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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28화 (28/186)

28화

나는 길버트를 뒤로하고 다시 약초밭으로 향하려고 했다. 주정뱅이의 말을 귀담아들어서 좋을 건 없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다.

“어어, 안 돼!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런데 길버트가 기를 쓰고 나를 막아선다.

이게 또다시 말을 놓네? 하지만 뭐, 주정뱅이에게 지적해봐야 듣겠나?

그냥 놔두기로 했다.

길버트가 말했다.

“얼마 전에 흙을 갈아엎어서, 아직 연구 중이라고! 아무나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연구에 차질이…….”

“알아.”

“뭐?”

“땅을 갈아엎었다는 거, 안다고.”

“그걸 어떻게…….”

“뭘 어떻게야. 내가 알려 준 거니까 그렇지.”

“뭐어?”

길버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알고 있었지? 여기서 키운 약초의 효능이 어째서 좋지 않은지 말이야.”

자신을 식물학자라고 소개한 길버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길버트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 식물이 제대로 크기도 전에 수확을 했으니, 효능이 좋을 리가 없잖아.”

“맞아. 다 자란 듯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었지. 그래서 내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어. 빨리 성장시키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허…….”

나를 보는 길버트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여전히 미심쩍어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이라기엔 뭔가 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읽혔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후작이 갑자기 똑똑해졌다 했더니, 그게 사실은 아가씨의 조언 덕분이었군?”

이제 보니 길버트는 아버지도 막 부른다. 어떻게 여태 안 잘렸을까 싶지만, 그만큼 앞에서는 처신을 잘 하는 모양이다.

뭐, 길버트의 해고 문제는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약초 밭에 뭘 하려는 게 아니고 저거.”

난 아까 눈여겨봤던 약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한 뿌리만 캐낼 생각이니까.”

“저건…….”

길버트가 뒤에 서 있는 수잔을 바라봤다. 수잔은 이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 했으니 길버트와 구면이었다. 그녀는 길버트가 내게 못되게 군 게 마뜩찮은지 쌀쌀맞게 대답했다.

“제가 아가씨의 명령을 받아 심은 약초죠.”

“아하하…….”

길버트는 그제야 제가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길버트가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아니 난…….”

그는 뭐라 변명하려다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오해를 했네. 미안하다.”

그리고는 깔끔하게 사과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해괴한 소리만 하기에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딱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여전히 반말이라는 게 뭔가 웃겼지만.

그가 말했다.

“토양을 갈아엎어서 약초가 느긋하게 자랄 시간이 생긴 건 좋은데, 너무 한 번에 갈아엎어서. 환경이 갑작스럽게 바뀌어서 죽을까 봐 걱정이 됐거든.”

“이해해. 나도 아버지가 한 번에 갈아엎을 줄은 몰랐으니까.”

역시 아버지는 식물의 ‘ㅅ’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또 미리 적응시켜야 한다면서 예전과 달리 어린 묘목도 많이 심었거든. 짓밟힐까 봐…….”

길버트의 말에 나는 그것도 알고 있다고 손을 내저었다.

“자,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

나는 다시 약초 밭을 돌아봤다.

“캐도 되는 거지?”

“아무렴. 아, 아니다. 내가 캐올게.”

“아, 괜찮은데…….”

너 취해서 호미질 잘못했다가 뿌리에 상처 나면 어떡해.

내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자, 길버트가 ‘식물학자를 뭐로 보고!’ 하고 표정으로 항변했다.

“여기서 딱 기다려.”

다시 밀짚모자를 고쳐 쓴 길버트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얼른 텃밭으로 향했다.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 구릿빛 피부는 약초밭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는 눈 깜빡할 새에 내가 지목한 약초를 캐내 가져왔다. 잔뿌리 하나까지 상하지 않은 채였다.

“와아.”

“화분은 이거면 되냐?”

그리고는 척척 화분에 옮겨 심고 내게 건네줬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됐다.

나는 수잔이 접어 준 드레스를 펴며 말했다.

“고마워.”

“천만에.”

길버트는 언제 그렇게 나를 적대했냐는 듯 호의적으로 웃었다. 이런 변화가 조금 낯설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다 크기도 전에 팔려 나가는 약초들 보면 속 쓰렸는데, 잘됐네.’

아무래도 길버트는 식물을 정말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술 어쩌고저쩌고해서 괜한 편견만 생겼었네.

나는 이대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아, 카르시안이랑 친해?”

“음~ 친하다기보다는 그냥 동료.”

“동료?”

“어. 말에게 먹이는 짚이나 이런 걸 내가 주문 넣고, 또 영양제도 처방하고 있으니까.”

식물학자면서 약초를 관리하고 있으니 수의도 담당한다며, 길버트가 으스댔다.

생각보다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잖아?

길버트를 조금 다시 보게 됐다. 나는 길버트에게 카르시안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는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낫겠지.

나는 화분을 들고 있는 수잔의 곁으로 가며 말했다.

“카르시안을 보면 말해 줘. 방에 아침 식사 남겨 놨으니까 먹고 가라고. 난 오전 중에 좀 바쁠 예정이거든.”

“으음?”

내 말에 길버트가 한쪽 눈썹을 휙 치켜 올렸다.

‘아침을 남겨 놨다니. 카르시안의 식사를 챙겨 주는 건가?’

그런 생각과 함께 내가 다른 후작가 사람들과 달리 카르시안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단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그런 길버트를 뒤로한 채, 수잔과 함께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다.

* * *

길버트는 알코올 의존증은 없었지만 엄청난 애주가였다.

마시는 양에 비해 잘 취하지도 않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아니기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기에 길버트는 아침마다 고주망태가 되어 카르시안을 맞이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 왔냐?”

카르시안에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너무도 멀쩡했던 것이다.

“뭐야? 술 안 마셨어?”

익숙하게 장갑과 장화를 챙기던 카르시안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수를 한 지 얼마 안 됐는지 검은 앞머리가 조금 젖어 있는 모습은 오전의 햇살 덕분에 싱그러웠다.

그런 카르시안을 보며 길버트는 어딘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침부터 귀엽지 않은 상사가 들이닥쳐서 말이야.”

“귀엽지 않은 상사?”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멜빵 바지를 입은 카르시안이 미간 사이를 오므렸다. 그에 길버트가 킥킥 웃으며 카르시안의 어깨를 툭 밀쳤다.

“야, 너 수완 좋더라?”

막 장화를 신고 있던 참이라 휘청거린 카르시안이 알아듣게 설명하라며 짜증을 냈다. 그래 봐야 아기 고양이가 하악질 하는 것 같아서, 길버트에게 타격은 없었지만 말이다.

“라티아 아가씨 말이야.”

“……뭐?”

목장갑을 끼던 카르시안이 그대로 굳었다.

“아침에 왔었거든. 아가씨면서 드레스도 접고 약초밭을 헤집고 있지 뭐야. 아니, 헤집은 건 아니지만.”

“라티아가, 여기에?”

카르시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면서 혹시나 주변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휙휙 둘러봤다. 당연히 라티아는 이곳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것을 안 카르시안이 얼굴을 꽤 험상궂게 구기며 말했다.

“라티아와 무슨 대화를 했어? 설마 민폐를 끼친 건 아니겠지?”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조금 전과 달리 꽤 위협적이었다. 길버트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뭐야, 요 며칠 후작저에 자주 드나든다 싶었더니 정말 아가씨랑 뭐라도 있는 거야?’

그동안 카르시안은 마구간 일이 끝나면 항상 그 초라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 카르시안을 끄집어내 바깥에서 햇볕을 쬐게 하고 말 한 마디라도 더 건넸던 게 길버트다. 요컨대 요 며칠, 마구간 일이 끝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후작저로 향하던 카르시안의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다.

길버트는 애먼 사람 잡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뭘 민폐야, 민폐는.”

“넌 사람을 막론하고 반말하잖아.”

“그럼 내 나이가 조금 있으면 서른인데 여기저기 머리 숙이고 다니냐?”

“사용인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지도 열 살이면서 나한테 따박따박 너, 너, 하면서…….”

길버트가 중얼거리자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한번 형형해졌다.

“그래서. 무슨 대화를 했는데? 라티아가 왜 여기까지 온 건데?”

“몰라.”

“뭐?”

“알아도 안 알려 줄 거야.”

“왜!”

“너의 이 행동이 괘씸해서, 인마.”

길버트가 카르시안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카르시안은 그런 길버트의 손을 앙칼지게 쳐 내고는 눈을 부라렸다.

‘조금 더 놀리면 물어뜯겠네.’

기껏해야 상처 입은 고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가 맹수 새끼를 잘못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길버트가 말했다.

“방에 아침 식사 남겨 놨대.”

“…….”

“무슨 말로 꾀어냈냐? 뭘 했기에 사생아라서 패악질만 부린다는 그 아가씨가 널 위해서 아침을 준비해?”

길버트가 물었지만 카르시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침……을?’

카르시안에게 배식되는 식사는 최소한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길버트와 나눠 먹거나 정원이나 후원에 열린 열매나 과일을 따 먹고는 했다.

라티아도 이걸 아는 걸까?

‘그래서 저번 저녁도 그렇고…….’

저를 위해 식사를 남겨 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깊은 곳이 간지러웠다. 내내 번데기 상태였던 나비가 부화한 것처럼, 날갯짓 때문에 간지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카르시안은 언제 그렇게 으르렁거렸냐는 듯 수줍고 나른하게 웃었다.

‘날 위해서…….’

기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포슬포슬하고 따듯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이를 본 길버트는 생각했다.

‘카르시안에게 이렇게 평범하고 귀여운 면도 있었나.’

길버트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르시안의 검은 머리칼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사실 카르시안은 손찌검을 당해 머리 위로 손이 올라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불쾌하다는 듯 얼굴만 찌푸릴 뿐 길버트의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앙칼진 말은 한 번 했지만.

길버트는 결 좋은 머리칼을 슬슬 쓰다듬으며 카르시안이 ‘라티아’ 이야기를 했을 때 짓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표정이 다양해졌군.’

새까맣게 죽은 눈동자로 무표정만 고수하던 녀석이었는데.

‘이 변화는 역시 라티아 아가씨 덕분인가? 뭐, 의지할 곳이 하나라도 더 늘은 건 좋은 거지.’

길버트는 카르시안의 머리칼을 몇 번 더 헤집고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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