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34화 (34/186)

34화

나는 너무 놀라 덜그럭거렸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순진하게 웃었다.

“네!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으흠, ‘유익’이라……. 어려운 단어를 쓰는구나.”

“앞으로 아버지를 ‘보좌’해서 많은 분들을 만날 텐데, 사용하는 단어도 조금씩 바꾸는 게 좋다고 그래서요.”

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히 대상단주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어린아이에게 벌써부터 단어 선택의 중요성을 가르치다니.’ 하는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이제 첫 수업을 들었으니 알겠지. 어떨 것 같으냐.”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예쁜 모습은 아니고 무척 탐욕스러운 빛으로.

“엘레네의 이야기죠?”

나는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을 하거나 되묻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이 성격이 급한 데다가 나쁜 아저씨는 그런 걸 싫어하니까. 그럼 내가 여태까지 일궈 놓은 호감까지 무너지고 말 거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자, 아버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역시 라티아는 영특하구나.”

“뭘요. 아버지와의 모든 대화가 너무 소중해서 꼭꼭 기억하고 있을 뿐인걸요.”

최대한 작위적이지 않도록 내숭을 부렸다.?

아버지의 눈동자에 ‘엘레네와 정 반대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죠, 아버지. 바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의 비위를 쏙쏙 맞추는 저와 천방지축인 엘레네를 더 많이 비교하세요. 그럴수록 제가 예뻐 보일 테니까요.

나는 속으로 킬킬킬, 음흉하게 웃었다.

엘레네는 아버지의 말을 맨날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서 ‘뭐가요?’, ‘그랬어요?’ 했다. 이런 사소한 것도 하나씩 쌓이다 보면 격차는 어마어마하게 벌어질 터.

나는 보란 듯이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음……. 확실히 어렵긴 했어요. 첫날부터 단어의 중요성을 배웠는걸요.”

엘레네가 소중해서 그 아이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언니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제가 아버지께 언젠가 도움이 될까, 국어사전을 미리 읽어 두지 않았더라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물론 이번 생이 아니고 회귀 전에 달달 외우듯이 읽은 거지만.

엘레네에겐 어려울 거라는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살풋 찌푸려졌다.

아직까지 아버지의 사랑은 엘레네가 독차지하고 있다. 아무리 내가 기특해 보인다 하더라도 엘레네가 나보다 못하단 소리는 달갑지 않을 터.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재빨리 살피고 덧붙였다.

“선생님은 아이를 처음 가르치시나 봐요. 단어의 중요성을 가르친 후 곧장 법을 꺼내지 뭐예요. 깜짝 놀랐어요.”

“법이라고?”

아버지도 놀라서 되물었다.

“네. 민상법에 대해 간략하게 배웠는데, 이건 너무 어려워서 복습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아버지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기적일 정도로 부를 쓸어 모은다더니. 역시 나눌 줄도 가르칠 줄도 모르는 모양이군.’

조금 전 ‘과연 대상단주!’ 하고 생각하던 아버지의 생각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게 보였다.

물론 시엘은 엄청나게 뛰어난 교사다. 교사의 덕목을 공부하고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내가 여기서 계속해서 나의 능력을 뽐내고 시엘을 칭찬했다가는 아버지의 심기가 완전히 뒤틀려, 생트집을 잡을 게 뻔했다. 갑자기 시엘과의 만남을 불허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이에게 엘레네의 교육을 맡길 순 없지. 한동안은 너 혼자 교육을 받는 게 좋겠구나.”

“네, 알겠어요.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긋 웃었다.?

아버지도 참, 진짜 생각 없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이’인 시엘에게 엘레네는 못 맡기면서 장녀인 나는 맡긴다고? 아주 대놓고 “차별하고 싶어 죽겠구나!” 하고 말하지그래.

회귀 전에 이런 당당한 차별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사랑을 받겠다고 아등바등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이대로 아버지가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아, 참. 라티아.”

“네?”

“곧 황성 경매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느냐?”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왜 갑자기 황성 경매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설마 시엘과 나눈 대화를 훔쳐 들었나? 내가 아버지가 아닌 시엘과 함께 황성 경매에 참석한다는 걸?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에선 나를 업신여기는 기색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몰랐다고 시치미를 뗄까, 알고 있었다고 말할까? 어차피 시엘과 참석하긴 할 건데…….

이때, 나는 벼락이 내리치듯 깨달았다.

아! 시엘이 들고 온 선물!

아버지는 내 생각대로 이리저리 놀아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아둔한 사람은 아니다.

황성 경매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이고, 시엘이 가져온 선물이 담긴 쇼핑백은 엄청난 고급품이다.

황성 경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엘이 “그곳은 사교 파티입니다.” 하고 바람을 넣었을 거라 예상했겠지.

그렇단 말은 앞으로 아버지가 보일 반응으로 예상되는 건 두 가지다.

1. 엘레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혹은.

2. 이 아비와 함께하자.

차라리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네, 다음 달이라고 들었어요.”

“음. 그래.”

아버지의 얼굴에 ‘역시’ 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수염을 말끔하게 민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황성 경매의 참석자들은 ‘조기 교육’의 이유로 자녀와 함께 참가하기도 한단다. 5년 전, 너무 어린 너를 대신해서 엘레네의 약혼자도 그곳에서 구했지.”

네. 1살인 엘레네를 데리고 가서 2살인 약혼남과 이어 줬죠. 저도 2살이었는데 말이에요.

나는 속으로만 비아냥거렸다.

아버지가 내 눈치를 살피는 듯, 아니. 반응을 살피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너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기뻐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일단 환하게 웃음꽃부터 피우고 봤다. 아버지의 입술에 일순간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아무래도 원했던 반응인 모양이다.

“조금 전 공문이 왔단다.”

“공문이요?”

“그래. 이번 파티에 참석하는 자녀들은 아무리 부모와 동석한다 하더라도 이성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구나.”

“이성 파트너요? 제, 제가 배우기로는 이 파티에서 많은 약혼담이 오고 간다고 했는걸요. 그런데 이성 파트너와 함께하게 되면…….”

“아마 무분별한 약혼을 막기 위함인 것 같구나.”

“그런……!”

“현 황제 폐하께선 황권 강화에 열성이시지. 이 이상 귀족들이 혼맥을 통해 권력을 키우는 걸 원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나는 당황스러워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귀 전엔 이런 말 없었는데?!

게다가 이 세계에서 데뷔탕트는 15세 전후에 치러진다. 부모님과 함께 황성 경매 전야 파티에 참석하는 이들은 나이가 많아야 14살, 15살이란 말이다.

그런데 부모님과 함께여도 꼭 이성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니! 이건 뭐, 거의 대놓고 ‘그들만 사는 세계’를 구축하겠단 말이잖아!

내가 동요하자 아버지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엘레네는 일찌감치 약혼자를 마련해 둬서 참석하는 데에 무리가 없지만, 라티아 너는…….”

네. 아버지께서 구해 주지 않으셨죠.

이렇게 되면 아버지 대신 시엘이 나를 데려가 준다고 하더라도, 갈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너도 엄연한 내 딸이지. 너만 두고 파티를 즐기고 올 수는 없으니…… 그래.”

아버지가 선심 쓰듯 말했다.

“그날은 하루 휴가를 주도록 하마.”

“…….”

“수잔과 함께 정원에서 피크닉이라도 하는 게 어떠하느냐?”

아버지는 이게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다는 듯 인자하게 웃기까지 했다. 더 화가 나는 건, 아버지의 얼굴엔 그 어떤 악의도 없어 보인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가 나에게 ‘그 파티에는 이성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더라.’ 하고 알려 준 건 순전히 정보 전달일 뿐이었다.?

그 말은 즉, 내가 그간 아버지에게 도움을 준 덕분에 간신히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내가 사람이라도 하나 고용해 주마.’ 또는 ‘이제라도 약혼을 알아보는 건 어떠하냐.’가 아니고.

고작, 이거!

‘이러한 이유로 넌 못 가니까 집에 있어라.’

고작, 이거 말이다!

이렇게 되니 회귀 전에 열렸던 황성 경매 전야 파티도 이성 파트너와 함께했던 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난 회귀 전 지금처럼 아버지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몰랐나 봐.

눈앞에서 무도회를 잃었다. 신데렐라가 된 심정이다.?

나는 허탈감과 잔불 같은 분노를 꾹꾹 억누르며 말했다.

“꼭 이성 파트너가 있어야만 참석할 수 있는 걸까요?”

“그래. 그것도 귀족에 한해서, 라는구나.”

아버지는 별생각 없이 내게 정보를 술술 불어 줬다.

약혼이나 결혼관계일 필요는 없으나 상대는 귀족이어야 한다는 게 그 조건이었다. 이미 약혼관이 있는 이들은 어쩔 수 없으니 약혼관이 없는 이들의 혼사라도 꽉 막으려나 보다.

“다른, 다른 귀족들은 항의하지 않았나요?”

“해서 지들이 어쩌겠느냐? 여태 약혼관을 갖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약한 이들뿐인데.”

아버지가 킬킬 웃었다.

가문끼리 정략을 맺는 경우도 있으니, 아버지 말마따나 약혼관이 없단 말은 힘이 없단 뜻이다. 아무래도 황제는 정말 ‘그들만 사는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내 방 앞을 떠났다. 나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수잔이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응, 난 괜찮아.”

하지만 내 목소리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 못해 흙바닥에 처박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너무도 더러운 나머지, 난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꼭 약혼이나 결혼관계일 필요는 없지만 귀족이어야 한다, 라…….”

그런데 이때, 내 머릿속에 불현듯 묘수가 떠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수잔은 시무룩한 얼굴로 보석함에 담은 장신구를 매만지고 있었다.

‘결국 이번엔 못 쓰겠구나…….’

그녀의 얼굴에선 실망감과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수잔.”

“네?”

“한 달 뒤에 그거 다 쓸 거야.”

“……네? 다 쓰다니요, 어떻게요?”

수잔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난 대답 대신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날, 날 최고로 예쁘게 만들어 줘야 해. 알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