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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26화 (26/186)

26화

시엘은 가만히 라티아를 바라봤다.

‘참 기묘한 아가씨란 말이야.’

시엘은 셀트론에게 사정을 들었다.

‘라티아 글라델리스 아가씨는 굉장히 똑똑하세요! 그런데 주변 어른들이 모두 아가씨를 방해하기 급급해요.’

시엘은 라티아에게서 지난날의 자신을 봤다.

연인에게 논문을 빼앗긴 후에도 ‘어린 나이에 그렇게 훌륭한 논문을 썼을 리 없다!’라며 추방당했던 날의 자신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 직접 셀트론과 함께 움직인 것이다. 라티아는 그녀가 직접 온다는 걸 몰랐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셀트론에게 사정을 들어 상황을 알고 봐도 라티아는 너무도 어른스러웠다. 같은 또래기는 하나 세 살이 많은 카르시안에게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과 옳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서 도련님은 저 아가씨를…….’

카르시안이 어째서 자신과 함께 움직이려 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가씨가 아무리 똑똑하고 처신을 잘 한다고 해도, 결국 일곱 살인데.’

라티아 한 명만을 믿고 카르시안을 맡기기엔 그녀의 상황도 썩 좋지 못했다. 라티아가 이렇게나 카르시안을 위해 주고 있는데, 카르시안이 아직도 마구간 일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도련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아.’

시엘은 은혜를 갚고 싶은 거지, 은혜를 갚는 자신에게 심취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기에 잠시 고심하던 시엘의 머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세요?”

시엘은 카르시안과 라티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늘 가졌던 오찬 자리는 그루안 상단주가 제 상단, 예리엘 만물 상단과 제휴를 맺은 사실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잖아요.”

“그렇죠.”

라티아가 관심을 가졌다.

“후작의 목적은 저와 제 상단인 만큼, 제가 직접 나서면 어떨까요?”

“상단주께서 직접이요?”

“네, 주기적으로 방문한다든가요.”

시엘의 대답에 라티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카르시안이 떠나지 않아도 되겠어요! 예리엘 만물 상단은 워낙 큰 곳이고, 후작님도 제휴를 맺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던 곳이니까요!”

그런 상단의 직원도 아니고 주인이 직접 오간다니!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그라들었던 사람들의 관심도 다시 불이 붙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의탁하고 있는 카르시안에게도 관심이 생길 테고.

‘아버지는 예전처럼 카르시안을 멋대로 학대하지 못할 거야!’

이렇게 되면 후작저에서 카르시안을 내보내려고 했던 애초의 이유도 없어진다.

“와, 잘됐다, 카르시안. 그렇지?”

라티아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카르시안은 아직 얼떨떨해 보였다. 라티아야 환생과 회귀의 기억이 있으니 바로 알아차렸다지만, 카르시안은 아니다. 그렇기에 라티아가 한 차례 설명해 준 후에나 고민이 해결된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번거롭지 않겠어? ……요?”

카르시안이 뒤늦게 존댓말로 수정했다. 여태 너무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던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에 시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편하게 대해 달라 부탁했다.

“번거로울 게 있나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어서 기쁠 뿐이에요.”

카르시안이 베풀어 준 작은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시엘은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나쁜 생각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제라도 카르시안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카르시안은 더 이상 시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 받은 도움은,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꼭 갚자.’

카르시안조차 자신감이 없던 아버지의 귀환에, 라티아가 힘을 줬다. 덕분에 카르시안은 클로드가 돌아올 것이라 다시 한번 믿을 수 있게 됐다.

다짐한 카르시안은 어차피 안면몰수한 거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그가 시엘에게 말했다.

“부탁할 게 있어.”

“네, 도련님. 뭐든 말씀해 주세요. 당장 별채부터 짓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내가 아니야.”

카르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라티아를 힐끔거렸다.

“라티아를…… 가르쳐 줬으면 해.”

너무도 뜻밖의 이야기에 모두가 어리둥절해졌다.

카르시안은 귓등이 홧홧하게 붉어진 채 말했다.

“라티아는 똑똑해. 그루안 상단을 일으킬 정도로. 그러니까 라티아는 더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카르시안이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 조금도 예상치 못했기에, 라티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훔쳐보던 카르시안이 시엘을 보며 결연하게 말했다.

“이끌어 줄 어른과 함께라면 라티아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나를 위해 주는 만큼 라티아도 도와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무 염치없는 말 같아서, 뒷말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에 시엘은 주먹을 움켜쥔 카르시안을 보다 이내 짙은 미소를 띠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매혹적이면서도 다정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임시 스승을 자처해도 될까요?”

“아, 저는…….”

라티아는 손사래를 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분명 제휴와는 별개의 일일 거야.’

카르시안의 말대로 라티아의 주변에는 그녀를 이끌어 줄 어른이 없었다.

사랑을 듬뿍 주는 수잔은 부모 같은 존재이며, 셀트론은 함께 커 가는 사업 파트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코 라티아를 이끌어 줄 ‘스승’은 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거상인 시엘은 나에게 딱 맞는 선생님이야.’

그렇게 생각한 라티아는 거절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늘렸다.

“제게 가르침을 주신다면 열심히 배울게요.”

말뿐만이 아닌 행동도 함께 대답하는 모습에, 시엘은 라티아가 결코 기회를 허투루 놓치는 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시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시엘과 라티아는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 * *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뵐게요. 제휴 계약서와 아가씨께서 맡긴 의뢰의 결과서를 가지고요.”

시엘의 말에 라티아와 카르시안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엘과 셀트론이 떠나자 카르시안도 방으로 돌아왔다. 방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식자재 창고 옆 가건물이었지만 이제는 정이 든 것 같기도 하다.

마구간에서 일하고 와서 피곤할 법도 하지만, 곧장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여태 잊고 있던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지의 상단에는 ‘아버지에게’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아, 맞아.”

펜촉에 잉크를 묻힌 카르시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편지를 보내려고 하다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어서 잠시 넣어 놨었지.”

그 뒤로 많은 일이 있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카르시안은 잉크가 묻은 펜을 쥐고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어째서 아무런 말을 쓸 수 없었는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내 근황을 이야기하려면…….”

후작저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즉, 필연적으로 라티아의 이야기도 해야 했다.

‘아버지에게 라티아가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돼.’

우스웠다.

저를 괴롭히던 이가 나쁘게 보일까 봐 걱정되어, 결국 아무런 말도 쓰지 못하고 펜을 내려놨다니.

사실 카르시안은 라티아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물론이고 저를 괴롭힌 이들을 용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비록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그 전에 알리지는 못하겠지만, 클로드가 돌아오면 곧장 고할 생각이었다.

‘그럼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버지께서 복수를 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라티아가 변했다.

물론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자꾸만 라티아의 주변을 맴돌게 됐다.

저를 똑바로 보는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에 다시 총명함이 깃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라티아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달라진 그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라티아가 쫄쫄 굶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빵을 훔쳐 라티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제가 배고팠을 때도 훔치지 않았던 빵을 말이다!

‘혼란스러웠어.’

라티아에게 빵을 주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이대로 라티아를 믿었다가 다시 뒤통수를 맞으면 어떡하지, 배신당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데 라티아는 카르시안에게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기필코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난 이미 라티아를 용서했던 거야.’

그것을 깨닫자 라티아의 진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라티아는 굉장히 능동적인 사람이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괴롭힌 이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이행했다.

‘그러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았지.’

셀트론과 삐로리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 준 그 상냥한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속이 간지러워졌다. 그런 라티아를 보며 카르시안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난…… 정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

바다는 너무 위험하다는 클로드의 말에 이렇다 할 노력도 안 하고 징징대다가 결국 내륙에 남았다.

태도를 바꾼 후작가 사람들에게 권리를 주장하긴커녕 찍소리도 못 하고 뒤에서만 씨근덕댔다.

‘내가 겪은 부당한 일의 처벌도 아버지께 부탁하려고 했지.’

이런 자신의 모습과 저와 별반 다를 거 없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라티아는 무척 비교되었다.

쟁취하고, 복수하고, 끝내 조력자를 만든 라티아는 정말 대단했다. 부럽고 질투가 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동경하게 됐다.

‘나도 라티아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 라티아처럼 하고 싶었다.

어느새 라티아는 그에게 적이 아닌 목표가 되어 있었다. 해서, 클로드에게 보내는 편지에 라티아의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적이 나쁘게 비칠까 봐, 그래서 미래에 라티아를 볼 수 없게 될까 봐.

‘하지만 그것도 다 예전 이야기야.’

텅 비어 있던 편지지는 어느새 검은 글씨로 꽉 찼다.

그 속엔 라티아의 조언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이야기가 한 줄, 그리고 라티아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리는 이야기가 열 줄 이상 적혀 있었다.

편지를 한 번 죽 읽어 내용을 확인한 카르시안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추신. 라티아가 시한부래요. 무슨 병인지 아직 모르지만, 꼭 알아낼 거예요. 그러니까 돌아오시면 바로 의사를 불러 주세요. 라티아는 제 은인이에요. 꼭 살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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