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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31화 (31/186)

31화

시엘의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하지만 엘레네도 아주 영특한 아이로, 분명 한 번 보시기만 하면…….”

“아아, 그렇죠.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차녀에 대한 소문은 아주 많이 들었어요.”

“그렇죠! 역시 영특하고 귀여워서 벌써부터 소문이……!”

“아직 두 자릿수 덧셈도 못 한다면서요?”

“……!”

“켈로한 재상이 연 티파티에서 산수 능력을 뽐내는 간이 수학 경시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첫 문제부터 오답을 적어 냈다고요.”

“그건…….”

“문제가 아마, 20+20이었던가요.”

그러고 보니 카르시안을 데리고 오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명망은 굉장히 높다.

자식에게도 혹독한 교육을 한다더라, 아카데미 못지않게 많은 교과목을 가르친다더라…….

존경과 동경 받을 만한 소문이 무성한 사이에서, 드디어 그 실체를 확인할 기회가 왔다. 하여, 티파티에서 열린 간이 수학 경시 대회에는 꽤 많은 어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무엇보다 ‘재상’의 가문에서 열린 만큼, 눈에 들면 황실과 연줄이 닿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엘레네가 홀라당 까먹고 왔다. 아버지가 카르시안을 떠안은 이유에는 엘레네가 깎아 먹은 가문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함도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시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엘레네 아가씨는 이제 겨우 여섯 살이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죠. 그 경시 대회에 참석한 영애들은 모두 열 살 이상이었으니까요.”

“그, 렇습니다. 애초에 그런 곳에서 주눅 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런데 이상하죠.”

“……예?”

“여기에 계신 라티아 아가씨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인데 여덟 자리까지는 능숙하게 암산하고, 주판을 이용하면 열 자리, 열한 자리까지도 계산이 가능한데도요.”

아버지가 입을 딱 다물었다.

“라티아 아가씨에게 뛰어난 산수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건 아닐 테고.”

“…….”

“보통 그런 큰 티파티는 자매를 함께 데려가거나 장녀만 데려가는데 차녀인 엘레네 아가씨만 데려가셔서 ‘당하지 않아도 될 창피’를 당한 것도 그렇고.”

시엘이 고개를 살포시 기울였다.

매혹적이고 약간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의 얼굴에 ‘정말 모르겠네요.’라는 순진한 의문이 떠올랐다. 심지어 시엘은 내가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부분까지 건드렸다.

“후작님께서 왜 이렇게 엘레네 아가씨를 이렇게 끼고도는지 모르겠네요. 엘레네 아가씨가 수업에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따라올 리가 만무한데 말이에요.”

즉 ‘라티아보다 능력도, 실력도 안 되는 애를 왜 자꾸 키우려고 하냐. 나였으면 걔를 포기하고 라티아에게 올인했겠다.’ 같은 말이었다.

여기서 난 감탄했다.

사실 내가 궁극적으로,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던 게 바로 이거다. 아버지에게 엘레네보다 내가 더 쓸모 있다는 걸 인식시키는 것 말이다.

비록 사생아지만, 충성도가 높으며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귀찮게 하지 않는 자식이 바로 나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아버지는 분명 나를 더욱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면 내게 더 많은 일을 맡길 거고, 나는 자연스레 후작가 일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깊숙하게.

이후 나는 클로드가 돌아왔을 때 후작가를 팽해 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건 천천히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아직 시작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고 말았던 건데, 이걸 또 시엘이 건드려 준다.

아버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질렸다. 엘레네를 사랑하지만 그 아이가 효용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하지만 사랑하는 엘레네를 당장 내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야 제 딸이니까요. 저는 두 딸을 모두, 공평하게 사랑합니다. 장녀로서 누리는 게 있는 만큼 차녀로서 차별받는 게 있는 법이죠. 전 그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파티나 공적인 자리에 두 아이를 번갈아 가며 데려가곤 합니다.”

“아하.”

“티파티에 차녀인 엘레네만 데려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라티아는 장녀고 언니라는 이유로 혼자도 다니는데, 엘레네는 아니거든요.”

순간 시엘의 표정에 ‘내가 알아본 바로는 라티아 아가씨 혼자 파티에 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게요, 선생님. 아버지가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시네요.

하지만 여기서 실랑이가 길어져 봤자 좋을 건 없다. 오늘은 내 첫 수업이고, 이러나저러나 내 보호자는 아버지다. 아무리 무급으로 날 가르치는 거라지만 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하면 시엘과 만날 길이 없어진다.

나는 적당히 상황을 보다가 나섰다.

“아버지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음?”

“엘레네는 마음이 무척 여리고 순하잖아요. 선생님의 수업이 어려워서 엘레네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언니로서 속상할 것 같아요.”

“음…….”

“전 엘레네의 언니잖아요. 시엘 선생님의 수업은 저도 처음이에요. 그러니 제가 한 번 겪어 보는 건 어떨까요?”

내 말에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엘레네는 실제로 자존심이 세서 한 번 토라지면 달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음 약한 건 모르겠고.

아무튼 엘레네가 무작정 시엘과 공부하다가 나와 비교가 되어 토라지면 아버지도 꽤 귀찮아진다.

또 보석이니 드레스니 사 달라고 하여, 돈을 펑펑 써야 하니까.

하지만 내 말대로 내가 실험작이 되면?

이야기가 좀 더 쉬워진다.

게다가 지금 난 일부러 선생님보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말했다. 요컨대 시엘에게 무시당한 아버지의 자존심도 회복하면서 엘레네에게 낭비될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이뿐이란 거다.

계산을 마친 아버지의 눈동자가 다시 휘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언니라서 그런지 생각이 깊구나. 그래, 알겠다. 네 뜻에 따르마.”

그렇게 말하는 건 딸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의견을 존중해 주는 멋진 아버지 같았다.

나와 시엘은 아버지를 뒤로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바보야. 차라리 다른 응접실이라도 내주든가.

아마 지금쯤 ‘아차! 방으로 보내면 안 됐는데!’ 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방으로 오자 수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그간 안녕하셨죠?”

수잔과 시엘이 다정다감하게 인사를 나눴다.

내가 시엘을 맞이하러 간 사이 수잔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줬다.

“이거 받으세요.”

시엘이 여태 들고 있던 쇼핑백을 수잔에게 넘겼다.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요.”

“어머, 뭘 이런 걸 다…….”

수잔이 빙긋 웃으며 쇼핑백을 힐끔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순간 수잔의 얼굴에 뜻밖의 빛이 스쳤다.

응? 뭔데 저러지?

수잔이 훈훈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와 쇼핑백을 내밀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응. 알았어. 뭔데 그래?”

“보시면 알 거예요.”

수잔은 시엘에게서 받은 쇼핑백 중 일부를 내 침대 옆에 내려두고는 나머지를 챙겼다.

“그럼 전 카르시안 도련님께 다녀올게요.”

아하, 절반은 카르시안 거였구나.

수잔이 나가고 나는 시엘과 마주 앉았다. 나는 시엘이 척척 수업 준비를 하는 걸 보며 물었다.

“그런데 대체 뭐예요?”

“선물이요? 별건 아니고, 아가씨께 곧 필요할 물건들이에요. 이따가 수업 마치고 함께 보시겠어요?”

“음,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뒤. 시엘이 말했다.

“자,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끄응…… 좋아요.”

나는 뻐근한 어깨를 쭉 기지개 켜며 말했다.

두 시간 동안 10분도 쉬지 않고 수업했다. 상업의 기초부터 관련된 법까지 전부 간단하게 훑어봤다. 오리엔테이션처럼 말이다. 이 사이 제휴 계약서도 작성했다.

시엘과 배우는 내내 나는 속으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엘은 괜히 대상단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법부터 관련 판례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그렇기에 법을 이용하고, 악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악용은 모르겠고, 이용하려면 나도 법을 배워 놔야 할 것 같다.

“아가씨는 어느 쪽에 더 관심이 가시나요?”

“전 역시 법에요. 특히 민상법을 주로 배우고 싶긴 한데, 그냥 산업법 전반에 관심이 가요.”

“음, 역시…….”

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와 대화가 무척 잘 통했지만, 옆에서 수업을 귀동냥하고 있던 수잔의 얼굴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사실 카르시안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돌아온 이후로 내내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다.

‘우리 아가씨는 분명 일곱 살인데…….’ 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하긴, 이제 겨우 7살이 열한 자리를 계산하고 산업법에 관심이 간다고 하는 건 너무 이질적인가?

나는 수잔의 눈치를 보며 시엘에게 말했다.

“참, 그건 그렇고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요.”

시엘이 천천히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알아내셨군요?”

“네, 맞아요.”

“와아!”

나는 뻐근했던 어깨를 위로 쭉 피며 반색했다.

시엘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저렇게 영특하고 예쁜 새는 처음 봤어요.”

시엘이 책상에 설치해 둔 해먹에 누워 꿀잠을 자고 있는 삐로리를 곁눈질했다. 나는 일전에 예리엘 만물 상단과 계약을 해서 얻는 무료 이용권을 삐로리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에 사용하겠다 말했다.

“그래서 일단은 비슷한 종이 있는지 알아봤는데 특징은 같아도 지능 면에서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렇지, 아무리 앵무새가 똑똑하다지만 삐로리처럼 영특하지는 않다.

“그래서 저희는 한 가지 다른 가설을 세웠어요.”

“다른 가설이요?”

“네.”

시엘이 가방에서 두꺼운 수첩을 하나 꺼냈다. 삐로리를 조사하는 동안 얻은 정보를 전부 정리해 놓은 거라고 했다.

시엘이 말했다.

“어쩌면 삐로리는 그냥 새가 아닐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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