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카르시안은 후작 부부가 아직도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후원의 공터로 나왔다.
세이렌을 부르는 마법 주문을 외운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삐익…….
흡사 매를 닮은 울음소리를 내며 세이렌 한 마리가 날아왔다. 우아한 여인의 모습에 날개를 가진 세이렌이 지상에 발을 디뎠다.
“어머, 오랜만이구나. 편지를 보내게?”
“네, 아버지는 잘 계시나요?”
“그럼, 잘 있다마다. 아주 괜찮은 남자인데 사별한 부인을 잊지 못해 우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야.”
세이렌은 호호 웃고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카르시안은 알버스의 저주와 달리 아버지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럼 편지는 내가 잘 전해 줄게.”
“매번 감사합니다.”
“뭘, 네 아버지 덕분에 우리 세이렌들도 안전해지고 있는걸.”
세이렌은 해적들의 일등 사냥감이었다. 세이렌의 날개만 있으면 무풍지대에서도 바람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질 나쁜 해적들은 배에 세이렌 한두 마리씩 꼭 싣고 다녔다.
그랬는데 세이렌이 안전해졌다니?
“아버지 덕분에요?”
“어머, 모르겠구나.”
세이렌은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며 나른하게 웃었다.
“네 아버지가 바다를 평정하고 있거든.”
* * *
어머니는 결국 짐을 싸 들고 친정으로 내려가 버렸다.
외가의 지원은 물론이고 부부의 불화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힐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친정행을 말린 모양이지만…….
“그러게, 누가 바람피우래?”
나는 현관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아버지를 보며 이죽거리다가 얼른 방으로 숨었다. 이 사달이 난 이유는 나 때문에 아버지와 베티의 사이가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내게 불호령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웬걸.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
“하아암…….”
나는 아침에 길게 기지개를 켜며 수잔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 시엘 님이 제대로 손을 써 주신 것 같아요.”
수잔이 따듯한 세숫물을 가져오며 웃었다.
시엘은 어제 돌아가기 전 나에게 아버지의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가씨와 제휴를 맺은 건 비밀로 하겠지만, 제가 스승을 자처한 건 공개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후작의 동의도 필요하니까요.’
‘아버지라면 선생님이 오실 때마다 떨어질 콩고물 때문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걸요.’
‘어머, 그런 말도 아시나요? 독서가 취미라고 하시더니, 사용하는 단어도 남다르네요.’
‘아하하…….’
시엘의 앞에서는 더욱 긴장하고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엘 님이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서신이 왔다고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고 싶다며 약속을 잡는 내용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수잔이 말을 하자마자 다른 하녀가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아버지가 따로 지시한 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굉장히 호화로웠다.
하녀가 물러가고, 수잔이 웃었다.
“하루아침에 다들 변했네요.”
“뭐어, 아가씨 대우는 여전히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인사도 없이 들어와서, 인사도 없이 나갔지 않나. 그래도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머니와 베티가 한 번에 사라지자, 나와 수잔을 핍박했던 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냐면 이 후작저의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을 내쫓은 게 나니까. 베티에게 말했던 “그러게, 줄을 잘 탔어야지.”라는 말이 다른 하녀들에게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수잔의 도움으로 세수를 하고 그녀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
“그래서? 시엘 선생님이 언제쯤 오신다는 말은 없어?”
“네. 후작님과 약속을 잡는 거니, 후작님의 일정에 달린 것 같아요.”
“음…….”
나는 빵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참고 대신 물을 마셨다.
저건 카르시안 줘야지.
나는 카르시안의 몫으로 빵과 과일, 우유 등을 남겨 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시엘이 자리를 깔아 줬으니, 나는 그동안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겠지!
간단한 단장을 해 준 수잔이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응, 후원.”
아버지는 숙취로 인해 아직도 자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사이, 아버지가 앞으로 내게 입도 벙끗 못 할 계기를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베티는 쫓겨났지만 어머니는 언젠가 돌아올 거다. 어쩌면 가정의 평화를 깨트렸다며 나를 더욱더 핍박할지도 모른다. 방어막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완전히 비틀려 버리면 너무 좋고.
나는 수잔과 함께 후원의 약초밭으로 향했다.
* * *
글라델리스 후작저의 후원은 다른 귀족 저택과 달리 밭이었다. 그 밭에 심어진 것들은 온통 약초이며, 대부분 그루안 상단에서 빼낸 비법으로 재배되고 있었다. 글라델리스 후작 영지에 있는 방대한 약초 밭에서 재배되는 약초들 중 일부였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걷어 주는 수잔을 손길을 받으며 약초밭을 둘러봤다.
“내가 전에 아버지께 드렸던 조언이 효과가 있나 봐.”
나는 일전에 아버지께 토양이 문제라고 말했다. 영양제와 비료를 때려 박아 약초가 영글기 전에 너무 빨리 성장해 버려 효능이 약한 거라고 설명하면서. 그때 아버지의 표정이 흥미롭더니, 약초 밭에 투여되던 영양제가 싹 사라졌다고 들었다.
“네. 제가 전에 베티에게 줄 보들보들초를 캐낼 때도 보니까 흙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수잔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수잔에게 고개를 주억이고는 일전에 셀트론에게 구매했던 약초를 옮겨 심은 곳으로 향했다. 베티가 깨트린 화분 속에 있던 보들보들초도 여기로 옮겨 심었다.
“그런데 아가씨, 그루안 상단에서 구입한 약초로 뭘 하실 생각이세요?”
수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다 생각이 있겠지만…….’ 하고 궁금한 눈치다.
나는 약초들을 둘러보다가 가장 싱싱해 보이는 약초를 하나 고르며 말했다.
“뭘 하긴. 쐐기를 박으려고 하는 거지.”
음, 잎도 파릇파릇하고 향도 짙다. 저게 좋겠어.
내가 고른 약초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뒤에서 커다란 고함이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괭이를 들고 씩씩거리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당장 거기서 나와!”
아무래도 밭지기인 모양인데 얼굴이 붉은 걸 보니 취한 모양이었다.
아니, 엄연한 근무 시간인데 술을 마시면서 일한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저택의 아가씨인 나도 못 알아보는 거겠지.
“썩 나오라는 말 못 들었어?!”
남자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취한 사람을 상대해 봐야 좋을 건 없다. 그것도 괭이라는 무기를 들고, 매일 밭일을 하느라 힘이 센 남자라면 더더욱.
나와 수잔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 천천히 밭에서 나왔다. 그가 불손한 눈빛으로 나를 휙휙 훑어봤다.
‘이 꼬마는 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다.
나는 술 냄새가 풀풀 나는 남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다니. 이 사실을 후작님께서도 아시는가?”
앳된 목소리지만 최대한 중후하게 말했다.
“아시는가아?”
남자가 기도 안 찬다는 듯 비꼬았다. 수잔이 발끈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지 않고서야 가문의 아가씨에게 이렇게 망발을 하는 데다가 술주정뱅이를 밭지기로 계속 뒀을 리가 없으니까.”
“아가…… 뭐?”
순간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가씨, 아가씨라고? 이 저택의……?”
“그래. 내가 바로 라티아 글라델리스다.”
“허…….”
순간 남자의 표정에 흥미가 스쳤다.
‘이 꼬맹이가 말이지.’
나를 훑어보는 눈빛은 여전히 불손했지만, 조금 전처럼 위협적이진 않았다.
나는 솔직히 좀 의외였다. 나를 아는 눈치인 모양인데, 그러면 다른 사용인들처럼 내가 사생아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비웃거나 엘레네가 아니라서 김이 빠지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문으로만 듣던 이를 마주했을 때처럼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이지?
궁금해졌다.
“나를 알아본 것 같은데, 대처는 그게 다인가?”
“뭐?”
“아가씨를 봤으면.”
나는 그의 주변에서 위협적인 기운이 사라진 걸 느끼고 다가가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새초롬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인사를 해야지.”
내 말에 남자는 다시 한번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하하하!”
남자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허리까지 뒤로 젖히고 웃었다.
어쭈, 이것 봐라? 역시 나를 무시하는 사용인 중 한 명이었구만?
나는 그에게서 관심을 끄고 마저 내 할 일을 하려고 했다. 이때였다.
“제가 아가씨를 못 알아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머리에 대충 걸치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으며 내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자세는 무척이나 완벽했다.
“이러면 됩니까?”
이내 남자가 고개를 반짝 들고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자니, 몸을 일으켜 세운 남자가 수염이 까칠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카르시안의 말과 달리 까칠한 면이 있는데?”
“……어? 카르시안을 알아?”
“여기서 마구간은 가까우니까.”
남자가 턱을 매만지던 채로 말했다.
“여러모로 가까워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 녀석이 딱하기도 했고.”
남자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르시안이 마구간에서 일한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른다.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게 멋쩍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난 길버트야.”
“아가씨에게 말 놓네?”
“전 길버트입니다.”
자신을 길버트라 소개한 남자가 빈틈이 없다며 눈가를 찡그렸다.
나는 길버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데 대낮부터 음주라니, 이건 정말 직무 유기 아니야?”
“직무 유기라니! 식물학자로서 연구에 충실할 뿐이라고요!”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며, 길버트가 펄쩍 뛰었다.
“아니, 무슨 연구?”
식물학과 음주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의아하다는 듯 물으니 길버트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모든 술은 식물에서 시작되었거든요.”
“……뭐?”
“와인은 포도, 테킬라는 아가베, 스카치는 보리, 버번은 옥수수, 럼은 사탕수수가 재료거든요. 그러니 술을 마시는 것이야말로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이거 이제 보니 아주 제대로 된 주정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