렸다.
‘이상하네…….’
라티아는 매일 패악을 부리긴 했어도 어딘가 묘하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그게 부모님의 사랑과 주변인들의 관심을 갈구하기 때문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라티아는 어떠한가? 마치 ‘정말 사랑받는 아가씨’처럼 우아하고 침착했다. 한 살 아래인 엘레네를 이용해서 손님 대접을 톡톡히 받아 내는 것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기품이 흘렀다.
‘뭐, 그래 봐야 사생아지만.’
하녀의 얼굴에 이죽거리는 비웃음이 스쳤다. 라티아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엘레네. 그 이야기 들었니?”
“응?”
“당분간 어머니는 외가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셔.”
“정말? 왜? 아버지가 베티랑 사랑해서?”
엘레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순진하게 물었다. 그 표정에 악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순수해서, 라티아는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라티아는 경악한 하녀들을 모른 척하며 어린아이답게 입가에 검지를 대며 말했다.
“쉿. 그런 말 어디 가서 하는 거 아니야.”
“핫.”
엘레네가 귀엽게도 양손을 쫙 펴고 입을 쏙 가렸다. 조금 눈치가 모자란 동생에게 입단속시키는 것마저 진짜 언니처럼 자연스러웠다.
라티아가 말했다.
“내가 아버지 상단의 제2 관리자라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래서 어머니께 있던 권한이 일부분 내게 왔어.”
“권한……?”
“예를 들면 이런 거야.”
엘레네가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라티아가 방금 차를 내려 두며 저를 비웃은 하녀를 손가락질했다.
“넌 이 시간부로 해고야.”
“네,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하녀가 화들짝 놀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하녀를 보는 자색 눈동자가 너무도 서늘했다.
‘이, 일곱 살…… 맞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철했다.
마치 하녀가 속으로 자신을 사생아라는 이유로 비웃은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라티아에겐 그만한 위압감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발 해고만은…….”
“어머나.”
라티아가 꺄르르, 은 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웃었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의 일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것뿐이었는걸.”
“아…….”
하녀는 제가 놀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속으로 괘씸한 마음이 들어 라티아를 노려본 순간.
‘헉.’
다시 그 차가운 보라색 눈빛이 하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건 꼭 ‘한 번은 봐줄게.’ 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 같았다. 해서, 하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예전의 그 아가씨가 아니다.’
하녀들의 놀림에 씩씩거리다가 방으로 뛰어들어가 몰래 울던, 하인이 발을 걸어 넘어져도 새 옷을 달라 말 못 해 우뚝 서서 눈물만 흘리던, 부모님의 관심을 받는 방법이 물건을 깨트리는 게 전부라고 알고 있던.
‘그 아가씨가 아니야.’
하녀는 제 목이 다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이번엔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숙였다.
“놀리지 마셔요, 아가씨.”
존경을 담은 목소리로 그렇게 자신을 낮췄다.
라티아는 잠깐 맛보기 좀 보여 준 거 가지고 바로 답싹 엎드리는 하녀를 심드렁하게 봤다.
‘고작 이 정도로 다스릴 수 있는데.’
회귀 전, 자신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들의 사랑을 갈구했던 걸까?
라티아가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미안해. 놀랐구나. 잠시 뒤로 물러서서 마음을 추스르도록 해. 수잔, 도와줄 거지?”
“네, 그럼요. 아가씨.”
수잔이 얼른 엘레네의 하녀들을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그 탓에 그녀들은 엘레네와 라티아의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