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도련님…….”
시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다급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어째서죠? 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에 있겠다고 하시는 건가요? 여긴, 여긴 도련님을 품을 그릇이 못 돼요!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를 여기에 맡겼어.”
카르시안의 말에 표정을 가다듬고 있던 라티아도, 시엘을 말려야 하나 고민하던 셀트론도, 무릎을 꿇으며 매달릴 기세이던 시엘도 모두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시엘이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도련님을 학대하는 곳에 남으시겠다고요?”
“고작이라니. 고작이 아니야.”
고개를 저은 카르시안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꼭 돌아오실 거야. 나는 그때를 생각해야 해. 대단한 업적을 쌓고 오실 아버지의 귀환에, 아버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불명예를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아.”
“그게 무슨…….”
“아버지가 보는 눈이 없어서 자식을 학대할 친우와 어울렸다고 세상에 알리기 싫다는 말이야.”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그에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카르시안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공로를 온전히 칭송하고 싶어.”
이제 고작 10살인 소년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도 의젓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시엘과 셀트론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태 왜 무역로가 개척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클로드가 바다에서 해적 또는 마물에게 당해 죽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이때였다.
“아니, 카르시안. 나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예리엘 상단주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
라티아가 나선 것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카르시안의 마음? 물론 굉장히 기특하고 갸륵해.’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카르시안이 이렇게 학대를 받으며 험난하게 지낼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라티아는 클로드가 돌아오는 시기를 떠올렸다.
‘라움디셀 백작은 장장 3년 후에나 돌아와.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아.’
라티아가 말했다.
“생각해 봐, 카르시안.”
“…….”
“라움디셀 백작님은, 네 아버지께선 꼭 돌아오실 거야.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분명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금의환향을 하실 거야.”
확신에 찬 그 목소리에 내심 클로드가 죽었거나 죽을 거라 여기고 있던 시엘과 셀트론은 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카르시안도.
카르시안은 클로드가 살아 있을 거라고, 그래서 건강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모르는 건 아니야.’
알버스가 저주를 퍼붓기도 했기에, 그조차 클로드의 생사에 대한 확신이 많이 없었다. 그랬는데 라티아가, 그것도 글라델리스 후작 가문의 장녀가 그의 아버지는 살아 있다고, 꼭 돌아올 거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도 확신을 담아서!
라티아가 찬연하게 빛나는 자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봐, 네 아버지께서 과연 자신의 업적을 위해 괴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아들을 기특해할까?”
“…….”
“오로지 자신의 공을 위해서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끙끙 앓기만 하던 아들을 본 아버지의 심정은 편안하기만 할까? 너를 ‘그동안 참느라 고생했다.’고 칭찬하실까?”
클로드가 알버스 같은 인간이라면 칭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라티아는 클로드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카르시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라티아는 생각했다.
아들이 3년간 연락을 하면서도 그 고통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클로드가 안다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카르시안을 돕고, 학대에서 보호를 해 준다고 하더라도…….’
클로드는 결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일원인 라티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꼼짝 없이 사형이야.’
생각만 해도 쭈뼛 소름이 끼쳤다. 그렇기에 라티아는 어떻게 해서든 카르시안의 생각을 돌리자고 다짐했다.
‘사실 이 구렁텅이에서 카르시안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
자신이야 대외적으로 ‘후작가의 장녀’이니 도망칠 수 없지만 카르시안은 아니잖나.
만약 카르시안이 거처를 옮기지 않으려는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가 보는 눈이 없었다’는 불명예 때문이라면.
‘안 밝히면 그만이지.’
의탁처를 변경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비록 너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네가 학대를 견디다 못해 의탁처를 바꾼다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
라티아의 말에도 카르시안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라티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정 마음에 걸리면 여쭤보자.”
“뭐?”
“내가 너한테 준 그 편지지 한 장, 아직 안 썼지?”
“아, 어. 아직…….”
카르시안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실 아직 안 쓴 게 아니고 잊고 있었다. 그간 라티아의 주변에 많은 일이 벌어졌기에, 미처 편지지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돌이켜 보니 참 이상했다. 그 편지지는 지금 카르시안에게 보물 1호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편지지를, 아버지와 연락이 가능한 유일한 수단을…… 여태 잊고 있었다니.’
그것도 라티아가 걱정되어,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녀가 언급한 후에나 떠올리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홀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는데, 라티아는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편지지를 통해서 여쭤보자. 네 근황을 알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카르시안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버지가 하루빨리 돌아와서 저를 이 괴로운 곳에서 빼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자신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다.
라티아는 그런 카르시안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아주 조금만 이야기를 하는 거야.”
카르시안이 무슨 소리냐며 갸웃거리던 고개를 마저 기울였다. 시엘과 셀트론도 궁금한 눈치로 라티아를 바라봤다.
라티아는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주 사소한 것만 티 내는 거야. 아, 그래. 오늘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와서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너는 초대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 어때? 사실이잖아.”
시엘은 손님이고 카르시안은 의탁된 아이지만 백작가의 영식이다. 게다가 친우의 아들이니 손님과 함께하는 자리에 동석해도 된다. 그런 자리에 카르시안이 배제됐다는 말은 그가 제대로 된 객식구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셀트론과 시엘의 얼굴에 ‘그런 방법이!’ 하고 깨달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걸로 과연 아실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카르시안은 아직 아리송한 듯 보였다. 라티아는 그런 카르시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백작이셔.”
라움디셀 백작가는 무척 가난하지만 그래도 귀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원작에 의하면 진짜로 신사적이고 똑똑한 귀족의 표본이라고 했어.’
그러니 이런 사소한 이야기만으로도, 카르시안이 처한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백작님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너의 마음도 전달이 될 거야.”
“네, 도련님. 제 생각에도 후작 영애의 말대로 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아요. 제 이야기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시엘이 라티아의 말에 힘을 실어 줬다. 이에 자신이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라 잠자코 있던 셀트론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 방책 없이 ‘아버지 제가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를 밝히는 것보다, ‘과거 저희가 도움을 준 이가 이번엔 저를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고 이야기를 끝내는 게, 백작님께 새로운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힘?”
“네. 그도 그럴 게, 도련님의 후견인으로 나선 이가 마탑주에 예리엘 만물 상단주이지 않습니까?”
셀트론이 ‘후견인 맞죠?’ 하는 얼굴로 시엘을 돌아봤다. 시엘이 기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힘으로 백작님의 귀환이 더욱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맞아요. 그간은 제가 몰라서 못 도와줬던 거니까요.”
셀트론과 시엘의 잇따른 설득에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쯤 되니 라티아는 의아해졌다.
‘아니, 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망설이는 거야?’
자신이었더라면 냉큼 ‘감사합니다!’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 같다. 그만큼 카르시안에게 전적으로 좋은 이야기인데,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굴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고.’
처음으로 카르시안의 마음이 읽히지 않아 은근히 초조해졌다. 결국 라티아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카르시안. 너……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뭐?”
“아버지의 불명예 때문에 여기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닌 거지?”
“아, 아니. 나는…….”
“그렇잖아. 그런 이유라면 이미 해결이 됐어. 백작님께 여쭤보면, 백작님은 분명 만물 상단주를 따라가라고 하실 거야.”
“…….”
“그런데도 넌 망설이고 있잖아.”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며, 라티아가 빤한 얼굴로 물었다.
카르시안은 정곡을 찔린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다가 이내 주먹을 말아쥐었다.
사실은 카르시안도 제가 왜 이렇게 머뭇거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객관적인 건 물론이고 주관적으로도 시엘을 따라가는 게 제게 훨씬 좋다. 그런데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카르시안은 가만히 라티아를 바라봤다.
저 못지않게 천대를 받고 있으면서도 항상 깨끗한 밀빛 머리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 총명해진 보라색 눈동자, 웃을 때면 자두를 머금은 듯 볼록 솟던 귀여운 뺨…….
항상 저를 ‘카르시안.’ 하고 다정히 불러주는 앳된 목소리와 마주할 때면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올곧은 시선.
카르시안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거기엔 네가 없잖아.”
“응? 뭐라고?”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작아 라티아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냐.”
카르시안은 얼른 고개를 붕붕 가로 저었다.
얼굴로 화끈한 열이 몰렸다. 제가 생각하고도 이상하고, 말도 안 된다. 고작 라티아를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내치려고 하다니!
카르시안이 굳은살이 박인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를 본 시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카르시안의 중얼거림을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