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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30화 (30/186)

30화

방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네가 드디어 쓸모를 다하는구나!’

‘정말요? 아버지, 제가 쓸모 있나요?’

‘그래. 산수도 제법 하지, 도움이 되는 말도 하지, 그리고 이런…… 이런……!’

아버지는 내가 화분으로 옮겨 온 칼날민트를 아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누가 보면 조언을 해 준 사람이 칼날민트인 줄 알겠다. 하지만 나는 질투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는 것이 내 목표였으니 말이다.

앞으로 돌아올 어머니가 나를 아무리 핍박해도 아버지가 막아 주겠지.

이로써 아버지는 나의 방패이자, 저택에 가정불화를 일으킬 창이며 동시에 나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럼 나는 3년간 보다 편안하게 지내며 카르시안의 아버지, 클로드가 오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방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삐륵! 삐익! 빽!”

전투적으로 빵을 쪼아 먹는 삐로리와 빵 조각을 떼어 주고 있는 카르시안이 있었다.

시간을 보니 이제 점심시간 때다.

그런데 이제야 밥을 먹다니?

“어, 왔어?”

나를 본 카르시안이 아는 체를 해 왔다. 나는 믿기지 않아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물었다.

“설마 너도 아버지처럼 늦게 일어난 거야?”

난 분명 아침을 먹으라고 했는데.

의아하다는 듯 묻자, 카르시안이 그런 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일을 좀 하다가 늦었어. 그런데 삐로리도 안 먹었다기에 같이 먹고 있었어. 너도 곧 점심 먹으러 올 것 같기에.”

카르시안이 빵과 과일이 든 바구니를 눈짓했다. 내가 먹으라고 남긴 아침을, 카르시안은 내 점심으로 챙겨 주려고 남겼다. 뭔가 민망하면서도 가슴 안쪽이 따듯해졌다. 수잔도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카르시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길버트가 전해 준 줄 알았어. 이건 ‘아침’이야.”

“전해 줬어. 하지만 아침을 꼭 아침으로 먹을 필요는 없잖아.”

카르시안이 괜한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비죽거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길버트’라고 부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름이야 뭐, 어떤 사이든지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점심을 같이 먹자. 그렇지 않아도…….”

슬슬 하녀가 식사를 가지고 올 때가 됐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가씨,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녀가 식사를 가져왔다. 카르시안이 눈치껏 사각지대로 몸을 피했다.

수잔이 문을 열자, 무려 네 명의 하녀가 음식이 담긴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나도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해서 조그맣게 입이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하인이 거대한 테이블도 가져왔다.

나와 수잔이 놀라 얼어붙어 있는 사이, 숙련된 하녀들이 식탁을 꾸며 줬다. 식탁보는 물론이고 테이블 중앙에 화병까지 있는, 제대로 된 귀족 영애의 식사였다. 저번에 받은 진수성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식 있었다.

“후작님께서는 아가씨가 저녁 식사를 식당에서 함께 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하녀는 그런 전언을 남기고 돌아갔다. 내 대답도 듣지 않는 걸로 보아, 애초에 선택권은 없었나 보다.

물론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달칵, 하녀들이 몽땅 빠져나가고 숨어 있던 카르시안이 나왔다.

“와…….”

카르시안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식탁 의자는 하나뿐이어서, 나는 수잔에게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오도록 부탁했다.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식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침을 아침으로 먹어 둘 걸 그랬지?”

“……어, 어.”

저번의 진수성찬도 그렇고, 오늘 아침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받은 것도 그렇고, 사생아여서 저택의 천덕꾸러기이던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영 이상한 모양이다.

내가 우쭐대듯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앞으로는 이런 음식을 자주 받아 올 거라고.”

카르시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침 수잔이 의자를 가져왔고, 나는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그러니까 아침은 아침으로 먹자?”

“…….”

“알겠지?”

“……매일 아침.”

카르시안이 자리에 앉으며 나를 쳐다봤다.

“남겨 줄 거야?”

그건 마치 매일 제가 찾아와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수잔과도 함께 먹기 위하여 화장대 의자도 가져오라고 말하며, 카르시안에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귓가는 조금 붉은 듯 보였다.

* * *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카르시안에게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길버트가…… 내 삼촌이라고?”

“촌수를 따지자면 그렇게 돼.”

발단은 내가 ‘길버트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라고 말한 것이었다.

밥 잘 먹고 삐로리와 잘 놀던 카르시안이 우뚝 굳더니 갑자기.

‘네 가족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빤히 보는 게 아닌가.

심지어 이때 카르시안의 표정은 읽히지 않아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으로, 지금은 다시 그의 표정이 읽힌다.

이상한 일이었다.

상황에 따라 독심술이 안 되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능력이 사라지기도 하는 걸까?

알아보고 싶은데 어디서 뭘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모르겠다.

“너처럼 사생아래.”

“길버트가?”

“응, 아마 그럴걸?”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몇 번 들었는데, 말할 때마다 술에 취해 있어서.”

“아.”

그렇다면 이해한다.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후계자 자리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대. 그때부터 식물이 좋았다나 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후작가 사람인 거잖아. 난 여태 삼촌인 줄도 몰랐어.”

“아마 엘레네도 모를걸?”

카르시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덜그럭거렸다. 길버트가 삼촌이었다는 걸 여태 몰랐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카르시안 입에서 ‘엘레네’의 이름이 신경 쓰였다.

어라, 이상하네. 엘레네를 엘레네라고 부르지, 그러면 뭐라고 불러?

그런데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별로 달갑지도 않았고.

괜히 입술만 꾹꾹 짓씹고 있자니, 카르시안이 말했다.

“네 아버지가 후작 자리에 오르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대. 제적당한 길버트를 후작저에서 지내게 해 주는 대신 평생 무급으로 일하라고.”

“평생 무급이라고? 어째서? 길버트는 그걸 듣고도 알겠다고 했고?”

“응. 후작저에서 나가는 순간, 네 아버지 손에 죽었을 거라던데.”

카르시안이 서늘하게 비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길버트에게 후작저는 몸을 지킬 수 있는 성이자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감옥인 셈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길버트는 네게 길버트 글라델리스가 아니고 길버트라고만 소개한 걸 거야.”

기분이 미묘했다.

삼촌이었구나.

그를 동정하거나 안쓰럽게 여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흐음, 식물학자인 데다가 수의학 지식까지 있는 사람이 내 삼촌이라는 말이지. 게다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고, 나와 비슷한 처지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길버트는 날 알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대했었다.

이래서 그랬구나.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조만간 길버트를 다시 만나 봐야겠어.”

“뭐? 왜!”

카르시안이 드물게 학을 떼듯 말했다.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지?

놀라서 바라보니 제가 너무 과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달은 건지, 얼굴을 확 붉혔다.

‘아, 씨. 내가 왜 이러지?’

그리고는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카르시안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왜 그렇게 놀라? 내가 길버트를 만나는 게 이상해?”

“그런 건 아니지만…… 아, 몰라!”

괜히 성질을 부린 카르시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식사만 이어 나갔다.

붉어진 그의 귀 끝은 좀처럼 제 혈색을 찾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간 아버지를 도와 가문과 글라델리스 상단을 위해 일했다. 제2 관리자가 됐으니 꽤 중요한 일도 맡게 됐다. 아버지가 황실 경매에서 낙찰받고자 하는 물건도 알아냈다. 이를 이용해서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명성’을 좀 깎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 왔다.

“시엘 선생님!”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맞이해 줬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시엘도 두 손을 번쩍 들며 나를 반겼다. 그런데 그녀는 빈손이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이 몇 개씩이나 들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리엘 상단주.”

시엘이 온다는 것을 안 아버지도 그녀를 반기기 위해 현관으로 나왔다.

“제 요청에 긍정적으로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딸, 라티아의 스승이 되어주겠다는 감사한 일인걸요.”

아버지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이며 자상하게 웃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보이겠다는 듯 해맑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도 그런 나를 보며 아주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우리 부녀와 달리, 시엘은 이 상황이 영 마뜩찮은 모양이다.

하기야, 그녀의 은인인 카르시안을 학대했던 남자의 착한 척을 오래 보고 싶을 리가.

“자, 그럼 저희는 이만.”

시엘이 어서 방으로 가자며 재촉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 수업 말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방으로 가려는 나와 시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아버지가 장사치의 얼굴로 웃었다.

“공부방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저의 둘째 딸, 엘레네가 공부하는 곳이죠. 그곳으로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마침 엘레네도 공부방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인자하고 신사적인 귀족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시꺼먼 속을, 나는 훤히 읽고 있었다.

‘예리엘 상단주에게 받는 상업 교육이라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라티아 따위가 독점하도록 둘 수는 없지!’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에 탐욕스러운 생각이 가득 비쳐 보였다.

오호, 내가 얻은 기회를 엘레네와 나누게 할 작정이구나.

‘게다가 라티아의 방을 아직 옮기지 못했어. 들통났다간 곤란해.’

흐음. 그런데 이걸 어쩌지, 이미 시엘은 내 방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나는 시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녀는 비록 나처럼 독심술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 그건 안 되겠는데요.”

“네? 어째서죠?”

“전 여기에 계신 라티아 아가씨의 능력을 보고 매혹된 거라서요. 라티아 아가씨 외에는 교육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답니다.”

허투루 예리엘 만물 상단의 상단주 자리와 마탑주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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