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29화 (29/186)

29화

라티아는 곧장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제가 약초 밭에서 길버트와 대화를 나누고 약초를 캐내는 동안 알버스가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안 일어나셨다고요?”

“네. 어제.”

집사장이 조금 아니꼬운 표정으로 라티아를 힐끔거렸다. 마치 ‘너 때문에.’라고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는 프로 의식을 발휘해서 돌려 말했다.

“일이 좀 있었잖습니까?”

라티아에게 묻는 말이라는 것에 결국 책임을 돌리는 것은 같았지만 말이었다. 물론 라티아는 개의치 않았다.

“수잔, 지금이 몇 시지?”

“10분 후면 오전 11시입니다.”

“이미 하루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구나. 아무리 어제.”

라티아도 집사장이 그랬듯이 그를 흘겨봤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활짝 웃기도 했다.

“아버지가 하녀인 베티와 불륜을 저질러 화가 난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녀의 말에 집사장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알버스고, 레이시나를 끝내 잡지 못한 것도 알버스다.

‘근데 왜 나한테 책임을 전가해?’

애초에 딸에게 이런 사실을 들킨 것을 창피해하고 반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티아가 생글생글 웃자 집사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후작님이 기침하셨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수잔, 아가씨를 업무실로 모시고 가게.”

“네. 알겠습니다.”

수잔이 자연스럽게 명령을 받았다.

집사장이 알버스의 침실로 사라지고, 라티아와 수잔은 조용히 키득거리며 업무실로 향했다.

같은 시각 알버스는 침실에 암막 커튼까지 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으, 으으…….”

그는 악몽 속에서 달리느라 현실에서도 신음하고 있었다.

알버스는 가주 자리에 아주 어렵게 앉았다. 공작가의 딸인 레이시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아버지는 첩실에서 난 자식인 길버트를 더 예뻐했으니까.’

사실 알버스와 길버트는 이복형제다. 길버트는 한 차례 어머니가 다르다며, 후계자 싸움에 끼지 않겠노라 말했었다. 하지만 알버스는 길버트가 아버지에게 예쁨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가문에서 제적했다.

이후 알버스는 아버지가 생전에 전부 이룩하지 못한 공로를 몽땅 제 것으로 해서 입지를 다졌다. 여기엔 레이시나와 그의 친정, 공작가의 도움이 아주 컸다.

해서, 알버스에게 처가가 등을 돌린다는 말은 알버스에게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공작가가 작정하고 폭로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

후작위를 주었으니 도로 뺏을지도 모르니까. 알버스는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레이시나를 탓했다.

‘다, 다 레이시나 때문이야. 애당초 레이시나가 나를 잘 내조하기만 했더라면……!’

베티와 외도를 한 이유는 레이시나가 그녀의 가문이 알버스를 후작위에 앉혀 줬단 이유로 알버스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티는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알버스를 존경했고 추켜세워 줬으며 위해 줬다.

‘여자가 살가운 맛이라곤 하나도 없었잖아. 남편이자 가주인 나를 존경할 줄도 모르고!’

요컨대 레이시나가 꺾어 놓은 기를 베티가 모두 살려 준 것이다. 그러니 베티에게 마음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알버스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나는 공작가가 없으면…….’

알버스에게 있어서 처가란 비빌 언덕이자 족쇄였다.

알버스가 약점을 모으는 이유도 다 공작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약초를 제대로 재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상단은 계속해서 공작가의 상단에 기대어야만 하니까. 하지만 바람피운 걸 들켰으니, 이제 어쩌지?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지도 몰라!’

알버스는 악몽을 꾸면서도 현실과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노크를 하며 알버스의 악몽을 찢고 들어왔다.

“후작님, 라티아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건조하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알버스는 굉음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번쩍 떴다.

“헉…… 헉…….”

어찌나 강하게 잠에서 깼는지 심장이 다 아플 정도였다. 알버스는 술에 찌든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물었다.

“누가, ……왔다고?”

“라티아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라티아가……?”

“네. 업무실로 안내해 뒀습니다.”

그 순간 알버스의 푸른색 눈동자에 섬뜩한 이채가 튀었다.

‘그래. 어제 그 사달이 난 이유는, 베티와 바람피우고 있단 사실이 들킨 이유는 모두…….’

아직 숙취로 꽝꽝 울리는 머리가 어제의 오찬을 상기했다.

[라티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야. 내가 다 봤어. 저 베티라는 하녀는 실제로 부정도 하지 않았잖아? 그녀가 라티아의 방을 뒤졌어. 금품을 찾기 위해서. 아, 맞아. 그러다가 어떤 약을 발견했지?]

[그녀는 그 약을 보고 단박에 ‘후작님의 것이다.’라고 말했어. 나중에 라티아에게 들어 보니, 후작님의 서재에 똑같은 약이 있어서 오해를 받은 거라지 뭐야.]

[그런데 이상하지? 어떻게 베티는 그 약을 보자마자 후작님의 서재에 있는 약과 똑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마치, 후작님의 서재에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라티아가 데리고 온 새 한 마리 때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라티아가 그 자리에서 베티에게 화분을 주지 않았더라면. 베티가 금품을 훔쳤던 걸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레이시나가 친정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알버스의 눈동자에 불꽃 같은 분노가 일렁거렸다.

‘그 망할 계집…….’

모든 게 라티아 때문이었다.

‘요 며칠 내가 좀 잘해 줬다고 주제도 모르고 기어올라, 감히 내 집의 평화를 깨?’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알버스는 불호령을 내리듯 외쳤다.

“지금 당장 세숫물을 가져와!”

알버스는 라티아를 만나자마자 머리채를 잡자고 다짐했다.

* * *

“흐음, 늦네.”

나는 소파에 앉아 발을 달랑거리며 중얼거렸다.

업무실 책상에 있는 쿠키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지만 열심히 참았다. 뭐 하나로도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라티아!”

아버지가 들어왔다.

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놀라서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엘레네가 물려준 드레스 자락을 늘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버지, 오셨어요?”

아버지는 내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네가 감히!’ 그런 표정이 읽혔다.

꽉 움켜쥔 주먹부터 흉흉한 눈동자, 그리고 악다문 입술을 보건대 곧 손찌검이 날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표정도 읽고, 행동도 읽었는데 당해 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오히려 아버지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

내가 도망치거나 겁을 먹어 물러서는 기색을 보였을 경우 단박에 저 손이 뻗어와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을지도 모른다.

‘이 계집이…….’

실제로 아버지는 그럴 생각 만만이었는지 내가 다가가자 되레 아버지가 물러났다. 아버지도 빌과 론처럼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뭐?”

졸지에 내게 선수를 빼앗겨 화낼 타이밍을 놓친 아버지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앉으시겠어요?”

“……그래.”

결국 아버지는 내게 말려 내 머리채를 잡기는커녕 욕 한마디 못 하고 나와 마주 앉게 되었다. 기다리고 있던 수잔이 테이블 위로 화분을 올렸다.

“이건…….”

“후원의 칼날민트예요.”

정확히는 그루안 상단에서 구매하여 후원으로 옮겨 심은, 이지만.

“칼날민트의 어린잎은 숙취에 굉장히 효과가 좋다고 들었어요. 그냥 씹어 먹으면 특유의 화한 성분 덕분에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 으음.”

아버지는 내 말에 대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흥, 내가 숙취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지.’

내 행동을 최대한 꼬아서 생각하려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존경스러운 분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기침하지 않으시다니, 걱정이 되어서요.”

“…….”

“아무도 아버지께 숙취 해소 음식을 드리지 않은 걸까? 그러면 곤란하실 텐데. 싶어서 준비해 봤는데, 이미 드셨을까요?”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움찔거리다가 이내 칼날민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린 잎을 하나 뜯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 순간, 나를 어떻게든 나쁘게 생각할 생각이 가득했던 아버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이건……!”

“후원에서 키운 칼날민트예요.”

나는 일부러 다시 언급했다. 아버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바로 숙취가 풀리지는 않았……!”

그러다 뭔가를 깨달았는지 입을 떡 벌렸다. 아버지는 다시 어린 잎을 하나 뜯어 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충격과 이채로 혼잡해지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후원에서 키우던 기존 칼날민트잎으로 숙취 해소 효과를 보려면 어린잎 다섯 장은 씹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고작 두 장만으로 숙취가 완전히 가시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겠지.

“……흙을 전부 갈아엎은 보람이 있구나!”

내가 해 준 조언, 약초가 영글 시간을 줘야 한다는 말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박고자 하는 쐐기는 이것이었다.

나 때문에 베티와의 불륜 관계가 밝혀졌으니, 나를 미워할 거라는 건 자명했다. 내가 그간 글라델리스 상단에 도움 되는 일을 한 건 맞지만, 이것만으로는 아버지를 완전히 구워삶을 수 없다.

그러니 아버지에게 알려 줘야 했다.

내가 조언하는 대로 따르면 확실하고 정확한 결과가 빠르게 따른다는 것을. 나는 결코 버릴 수 있는 패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숙취가 좀 가셨나요?”

“가시다마다! 하하하!”

아버지는 나를 혼쭐 내려 했다는 것도 잊은 채 호탕하게 웃었다.

약초의 효능이 좋지 않아 앓고 있던 골머리를 해결해 줬으니, 불륜을 까발린 건 용서해 주겠지. 이 효능을 되찾은 약초만 있으면 더 적은 양의 약초로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이제 나는 완전해졌구나!”

아버지의 숙원인 처가로부터의 독립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