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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24화 (24/186)

24화

“삑?”

깜짝 놀란 삐로리가 나를 황급히 돌아봤다.

“삐로리가 무슨 종인지, 원래 어디서 서식하는지를 알고 싶어요.”

내 말에 삐로리가 곤란한 듯 검은깨 같은 눈동자를 찡그렸다.

번역기의 전원을 꺼 놨음에도 삐로리의 생각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삐로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방생했다가 다쳐서 오면 안 되니까, 제대로 된 곳에 놓아주고 싶거든요.”

삐로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치 나에게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시엘에게 부탁했고, 이 의뢰를 물릴 생각은 없었다.

삐로리의 시선을 뒤로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엘이 등장하는 장면은 카르시안과도 연관이 있었지.

나는 불현듯 떠오른 원작의 내용을 되짚어 봤다.

시엘의 첫 등장은 카르시안이 아버지를 따라간 무역에서, 우연히 여주인공의 나라에 정박했을 때였다.

이리스는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우연히 라움디셀의 무역선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카르시안은 누군가가 숨어든 기척을 느끼고 검을 빼 들었다.

잠깐의 대치 후, 카르시안은 배에 숨어든 이가 최근에 멸망한 왕국의 공주라는 걸 알아차린다. 이리스는 삼촌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이리스를 쫓던 이가 다름 아닌 시엘이었다.

시엘은 이리스의 삼촌의 의뢰를 받고 도망친 그녀를 생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엘은 카르시안을 보자마자 이리스 삼촌의 의뢰를 취소해 버리는데, 그 이유는…….

나는 곧장 시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상단주님. 혹시 카르시안 라움디셀 영식을 아시나요?”

“제가 그 영식을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시엘은 그를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수잔을 시켜 카르시안을 데려오게 했다.

셀트론과 시엘이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지금은 내가 느닷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조금 있으면 내게 고마워할 것이다.

수잔이 데리고 온 카르시안은 마구간에 있었는지 작업복 차림이었다.

“저택이 시끄럽다 했더니, 무슨 일이야?”

카르시안이 짚이 엉겨 붙은 장갑을 벗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셀트론과 시엘을 번갈아 담고 있었다.

나는 카르시안에게 별말을 하지 않고 싱긋 웃기만 했다. 애초에 내가 말할 틈은 없었다.

왜냐면.

“……도련님!”

시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벼락같이 외쳤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아니. 대체 그 행색은 무슨……!”

시엘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카르시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엘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은…….”

“아아, 도련님!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시엘이 미끄러지듯 달려와 카르시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한지, 옆이 트인 것이 매혹적인 드레스가 사제복처럼 보일 정도였다.

카르시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엘과 나를 번갈아 봤다.

나는 카르시엔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셔. 이분 덕분에 오늘 일이 수월했었어.”

“아니, 근데 어떻게 이 사람이…….”

카르시안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카르시안과 시엘에게 앉아서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권했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자마자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라티아가 떠올린 원작에서, 카르시안과 시엘은 구면이었다. 그것도 시엘이 카르시안을 보자마자 의뢰를 취소할 정도로 돈독한 구면 말이다.

라티아는 감격에 겨워 카르시안만 보고 있는 시엘을 보며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카르시안이 시엘의 은인이었지.’

시엘이 단박에 의뢰를 취소하고 생포해야 했던 이리스를 호위까지 하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시엘에게 카르시안은 그냥 은인도 아니고 생명의 은인이니까!’

때는 카르시안이 5살일 적으로,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그때는 카르시안의 어머니도 살아 있었고, 무척 화목했다고 했지.’

세 사람은 종종 함께 나들이도 나갔는데,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가난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 밝은 아이였던 카르시안은 열심히 조잘거리고 있었고, 클로드와 그의 부인은 그런 카르시안을 듬뿍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마차가 멈춰 섰다. 이윽고 마부가 비속어를 섞어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교육에 좋지 않을 거라 여긴 클로드가 마차에서 내려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리고 카르시안은 어머니와 함께 마차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카르시안이 시엘을 보지.’

마부에게 멱살이 잡혀 허름한 행색으로 살려 달라 외치는 시엘 말이다.

사실 이때 시엘의 사정은 좋지 못했다.

믿었던 마법사이자 연인에게 논문을 빼앗기고 누명을 쓴 채 황성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그녀가 진실을 폭로할 걸 두려워한 연인이 그녀에게 암살자까지 보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엘은 너무도 큰 좌절감 탓에 마법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꼼짝없이 죽을 위기였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마차를 봤고, 암살자에게 죽나 마차에 치여 죽나 똑같으니,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몸을 던진 거였지.’

그 마차에 탄 이들이 바로 라움디셀 백작 가족이었고, 마차가 멈춰 서자 암살자는 시엘의 예상대로 잠시 자취를 감췄다.

시엘에게 이러한 사정을 들은 카르시안은 곧장 클로드에게 부탁했다.

‘아버지, 저희의 음식을 좀 나눠 주면 안 될까요?’

시엘을 도와주자고.

덕분에 시엘은 먹을 것과 소량의 돈을 얻었다.

고마운 마음이 든 시엘은 카르시엔에게 몇 가지 간단한 마법을 보였고, 카르시안은 처음 본 마법에 굉장히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엘이 다시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신감이 되어 줬다.

‘좌절감 때문에 굳어 있던 마력의 흐름이 희망으로 녹았다고 했어.’

시엘은 카르시안과 그의 가족들에게 꼭 은혜를 갚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당시 카르시안의 가족들이 타고 있던 마차는 가문의 마차가 아닌 부름 마차였다. 그렇기에 시엘은 재기에 성공했음에도 결국 카르시안을 찾을 수 없었었다.

이후, 시엘은 타국에서 이리스를 쫓던 중 카르시안과 재회를 했던 것이었다.

원작 회상을 마친 라티아는 카르시안의 앞에서 눈물짓는 시엘을 쳐다봤다.

“그때 도련님께서 나눠 주신 은혜 덕분에 저는 지금 마탑주의 자리까지 올랐어요.”

그녀는 카르시안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은인과 만나게 해 준 라티아에게 서슴지 않고 정체를 실토했다. 덕분에 라티아는 귀찮은 탐색도 없이 시엘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엘은 라움디셀 백작가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돈이 없어 위험천만한 무역을 떠나며, 친우에게 아들을 맡긴 클로드의 일 말이다.

세간이 떠들썩한 일이긴 했지만 돈이 되는 일은 아니라 관심을 끄고 있었을 뿐.

“도련님의 가문, 제 은인의 가문의 일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진즉에 알았더라면 더 일찍 찾아올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카르시안은 조그마한 선행에 평생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시엘을 떨떠름히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쁜지 가만히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카르시안이 멋쩍게 대답하자 시엘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도련님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꼭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은혜도 갚고 싶었고요.”

시엘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눈물이 맺힌 눈동자에는 감격이 아닌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금 카르시안의 행색은 말도 안 되게 초라했다. 마구간지기나 입을 법한 허름한 멜빵 바지에,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은 절대로 백작가의 영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카르시안은 엄밀히 후작가에 의탁된 친우의 아들이다. 친아들처럼 보살피진 못하더라도 손님 대우라도 해 주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시엘은 조용히 타오르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입 안쪽을 짓씹었다. 모든 게 다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지난 5년간, 시엘은 이미 거상과 마탑주가 되어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아니,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알아봤더라면…….’

그랬다면 시엘은 소문의 라움디셀 가문이 자신의 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클로드가 위험천만한 무역을 하러 갈 일도, 지금처럼 카르시안이 고생을 하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시엘은 지독한 자책감에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가요.”

“뭐?”

카르시안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시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곳에, 이렇게…… 이렇게 계실 분이 아니시잖아요.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세요, 도련님.”

시엘은 신사적인 소문과 정반대로 악독한 짓을 벌인 글라델리스 후작을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그러며 카르시안을 이 마귀의 소굴에서 빼내고자 했다.

시엘은 카르시안이 자신을 따라나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카르시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가지 않아.”

그의 대답에는 라티아도 놀랐다. 그녀 또한 카르시안이 당연히 시엘과 함께 가리라고 생각했다.

후작저에서 멸시받으며 마구간에서 일하는 것보다, 거상이자 마탑주를 따라가는 게 훨씬 나으니까.

라티아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 카르시안이 말했다.

“난 여기서 아버지를 기다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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