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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35화 (35/186)

35화

다음 날, 난 후원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동생이자 약초 밭지기인 길버트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에게 긴히 부탁할 것도 있고.

그런데 도착한 후원은 어째선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 하아아아…….”

길버트의 주변에 술병이 널브러진 건 물론이고, 집사마저 그런 길버트 앞에 서서 비통해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난 어깨에 얹어 뒀던 삐로리를 수잔에게 넘기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길버트. 집사장.”

“아, 아가씨.”

길버트가 날 부르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집사장은 내게 고개만 꾸벅 숙여 보일 뿐이었다. 명백한 무시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길버트에게 물었다.

“또 대낮부터 이렇게 술을 마시다니.”

반쯤은 농담으로 했지만 초상집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 탓에 걱정처럼 들렸다.

나는 길버트의 주변에 늘어진 술병을 새는 걸 그만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리 길버트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지만, 아무 일도 없이 이렇게 심란한 표정으로 취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의 의아한 물음에도 길버트는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 집사장이 말했다.

“고양이가 아픕니다.”

“……응?”

좀 당황스러워서 올려다보니, 집사장의 표정은 세상이라도 잃은 것처럼 슬퍼 보였다. 내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이자, 그가 세상 진지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고양이가 많이 아픕니다.”

“아…….”

그렇구나. 고양이가 많이 아프구나.

털 뭉치 친구들이 아프다니, 그건 상당히 심각한 일이다. 나도 집사장을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여기에 있는 길버트는 수의사 역할도 같이 한다고 들었는데, 길버트의 손을 떠난 일인가?”

“그것이…….”

하아아아, 집사장은 내 앞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또한 모시는 아가씨를 앞에 두고 할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집사장이 날 싫어하고, 무시하는 걸 떠나서 고양이가 아프다잖나.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이번엔 길버트가 집사장 대신 음울하게 대답했다.

“치료하지 말라더군요.”

“뭐? 누가!”

놀라 되물으니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출처는 길버트의 어금니였다. 그가 주변에 보이는 건 죄다 짓씹어 버릴 듯 서늘하게 말했다.

“우리 ‘호냥이’를 아프게 한 장본인이 말입니다.”

호냥이.

그 이름에 나는 번쩍 회귀 전 삶의 사건을 떠올렸다.

내가 6살 무렵이었다.

‘집사님께서 저택 내에서 한쪽 귀가 잘린 고양이를 주우셔서 보살피고 계신대요.’

수잔이 그런 말을 했다.

다친 채로 비까지 흠뻑 맞아서 자칫하면 큰일 날 뻔한 고양이는 집사의 발견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호랑이처럼 금색과 주황색 털 위에 검은 줄무늬가 있어서 집사님께서 ‘호냥이’라고 이름을 붙였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집사는 동물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래서 집사는 호냥이를 입양하지 못하고 후원에서 사용인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는데, 그 호냥이는 딱 1년 뒤에 죽었다.

“……엘레네구나.”

나의 동생, 엘레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길버트와 집사장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내 ‘알고 계셨군요.’ 하는 표정으로 다시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호냥이를 좀 볼 수 있을까?”

“창고에 있습니다만…… 상태가 심각합니다. 보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집사장이 나를 말렸다. 이건 날 훼방 놓으려는 게 아니고 걱정하는 것이다.

당연했다. 호냥이는 엘레네의 의해 극심한 학대를 당한 모습일 테니까.

나는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싸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환생 전의 ‘나’의 지식을 빌려 엘레네를 표현하자면 저 두 단어로 말할 수 있었다.

엘레네는 약한 것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을 즐겼다. 그 극단적인 예가 바로 이 호냥이다.

회귀 전, 엘레네는 호냥이가 자신의 유모를 잘 따르는 게 싫다고 주기적으로 괴롭혔다. 심지어는 축 늘어진 호냥이를 들고서 유모가 아기 고양이의 밥을 챙겨 오기 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유모는 놀라서 밥그릇을 떨어트리며 넘어졌지만, 엘레네는 해맑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호냥이가 나빴어. 나는 동화 속 공주님보다 예쁜데 유모만 좋아하잖아.’

엘레네의 유모는 집사장과 함께 호냥이의 밥을 챙겨 주는 ‘캣맘’이었다. 호냥이가 어쩌다 와서 만지작거리다 가는 엘레네와 밥을 챙겨 주는 유모 중, 유모를 따르는 건 당연하단 말이다.

이 사건으로 유모는 질겁해서 후작가를 떠났고, 엘레네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탓에 엘레네의 죄를 내가 뒤집어썼다는 거다.

‘동생에게 이런 나쁜 소문이 생기게 놔둘 순 없지 않니.’

‘라티아는 착한 언니지? 부모님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예쁜 딸이잖니.’

나도 처음엔 싫다고 했다. 이건 회귀 전의 내가 듣기에도 터무니없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 이 아비의 말을 거역하겠단 게냐!’

‘라티아, 실망이구나. 이 어머니는 너를 무척 착하고 다정한 언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나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라티아 아가씨만 생각을 바꾸면 후작가엔 다시 평화가 올 텐데…….’

아버지, 어머니에 이어 베티와 다른 하녀들까지 나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아버지는 기특하다며 내게 사탕 한 병을 줬고, 난 사탕 한 병과 ‘정신 이상자’라는 누명을 맞바꿨다. 이후 난 세간에 엘레네의 잘못이 알려질 경우, 몽땅 떠안는 대역으로 살았다. 심지어 엘레네가 말채찍으로 말과 카르시안을 괴롭힌 죄도 내가 뒤집어썼다. 그래서 가족들은 교수형인데 나 혼자만 참수형이었던 거다.

바보 같은 부모님은 엘레네가 악독한 짓을 저지르면 혼낼 생각을 하긴커녕 그걸 ‘엘레네의 평판이 나빠지면 약혼자 가문과 사이가 나빠질 거야!’라며 감추고 내게 덮어씌울 생각뿐이었다.

난 거기에 동조해서 기꺼이 나를 희생했고.

하지만 이젠 아니다.

회귀 전의 그 수모를 또 겪을 생각도 없고, 호냥이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친 것뿐이라면, 희망은 있다.

난 결연한 얼굴로 집사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좀 볼게요.”

“아가씨가 봐서 뭘 어쩌겠다고…….”

길버트가 속상한 마음에 내게 핀잔을 뒀다. 하지만 난 그를 흘기는 대신 술이 흘러 끈적거리는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상심이 크겠어, 길버트.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

“호냥이를 이대로 방치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어서 술 좀 깨고 와. 치료를 해야 하는 의사가 이러면 어떡해.”

“하지만 엘레네 아가씨가 치료하지 말라고…….”

길버트가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자꾸 망설였다. 난 그런 길버트를 달래 주고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냥이는 어디에 있지?”

“아가씨, 여기예요.”

따라 들어온 수잔이 한구석을 가리켰다. 나는 그곳에 추욱 늘어진 호냥이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수잔도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호냥이의 상태는 척 봐도 심각했다. 마음을 다잡고 왔어도 놀랄 정도였다. 나는 두려운 마음이 드는 나머지 얼어붙은 다리를 한 번 툭 때리고는 호냥이 근처로 다가갔다.

“호냥아…….”

새액, 새액.

호냥이는 거의 숨만 붙어 있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아니, 엘레네는 이제 겨우 6살인데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괴롭힐 수 있는 거지? 하긴, 내가 그런 범죄자의 심리를 어떻게 알겠어.

나는 호냥이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펴봤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내상은 심하지 않습니다만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 호냥이는…….”

뒤따라온 집사장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당장 수술을 준비하세요. 길버트더러 지금 당장 칼날민트잎을 좀 씹으라고 해 주시고요.”

집사장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알겠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곧바로 수잔의 어깨에 앉아 있는 삐로리를 바라봤다. 다행히 삐로리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여 줬다. 마치 ‘이런 짓을 한 동생을 혼쭐내는 건 나쁜 짓이 아니야.’ 하듯이.

수호천사에게도 허락받았겠다.

나는 길버트를 지나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호냥이를 꼭 살려. 엘레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 *

엘레네 글라델리스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비록 어머니, 레이시나는 친정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요즘 아버지, 알버스는 라티아를 예뻐한다지만.

‘그래도 황성 경매 전야 파티에 참석하는 건 나뿐이야!’

그리고 오늘, 그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가 도착했다.

분홍색 공단에 하얀 샤 천을 두르고 장미 넝쿨 모양으로 짠 레이스로 꾸몄다. 투명한 크리스탈과 표면이 반질반질한 로즈쿼츠,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른색 토파즈로 장식을 하여 아주 사랑스럽고 화려한 최고급 드레스였다. 게다가 오늘은 그 괘씸하던 고양이, 호냥이도 혼쭐을 내줬다.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을 나를 무시하다니! 엘레네는 공주님인데!’

엘레네에겐 꿈이 있었다.

그건 바로 동화 속 공주님처럼 꿈에 그린 듯 잘생긴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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